간략한 요약
이 영상은 한국 외식업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설렁탕의 기원, 발전, 그리고 현대적인 형태로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탐구합니다. 설렁탕의 유래에 대한 다양한 설, 조선 시대 국밥집의 역할, 일제강점기 설렁탕의 전성시대, 그리고 해방 이후 식량난 속에서 밀국수가 추가된 배경 등을 설명합니다.
- 설렁탕은 몽골의 '슐렝'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며, 한국에 들어와 소고기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 조선 시대에는 소의 도축이 제한적이었으나, 18세기 이후 소 사육 두수가 증가하면서 설렁탕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 일제강점기에는 서울 인구 증가와 소고기 통조림 생산으로 인해 설렁탕집이 급증했으며, 파 고명과 깍두기가 추가되었습니다.
- 1960년대 식량난 속에서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에 따라 설렁탕에 밀국수가 추가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설렁탕의 탄생
설렁탕의 기원에 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선농탕 기원설입니다. 선농은 농사를 처음 가르쳤다는 고대 중국 신화 속 인물로, 역대 황제들은 선농에게 제사를 지내며 풍년을 기원했습니다. 제사를 지낸 후에는 왕과 백성이 희생 제물을 함께 나눠 먹는 신인공식 문화가 있었고, 많은 사람이 함께 먹기 위해 탕의 형태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설렁탕은 간장이나 된장을 사용하지 않고 소금으로만 간을 한다는 점에서 한국 전통 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설렁탕이 몽골에서 유래했다는 몽골 기원설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13세기 몽골이 고려를 지배할 당시 '슐렝'이라는 음식이 전해져 설렁이 되었고, 여기에 '탕'이 붙어 설렁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설렁탕이 한국에 토착화되면서 양고기 대신 소고기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국밥집
조선 시대에는 농업을 중요하게 여겨 소의 도축이 엄격히 금지되었지만, 왕과 양반들은 제사 등의 이유로 소를 잡아먹었습니다. 15세기 3만 마리였던 소는 18세기에 100만 마리까지 증가했습니다. 주막의 발달과 함께 장국밥이 등장했는데, 이는 밥에 장국을 말아 나물과 산적을 얹어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도축 후 남은 부산물로는 선짓국이나 설렁탕을 끓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9세기 말 백정들은 정육점과 국밥집을 함께 운영하며, 정육점에서는 살코기를 팔고 국밥집에서는 남은 부산물로 설렁탕을 끓여 팔았습니다.
조선음식계의 패왕
19세기 설렁탕은 지금과는 달리 파나 밀국수, 깍두기가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20세기 초, 설렁탕은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1920년대 서울 인구가 급증하고 회사령이 철폐되면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고, 일본이 소고기 통조림을 만들기 위해 조선에서 소를 수입하면서 부산물이 많이 남게 되어 설렁탕집이 급증했습니다. 설렁탕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식사이자 상류층이 배달시켜 먹는 음식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설렁탕은 누린내가 심했는데, 중국인 요리사들이 파를 이용해 누린내를 잡는 방법을 사용했고, 1920년대 중반부터는 설탕이 수입되면서 달달한 깍두기가 등장했습니다.
설렁탕의 완성
해방 이후에도 설렁탕은 주요 외식 메뉴였지만, 1960년대 식량난으로 인해 밀국수가 추가되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혼분식 장려 운동을 전개하며 밀가루 소비를 늘렸고, 이에 따라 설렁탕에 밀국수가 추가되었습니다. 하얀 우윳빛깔 국물, 파 고명, 달달한 깍두기, 밀국수가 더해져 현재의 설렁탕이 완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