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분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1대~27대 왕이야기" 어른부터 어린아이까지 귀에쏙쏙 박히게 알려드립니다 |조선500년 |한국사 |조선역사 |조선왕조실록 |역사

간략한 요약

조선 500년, 27명의 왕의 이야기를 통해 왕좌에 앉는 것이 얼마나 극심한 대가를 치르는 자리였는지를 다룹니다.

  • 왕위는 권력이 아닌 대가를 요구하는 자리였다.
  • 각 왕의 비극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싸움을 살펴본다.

왕좌에 앉으면 죽습니다

조선 500년의 역사에서 27명의 왕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며 왕좌에 올랐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왕좌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형제, 자식, 그리고 자신을 잃는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위화도 회군을 통해 조선의 첫 번째 왕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많은 피를 흘린 비극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1막 피로 세운 나라 — 태조·정종·태종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될 때 기대와는 달리, 아들들 간의 갈등과 피비린내 나는 반란을 보게 됩니다. 왕자의 난으로 형제간의 피가 흘리고, 태종 이방원이 왕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자신의 가족을 희생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태종은 사병 혁파와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정치체제를 마련하지만, 대가로 가족의 목숨을 잃습니다.

빛과 그림자 — 세종·문종·단종·세조

세종은 조선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한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하지만 그의 시절이 끝난 후 단종은 삼촌 세조에 의해 권력을 잃고, 피비린내 나는 합법적 공격의 주인공이 됩니다. 세조는 조카를 밀어내고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면서도 도덕적으로 비난받게 됩니다.

법전의 완성과 폭군 — 예종·성종·연산군

세종의 아들 예종과 성종 시절은 법전과 국가 체제를 완성하는 업적을 이루지만, 연산군의 폭정은 왕권과 국가의 부정부패를 가져옵니다. 왕비 윤씨와 관련된 사건들이 연상군의 폭군화로 귀결되며 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트립니다.

2막 사화의 시대 — 중종·인종·명종

중종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규모 숙청을 감행하게 되고, 정치적 갈등이 극심해집니다. 12세 왕 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후계구도의 혼란은 조선 왕권의 불안정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전쟁의 시대 — 선조와 임진왜란

선조는 임진왜란을 맞아 국방의 실패로 비난받습니다. 당시 조선의 정치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려 하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이순신은 바다에서 조선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반정과 굴욕 — 광해군·인조

광해군은 현실적인 외교를 추구하지만 결국 반정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후금과의 외교 문제로 인조는 치욕적인 굴욕을 겪으며 국가적 위기가 심화됩니다.

왕좌의 게임 — 효종·현종·숙종·경종

효종은 복수를 꿈꾸지만 북벌이 무산되며 결국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합니다.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이끌지만, 공포 정치 속에서 잔인한 권력 다툼이 이어집니다.

아버지와 아들 — 영조·사도세자·정조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 아들을 엄격하게 통제하지만 사도세자는 결국 아버지에게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정조는 아버지의 뒤주 사건을 되새기며 왕위를 계승하면서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으나 불운한 역사 속에서 비극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3막 세도정치의 나라 — 순조·헌종·철종

순조는 외적 세력이 강화되는 동안에도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헌종 시대에는 외척이 왕실 권력을 쥐게 됩니다. 순종 시대에는 힘없이 나라를 잃고 의병들의 저항이 이어집니다.

마지막 왕들 — 고종·순종과 조선의 멸망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지만 실질적인 힘은 없고, 일본의 강제적인 조약으로 외교권이 빼앗깁니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결국 다음 시대에 자신의 국가를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500년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 모든 왕의 희생이 무위로 돌아간 비참한 결말입니다.

왕좌는 대가를 치르는 자리였습니다

조선의 왕좌는 권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닌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자리였습니다. 각 왕들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희생으로 왕권을 유지했으며, 결국 조선의 멸망에 대한 경고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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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조선 500년 27명의 왕 이야기를 한편에 보여 드릴게요. 만약 조선 시대의 왕이 된다고 상상해 보세요. 공걸에서 가장 좋은 음식을 먹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한마디에 나라가 움직이는 자리에 앉는 거예요. 부러우시죠? 근데요. 조선 27명의 왕 중에 편이 잠든 사람이 며나 될까요?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7살에 목숨을 이룬 왕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직접 아들을 뒤주에 가두고 8일 동안 죽어가는 걸 지켜본 왕도 있었고요. 독에이가 다빠져서 평생 틀리를 끼고 산 마지막 황제도 있었습니다. 조선 왕조실록 왕이 볼 수 없게 사관이 몰래 적은 기록이거든요. 거기에 다 나와 있어요. 왕좌에 앉은 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1대 태조부터 27대 순종까지 지금부터 보여 드릴게요. >> 안녕하세요. 이상한 역사하게 오신 걸

0:46 환영합니다.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 잊지 마세요. 재밌는 동서양의 역사를 함께 찾아봐요. 계속 보면 더 신기한 것들이 나올 거예요. >> 첫 번째 왕 태조 이성계.이 이 사람은 왕이 되고 싶어서 왕이 된 사람이에요. 근데 막상 왕이 되고 나니까 자기 아들들이 서로 죽이기 시작한 거예요. 1398년 왕자의 난 궁궐에 피가 흘렀습니다. 이게 시작이었어요.이 피는 500년 동안 마르지 않았거든요.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아들을, 신하가 왕을. 27개의 왕자가 어떻게 피로 물들었는지 끝까지 보시면 됩니다. 1388년 고려의 장군 이성계는 요동을 칠하는 왕명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합니다. 암록강 한가운데 위화도라는 섬까지 갔어요. 수만 명의 병사가 강을 건너기 직전이었습니다. 근데이 남자 군대를 돌렸어요. 적이 아니라 자기 왕을

1:32 향해서요. 이걸 위화도 회군이라고 하는데요. 오늘날로 따지면요. 국방구장관이 전쟁 나가라는 대통령 명령을 거부하고 탱크를 서울 한복판으로 돌린 겁니다. 구대타예요. 나라를 통째로 뒤지은 거죠.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와 권력을 장악합니다. 고려의 왕을 자기 손으로 갈아치우면서요.이 남자가 4년 뒤인 1392년 새 나라를 세웁니다. 조선이에요.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고려가 떠바들던 불교 대신 유교를 국가의 근본 인형으로 확립하여 정도전이라는 천재적인 설계자가 나라의 뼈대를 짰습니다. 법과 제도 관료 시스템까지 전부요. 475년 동안 이어져온 고려 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이 성계는 태조가 됐습니다. 새 나라의 첫 번째 왕자에 앉은 거예요.이 왕자가 518년 동안 이어질 줄은 그때는 아무도

2:18 몰랐습니다. 근데 여기서 이상한게 하나 있거든요. 태조에게는 아들이 열어디 있었어요. 그중에서 가장 야망이 크고 능력도 출중하고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섯째 이방원이에요. 정도전과 함께 건국의 핵심 실무를 도맡았던 사람이죠. 누가 봐도 다음 왕은 이방원이어야 했어요. 그런데 태조는 놀라운 결정을 내려요. 세자를 이방원이 아니라 막내 아들 이방석으로 책봉한 겁니다. 두 번째 부인 신덕 왕후의 소생이었거든요. 태조가 가장 사랑한 여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고른 거예요. 가장 큰 공을 세운 아들이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택한 거죠.이 이 선택 하나가 조선 500년 비극의 첫 번째 씨앗이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왕조의 저주가 된 거예요.이 방어은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분노가 쌓이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가장 큰 공을

3:03 세웠는데 보상은 밀려난 거잖아요. 1398년 마침내 칼을 들었습니다. 한양 공걸 앞에서 피가 흘렀어요. 이복 동생 이방석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건국의 설계자였던 정도까지 제거해요. 아버지의 오른팔이자 조선의 청사진을 그린 사람을 아들이 직접 벤 거예요. 이게 1차 왕자의 난입니다. 아버지가 세운 나라에서 아버지가 고른 후계자를 아들이 직접 죽인 거예요. 왕자의 피가 튀었습니다. 태조는이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어요. 자기 아들들이 서로 죽이는 걸 지켜본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기록을 따라가 보면요.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2년 뒤인 1400년 또 피가 흘러요. 2차 왕자의 난이 터진 겁니다. 이번에는 넷째 형 이방강과 이방언이 충돌했어요. 형제끼리 군사를 동원해서 칼을 겨놓은 거예요.

3:49 이방원이 이겼습니다. 왕자의 난이 두 번이에요. 두 번 다 형제의 피를 흘린 거예요.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형제들이 같은 왕자를 놓고 서로 죽이고 죽은 겁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건국된지 겨우 6년 만에 왕실 안에서 피가 두 번 눌렀어요. 근데 이상한게 하나 더 있어요. 1차 왕자의 난이 끝난 뒤 왕자에 앉은 건 이방언이 아니었거든요. 모든 걸 주도한 사람은 이방원인데 정작 왕자에는 둘째 형 정종이 먼저 앉습니다. 조선의 두 번째 왕이에요. 근데 이분 왕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제위 2년 동안 실질적인 권력은 전부 이방원이지고 있었거든요. 이름만 왕이지 정사도 군사도 인사도 전부 동생이 결정했어요. 완벽한 허수합의 왕이었습니다. 본인도 그걸 알았어요. 결국 정종은 자진에서 왕위를 넘깁니다. 이방원에게요. 조선이라는

4:36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왕자에서 스스로 내려오는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던 거죠. 그래서 결국 뭐냐면요. 이방은 동생을 죽이고 형과 싸워 이기고 또 다른 형을 허수하비로 만든 다음에야 비로소 왕좌에 앉은 겁니다. 1400년 태종 이방원이 드디어 왕좌에 앉습니다. 조선의 세 번째 왕이에요.이 남자의 손에는 형제의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궁금하실 거예요. 이렇게까지 피를 흘려서 왕이 된 남자가 과연 어떤 왕이었을까요? 손에 형제의 피를 묻힌 남자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을까요? 폭군이었을까요? 아니면 명군이었을까요? 기록을 따라가 보면요. 태종은 무서울 정도로 유능한 왕이었어요. 먼저 귀족들이 각자 보유하고 있던 개인 군대를 전부 없앴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요. 재벌 총수들이 사설 군대를 갖고 있었는데

5:22 이걸 싹 다 해산시키고 전부 국군으로 편입시킨 거예요. 사병 혁파예요. 왕만이 군사력을 가질 수 있게 만든 거예요.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건데 여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대통령이 모든 부처를 직접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총리실을 거치지 않고 왕이 모든 걸 직접 결제하겠다는 뜻이죠. 왕권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겁니다. 누구도 왕의 권력에 도전할 수 없게 만들었어요. 태종의 18년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초 공사였습니다. 피를 흘리면서 시스템을 세운 거예요. 근데이 과정에서 태종이 치른 대가가 있습니다. 자기 가족이에요. 태종은 외척의 싹을 아예 뿌리째 잘라냈어요. 천남네 명을 죽였습니다.네 명이에요. 왕비의 오빠와 남동생들을 하나하나 제거한 거예요. 그것도 모자라서 장모와 처재까지 노비로 만들었습니다.

6:08 왕비 원경왕우의 집안을 통째로 무너뜨인 거예요. 왕비가 살아 있는데 왕비의 가족을 전부 제거한 겁니다. 외척이 권력을 잡는 걸 원천 봉쇄하려고요. 생각해 보세요. 왕이 되려고 형제를 죽였어요. 왕자를 지키려고 처가를 멸문시켰습니다. 같이 밥 먹고 같이 자한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한 거예요.이 남자에게 가족이란 뭐였을까요? 권력 앞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존재였던 거예요. 근데 무서운 건 태종이 이걸 후회했다는 기록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조선의 왕자가 요구하는 대가였습니다. 왕자를 지키려면 가족부터 죽여야 한다는 것. 이게 태종이 조선에 남긴 첫 번째 교훈이에요. 태종은 18년을 제위한 뒤 놀라운 결정을 내립니다. 스스로 왕자에서 내려온 거예요. 자기

6:53 발로요. 그것도 첫째 아들 양령대군이 아니라 둘째도 아니라 셋째 아들 충령대군에게 왕위를 넘깁니다. 양령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에요. 태정은 셋째 아들의 총명함을 알아본 겁니다.이 충령대군이 누구냐면요. 조선 역사상 아니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불리는 왕이에요. 세종입니다. 태종이 피로 닦은 길 위에 세종이라는 찬란한 빛이 놓인 거예요. 형제를 죽이고 처가를 멸문시킨 왕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을 만들어낸 셈이죠. 피의 대가가 빛의 시대를 연겁니다. 잔인한 아버지가 위대한 아들을 왕좌에 올린 거예요. 근데이 선택이 다음 왕들에게 어떤 재앙을 가져왔냐면요. 세종의 빛이 너무 찬란했기 때문에 그 빛이 꺼지는 순간 조선에서 가장 잔인한 비극이 시작됩니다. 삼촌이 어린

7:39 조카의 왕자를 빼앗고 그 조카를 직접 죽이는 비극이에요.이 비극의 주인공은 겨우 12살짜리 소년이었습니다. 1418년 21살에 충령 대군이 왕자에 앉습니다. 세종이에요. 아버지 태종이 형제를 죽이고 처가를 멸문시키면서까지 닦아 놓은 길 위에 올라선 거죠. 태종이 피로 기초공사를 끝냈기 때문에 세종은 칼을 들 필요가 없었어요. 대신 붓을 들었습니다. 학문과 과학과 문화로 나라를 송두리째 바꿔 놓은 거예요. 권력 투쟁 대신 국가 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이미 모든 위협을 제거해 놨기 때문이에요. 아이러니하게도 피해 대가로 얻어낸 평화였습니다. 세종이 뭘 했는지 기록을 따라가 보면요. 정말 놀라워요. 가장 먼저 지편전이라는 학술 기관을 설치합니다. 오늘날로 따지면요. 대통령 직속 국가

8:24 싱크 탱크를 만든 겁니다. 조선 최고의 두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연구에만 전념하게 했어요. 월급을 주면서요.이 지편전에서 나온 가장 위대한 결과물이 바로 훈민정음이에요. 1443년 세종이 직접 새로운 문자 28자를 창제합니다. 왜 만들었냐면요. 백성들이 글을 몰라서 자기 억울함을 말로도 글로도 표현하지 못하는게 안타까워서예요. 왕이 백성을 위해 직접 문자를 만든 거예요. 세계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이런 사례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문자는 자연스럽게 수천 년에 걸쳐 진호하거든요. 근데 한 사람이 체계적으로 설계해서 만들어 낸 문자예요. 우리가 지금 매일 쓰고 있는 한글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겁니다.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이 훈민정은 반포를 기념하는 국경일이에요. 근데 여기서 이상한게 하나 있거든요. 세종은 문자만 만든게

9:11 아니에요. 장영실이라는 사람을 등용합니다.이 사람의 신분이 뭐였냐면 노비였어요. 조선에서 가장 낮은 신분이죠. 근데 세종이라는 왕이 신분을 뛰어넘어 직접이 사람을 발탁한 겁니다. 장영실은 츠구기와 해시계 같은 과학 기구를 발령했어요. 비가 얼마나 왔는지 측정하는 도구를 세계 최초로 만든 거예요. 세종의 시대의 조선의 과학 기술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합니다. 군사적으로도 대단했어요. 북쪽으로 4군 육진을 개척해서 영토를 넓혔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북부 국경선의 틀이 이때 잡힌 거예요. 정치 시스템도 바꿨습니다. 총리실이 정치를 운영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서 왕이 모든 걸 혼자 결정하는 대신 신하들과 권한을 나눴어요. 아버지 태종이 혼자 모든 걸 틀어주었던 것과는 정 반대 방향이었습니다. 왕이

9:57 독재하지 않아도 나라가 돌아가는 구조를 만든 거예요. 세종의 제위 32년은 조선 500년 중 가장 찬란한 시대였어요. 한글을 만들고 과학 기술을 끌어올리고 영토를 넓히고 정치 시스템까지 혁신했습니다. 조선이 낳은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충분해요. 근데이 위대한 왕의 시대가 끝나자 조선에서 가장 어두운 비극이 시작돼요.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이거든요. 그리고이 그림자는 다른 곳이 아니라 세종 자신의 가문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1450년 세종이 세상을 떠나여 32년의 치세가 막을 내린 겁니다. 아들 문종이 왕저에 앉습니다.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20년 넘게 아버지 곁에서 정치를 배운 말 그대로 준비된 왕이었어요. 학문도 깊었고 군사에도 밝았고 신하들의 인망도 두터웠습니다.

10:43 세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황금기가 계속될 수 있었어요. 근데이 준비된 왕이 제위 겨우 2년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병으로요. 운명이 너무 잔인했어요. 세종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위태로워진 겁니다. 문종은 죽으면서 단 하나가 걱정이었습니다. 어린 세자예요. 나이가 겨우 12살이었거든요.이 아이가 혼자서 왕자를 지킬 수 있을까? 운점은 김종사와 황보인 같은 노련한 대신들에게 아들을 부탁합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원이었어요.이 부탁이 지켜졌을까요? 직접 판단하실 수 있을 거예요. 1452년 12살의 소년이 왕좌에 단종이에요. 조선의 여섯 번째 왕이죠. 근데이 왕은 이렇게 끝났어요. 만 16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삼촌 손네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따라가 보면 정말

11:28 잔인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단종에게는 강력한 삼촌이 있었어요. 수양대군입니다. 세종의 둘째 아들이죠.이 이 사람은 문물을 겸비했고 야망이 어마어마했어요. 어린 조카가 수렴 청정도 없이 왕좌에 앉아 있는 걸 지켜보면서 속으로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1453년 수양대군이 마침내 움직여요. 개유 정난이에요. 단종을 지키라고 문종이 직접 부탁했던 고명 대신 김종서를 찾아가 직접 죽입니다. 자기 손으로요. 황보인도 제거해요. 어린 왕을 보호하라고 아버지가 유황까지 남겨서 맡긴 사람들을 삼촌이 하나씩 없앤 거예요. 군종의 마지막 부탁이 피와 함께 산산 조각 났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455년 수양 대구는 조카 단종에게 양의를 강요합니다. 15살짜리 소년이

12:15 삼촌 앞에서 왕좌를 내놓은 거예요. 자기 의지였을까요? 아니에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자기를 지켜주던 사람들이 전부 죽었으니까요. 수양대군이 세조가 되어 조선의 일곱 번째 왕입니다. 조카의 왕자를 빼앗은 삼촌이 새 왕관을 쓴 거예요. 태종이 형제를 죽여서 왕이 됐다면 세존은 조카를 밀어내고 왕이 된 겁니다. 방법은 달라도 본질은 같았어요. 피해 대가 없이는 왕좌에 앉을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거든요. 세조에 맞서 단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성산문 박년 이계 하위지 유성원, 유흥부.이 여섯 명을 사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세종이 그토록 아끼던 지편전 출신의 학자들이에요. 세종이 직접 키운 인재들이 세종의

13:01 손자를 지키려고 목숨을 건 겁니다. 스승의 나라를 스승의 혈육에게 돌려주려 한 거죠. 하지만 계획이 사전에 발각됐습니다. 세조는 이들을 능지 처참해 처해요. 몸을 찢어서 죽이는 형벌이에요. 조선에서 가장 잔인한 처형 방식으로 충신들을 죽인 겁니다.이 사람들의 가족까지 연좌제로 처벌받았어요. 충성의 대가가 이렇게 참혹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면요.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돼서 강원도 영월로 유배됩니다. 왕에서 하루 아침에 죄인이 된 거예요. 그리고 1457년 만 16세의 나이에 사사됩니다. 삼촌이 보낸 사약을 받은 거예요. 영월의 외로운 유배지에서 아무도 지켜주는 사람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겁니다. 12살의 왕이 됐다가 17배 세상을 떠난 소년이에요. 가장

13:46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왕이 가장 빨리 왕자에서 쫓겨나고 가장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겁니다. 세종의 손자가 세종의 아들 손에 죽었어요. 같은 핏줄이에요. 태종 때도 형제끼리 죽였는데 이번에는 삼촌이 조카를 죽인 거예요. 조선의 왕좌는 피를 먹고 자랐어요. 왕자의 저주가 한 세대만에 그대로 반복된 겁니다. 이쯤 되면 세조라는 사람이 궁금하실 거예요. 조카를 죽이고 충신까지 찢어 죽인이 잔인한 남자가 과연 어떤 왕이었을까요? 기록을 따라가 보면요. 세조는 도덕적으로는 최악이었지만 왕으로서는 최강이었어요.이 모순이 세조라는 왕을 설명하는 전부입니다. 세조는 아버지 세종이 구상만 해 놓았던 경곡대전 편찬에 착수해요. 오늘날로 따지면요. 나라의 헌법을

14:32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이 경국 대전이 나중에 성종 때 최종 완성되면서 조선은 법치 국가의 틀을 갖추게 돼요. 이시의 난도 직접 진압했고 직정법을 시행해서 혼란스러웠던 토지 제도도 정비했습니다. 조카를 죽이고 충신을 찢어 죽인 사람이 나라의 기트를 세운 거예요. 이게 역사가 복잡한 이유입니다. 좋은 사람이 반드시 좋은 왕이 되는게 아니고 잔인한 사람이 꼭 나쁜 왕인 것도 아니거든요. 근데 세조의 말려는 비참했어요. 심한 피부병에 시달렸습니다. 온몸이 헐고 고름이 흘렀다는 기록이 있어요. 사람들은 수금걸했죠. 단종에 저주라고요. 조카를 죽인 뒤부터 몸이 썩어 들어갔다고요. 세조가 오양 온천까지 직접 행차해서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낫지 않았습니다. 권력은 가졌지만 몸은 무너져 가고

15:18 있었어요. 세조의 아들 예종도 왕위를 이어봤지만 겨우 15개월 만에 급소해요. 아버지의 업보를 아들이 고스란이 치른 거예요. 세종의 32년이 빛이었다면 단종과 세조의 시대는 짙은 그림자였습니다. 가장 위대한 왕의 시대가 끝나자 가장 잔인한 비극이 시작된 거예요. 할아버지가 세운 지편의 학자들이 손자를 지키려다 찍겨 죽었고 그 손자는 삼촌에게 왕자를 빼앗기고 17의 사약을 받았습니다. 이게 조선의 왕저가 가진 저주예요. 빛이 찬란할수록 그 뒤에 오는 어둠은 더 깊었습니다. 근데이 그림자가 거치자 조선에는 또 다른 폭풍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조선의 헌법이 완성되는 시대에 조선 역사상 가장 무서운 폭군이 등장하거든요. 그리고이 폭군의 비극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 성종이 심은 씨앗에서 시작됩니다. 어머니를

16:05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극이거든요. 세조가 남긴 건 강력한 왕권만이 아니었어요. 조선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경국 대전.이 이 거대한 작업을 시작한게 세조거든요. 조선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운영할지 법과 제도 전부를 하나의 법전으로 정리하겠다는 야심이었어요. 근데 세조 본인이 이걸 끝내지 못하고 죽어요. 피부병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난 겁니다. 미완성된 법정과 함께 무거운 짐을 다음 왕에게 넘긴 거예요. 8대 예종 세조의 아들이에요. 아버지가 남겨준 경국대전 편찬을 가속화하면서 왕으로서의 기반을 다지려 했어요. 남이 옥사를 처리하면서 자기 힘으로 나라를 이끌어 버리려 했던 거예요. 근데요. 제위 15개월 만에 급수합니다. 갑자기 죽은 거예요. 아버지의 업보를 아들이 치른 건지 아니면 왕좌 자체가 저주였던 건지

16:52 생각해 보세요. 세조가 조카를 죽이고 앉았던 그 자리에 아들이 앉았는데 겨우 1년 남짓만에 그 자리를 떠나야 했어요. 세조의 왕좌는 앉는 사람마다 불행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근데 여기서 이상한게 하나 있거든요. 예종이 갑자기 죽었으면 당연히 그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하잖아요. 근데 아니에요. 예종의 아들이 아니라 예종의 조카가 왕이 됩니다. 세조의 손자이긴 한데 예종의 아들이 아니라 예종의 형인 의경 세자의 둘째 아들이에요. 왕이 계승이 꼬인 거예요. 세조의 비정희 왕후가이 손자를 직접 지목해서 왕위에 올린 겁니다.이 사람이 바로 구대 성종이에요. 성종 제위 25년 조선 건국 이후 가장 안정된 시대를 연 왕이에요.이 이 왕때 드디어 조선이 진짜 나라다운 나라가 돼요. 할아버지

17:39 세조가 착수하고 아버지 세대를 거쳐 내려온 경국 대전을 1485년에 최종 반포합니다. 오늘날로 따지면요. 나라의 헌법이 완성된 거예요. 왕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신하들의 역할은 뭔지 세금은 어떻게 걷고 형벌은 어떻게 내리는지이 모든게 한 권의 법전에 담긴 겁니다. 건국한지 거의 100년 만에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영 체제가 비로소 완성된 거예요. 성종은 정치도 잘했어요. 흥구파와 살인파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았거든요. 살인파를 중앙 정치 무대로 끌어들이면서 훈구파의 독주를 견제한 거예요. 지금으로 치면 여당과 야당을 동시에 쓰면서 둘 다 견제한 셈이에요. 조선의 정치 시스템이 가장 정교하게 작동하던 시기였어요. 법전도 완성됐고

18:26 정치도 안정됐고 이대로만 가면 조선은 태평성대가 이어질 것 같았어요. 근데이 안정된 시대 한가운데에서 비극의 씨앗이 심어져요. 성종의 왕비 윤씨.이 이 사람이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남긴 사건이 벌어집니다. 왕의 얼굴에 상처를 낸 거예요. 그리고 하는 폐비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 놨어요. 그리고 결국 사약을 받습니다.이 패비 윤씨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거든요.이 아이는 어머니가 왜 궁에서 사라졌는지도 모른 채 자랐어요. 그 아이가 자라서 왕이 됩니다. 10대 연상군이에요.이 선택이 조선 전체를 뒤흔들 재앙이 될 줄은 성종도 몰랐을 거예요. 연상군.이 이 왕의 결말부터 말씀드리면요. 조선 최초로 신하들에 의해 왕자에서 끌려내려온 왕이에요. 근데 처음부터 폭구는 아니었어요. 즉이 초간에는 나름대로 신하들과

19:13 소통하며 정치를 했거든요. 아버지 성종이 만들어 놓은 안정된 나라를 물려받았으니까요. 근데 제위 4년째인 1498년 무호사와가 터져요. 김종직이라는 학자가 세조의 왕위 찬타를 비판하는 글을 남겼는데 이게 문제가 된 겁니다.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판해서 시신의 목을 매는 부관 참시까지 벌어졌어요. 살인파가 대거 숙청당합니다. 첫 번째 사화예요. 조선의 피바람이 부는 새로운 패턴이 시작된 거예요. 기록을 따라가 보면요. 진짜 폭발은 그다음이에요. 1504년 갑자사와 연상군이 자기 어머니의 진실을 알게 된 겁니다. 어머니 윤 씨가 폐비되고 사약을 받았다는 사실. 아버지 성종의 후궁들이 어머니를 모함하고 몰아냈다는 사실.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하나하나 알게 된 거예요. 그 순간 연상군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머니를

19:59 죽이는데 관여한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서 죽였어요. 이미 죽은 사람은 무덤을 파서 부관 참시했고 살아 있는 사람은 눈지처 참매처했습니다. 성종의 후궁 두 명을 직접 군궐에서 때려 죽였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어요. 어머니의 위패를 보원하고 군궐을 유흥의 공간으로 바꿔 버렸어요. 성균관을 놀이터로 만들고 백성들의 집을 빼앗사냥토로 만들었어요. 신하들이 간을 하면 혀를 잘랐거든요. 말 그대로 공포 정치였어요. 이게 뭐냐면요. 아들의 복수국이었던 거예요. 어머니를 잃은 아이가 왕자에 앉아서 그 분노를 온 나라에 쏟아본부 겁니다. 12년 동안 어머니가 없는 줄도 모르고 자한 아이가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왕이 괴물이 된 거예요. 근데이 복수는 어머니를 되살리지 못했어요. 대신 나라 전체를 피로 물들였을 뿐이에요. 조선의 헌법을

20:44 완성한 성종의 시대가 나은 건 법치의 나라가 아니라 그 법을 짓밟는 아들이었던 거예요. 제위 12년째인 1506년 중종 반정이 일어나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신하들이 밤중에 들고 일어나서 연상군을 왕자에서 끌어내린 겁니다. 쿠데타예요. 조선 역사상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 두 명 있는데 연상군이 그 첫 번째예요. 왕에서 쫓겨났으니까 묘도 받지 못했어요. 다른 왕들처럼 종이나 조가 아니라 그냥 군으로 강등된 거예요.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겁니다. 연상군은 폐위된 그해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죽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청종이 왕비를 패하고 사약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연상군의 비극은 없었을 수도 있어요. 아버지의 결정 하나가 아들의 인생 전체를 바꿔 버린 거예요. 법전을 완성한 시대가 폭군을 낳았어요.

21:30 아버지의 결정이 아들을 괴물로 만들었고 그 괴물이 조선을 부었어요. 근데이 폭군을 끌어내린 사람들 반전 공신들이 다음 왕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시면요. 이게 더 잔인합니다. 연상군을 끌어내린 반정 공신들.이 이 사람들이 새 왕을 세워요. 연상군의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 이게 11대 중종이에요. 근데 중종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비극이에요.이 왕이 어떻게 끝났냐면요. 38년을 왕자에 앉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자기 뜻대로 나라를 운영하지 못했어요. 왜 그런지 따라가 보면요. 중종은 왕이 되자마자 첫 번째 대가를 치릅니다. 자기 부인을 버려야 했어요. 중종의 왕비였던 단경왕호.이 이 사람의 아버지가 연상군 시절 높은 벼을 했거든요. 반전 공신들 입장에서는 눈의 까이었던 거예요. 연상군의 잔재를 완전히 제거하고 싶었던

22:16 겁니다. 공신들이 요구했어요. 왕비를 패하라고. 중종은 왕이 된지 7일 만에 자기 아내를 궁에서 내보내야 했어요. 사랑했든 안 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반정으로 왕이 된 사람이 공신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겠어요. 자기 힘으로 왕이 된게 아니니까요.이 순간부터 중종의 38년은 정해진 거예요. 공신들에게 끌려다니는 왕. 그래도 중종이 한 번은 해 보려고 했어요. 조광조라는 살인 파악자를 발탁한 거예요.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상을 현실 정치에 구현하려 했어요. 오늘날로 따지면요. 기득권 세력을 밀어내고 원칙대로 나라를 운영하자는 개협하였던 거예요. 중종은이 사람을 통해서 공신들의 힘을 꺾어 보려 했어요. 근데 1519년 김묘사가 터집니다. 흥구파 공신들이 조광조를 영모로 몰아서 제거한 거예요. 무호사화. 갑자 사에이어서

23:03 세 번째 사화예요. 조선에서 뜻을 펴보려는 학자들이 또 몰살당한 겁니다. 근데 여기서 정말 안타까운 건 중종의 선택이에요. 조광조를 살릴 수 있었거든요. 왕이잖아요. 최종 결정권은 왕에게 있었어요. 근데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어요. 자기가 직접 발탁해 놓고 자기 손으로 죽인 거예요. 개혁을 해보겠다고 사람을 불러놓고 정작 위기가 닥치니까 그 사람을 버린 겁니다. 공신들의 압박 앞에서 왕은 무력했어요. 왕저에 앉아 있지만 왕이 아니었던 사람 그게 중종이에요. 여기서 이상한게 있거든요. 사화가 왜 이렇게 반복될까요? 무호사와, 갑자사와, 김묘사와. 태종이나 세조 때는 왕이 직접 칼을 들었잖아요. 왕이 피를 흘렸어요. 근데이 시기부터는 완전히 달라져요. 왕이 아니라 신하들끼리

23:48 서로 죽이는 시대가 된 거예요. 왕은 그걸 막을 힘이 없었고요. 권력의 무게 중심이 왕에서 신하로 넘어간 겁니다. 중종이 죽고 12대 인종이 직위해요. 근데 인종은 조선 역대 최단기 제위예요. 8개월 왕관을 쓰자마자 벗어야 했어요. 인종에게는 개모 문정왕우가 있었거든요. 문정왕우는 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데 자기가 낳은 아들 경원대군을 왕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궁 안에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문정 왕호와 인종 사이에 갈등. 그리고 인종이 급수합니다. 8개월 만이에요. 조선에서 가장 짧은 시간 동안 왕자에 앉았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문정왕후가 원하던 대로 경원대군이 왕이 돼요. 13대 명종이에요. 근데 명종은 즉위할 때 겨우 12살이었어요. 12살짜리가 나라를 다스릴 수

24:34 있겠어요? 어린왕 대신 문정왕우가 수렴 청정을 시작합니다. 어린왕 뒤에 앉아서 대신 정치를 하는 거예요. 아들을 왕우로 만들겠다는 문정왕우의 집념이 결국 이루어진 겁니다. 문정왕우가 권력을 잡자마자 을사 사화가 터져요. 1545년이에요.네 번째 사화. 인종을 지지했던 대윤 세력이 몰살당해요. 반대파을 완전히 제거한 겁니다. 그리고 문정왕우의 동생 윤원영이 권력의 핵심에 앉아요.이 사람이 나라를 쥐고 흔든 거예요. 왕은 있는데 왕이 아닌 시대. 조선을 실제로 움직인 건 명종이 아니라 문정왕우와 윤원형이었어요. 기록을 따라가 보면요.이 시기에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무너졌는지가 보여요. 임정의 난이 이때 일어나거든요. 임정을 단순한 도적으로 아는 분들이 많은데요. 사실은 백성이 들고 일어난

25:20 거예요. 위에서 왕이 왕노릇을 못 하니까 아래에서 백성이 먹고 살 길이 막힌 거예요. 세금은 제멋대로 걷고 관리들은 부패하고 그러니까 백성들이 살기 위해서 봉기한 거예요. 명정은 제위 22년이에요. 숫자만 보면 긴 제위 기간이에요. 근데 문정왕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허수합이었어요. 어머니가 모든 걸 결정했거든요. 문정왕우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명종이 직접 정치를 해 보려 했지만 이미 나라의 기강은 무너진 뒤였어요. 관리들은 부패하고 백성은 굶주이고 22년 중 진짜 왕으로 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이쯤 되면 보이실 거예요. 조선 전반기 100년은 왕이 직접 피를 흘리며 왕자를 지킨 시대였어요. 태조가 세웠고 태종이 피로 다졌고 세조가 조카를 밟고 올라섰잖아요. 근데 중종부터 명종까지 약 60년은요.

26:08 왕이 왕자에 앉아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로 바뀐 거예요. 공신이 왕을 조정하고 왕비가 나라를 움직이고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시대. 왕이 되어도 왕노릇을 못하는 시대였어요.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거든요. 다음 왕 선조 때 200년 동안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일이 터집니다. 밖에서 적이 쳐들어온 거예요. 14대 왕 선조.이 이 사람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욕을 먹는 왕 중 하나예요. 근데 이상한게 하나 있거든요. 선조는 41년 동안 왕자에 앉아 있었어요. 조선 역대 제 기간 3위거든요. 이렇게 오래 왕자를 지킨 사람한테 남은 건 왜 욕밖에 없을까요? 그 이유를 알려면이 시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봐야 해요. 선조가 왕이 되면서 조선 정치판에 큰 변화가 생겼어요. 사림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예요. 사림이

26:53 뭐냐면요. 이전 파트에서 사화 때마다 숙청당했던 그 세력이에요. 중종 때 조강조가 죽고 명종 때 을사 사화로 또 밀려났잖아요. 근데이 사림이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결국 정치에 중심에 섰거든요. 문제는이 살림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어요. 오늘날로 따지면요. 여당과 야당 같은 정당이 생긴 거예요. 이걸 붕당이에요. 근데 지금의 여야처럼 선거로 교대하는게 아니에요. 한쪽이 이기면 다른 쪽이 죽거나 귀향 가는 정치가 시작된 거예요. 조선의 정치가 점점 병렬해지고 있었습니다. 조정이 둘로 갈라져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던 거예요. 선조는이 붕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왕권을 유지하고 있었어요. 근데이 붕당 싸움이 한 순간에 의미가 없어지는 일이 터져요. 1592년 4월 부산포 앞바다에 검은

27:41 점들이 나타났어요. 하나가 아니었어요. 수백척의 일본 전선이었습니다. 약 16만 명의 병력이 부산포에 쏟아져 내렸어요. 임진 외란이 시작된 거예요. 조선 건국 이후 200년 만에 터진 전면전이었습니다. 동인인이 서인이 싸우고 있을 때 바다 건너에서 칼을 갈고 있었던 겁니다. 근데 여기서 이상한게 있거든요. 조선은 건국일에 200년 동안 큰 전쟁이 한 번도 없었어요. 태평 성대가 너무 오래 이어진 거예요. 평화가 축복이었을까요? 아니에요. 그 200년이 오히려 독이 됐어요. 칼을 한 번도 뽑아 본 적 없는 군인들이 성벽을 지키고 있었고 그 성벽마저 무너진 채 방치도 있었거든요. 전쟁이라는게 뭔지 아는 사람이 조정에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벌어진 일이 뭐냐면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약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시킨 거예요.

28:27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작 20일이에요. 200년 동안 싸운 평화가 20일 만에 무너진 겁니다. 성문이 뚫리고 관군이 흩어지고 관하가 불탔어요. 전쟁을 겪어 본 적 없는 나라가 전쟁을 만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선조는요. 도망갔어요. 한양을 버리고 개성으로 달렸어요. 개성에서도 안심이 안 되니까 평양으로 갔고 평양에서도 버티지 못하고 의주까지 올라갔어요. 의주가 어디냐면요. 중국 국경 바로 앞이에요. 한 발장만 더 가면 명나라 땅인 거예요. 왕이 백성을 두고 도망간 겁니다. 그것도 나라의 가장 끝까지. 심지어 명나라로 망명하는 것까지 고려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나라의 왕이 나라를 떠나려고 했던 겁니다. 기록을 따라가 보면요. 선조가 한양을 떠나던 그날 밤에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29:13 있어요. 경복공이 불타 올랐습니다. 왕이 버린 백성들이 왕의 군거를 태운 거예요. 그 불길이 얼마나 컸는지 상상해 보세요. 분노가 그 정도였다는 거예요. 왕이 나를 버렸으니 나도 왕의 집을 태운다. 200년 동안 쌓아올린 군궐이 하룻밤만에 제더미가 됐어요. 이쯤 되면 조선은 끝났다고 생각하시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육지는 무너졌어요. 왕은 국경 끝까지 도망갔고 수도는 함락됐고 백성은 버려졌어요. 나라가 사라지기 직전이에요. 근데요. 바다에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거든요. 한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이순신. 이순신은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했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일본군은 바다를 통해 무기와 식량을 보급받아야 했거든요. 이순신이 그 바닷길을 완전히 끊어 버린 겁니다.

30:00 전쟁이라는 건 결국 보급이에요. 육지에서 아무리 이겨도 총알이 안 오고 밥이 안 오면 군대는 못 싸워요. 이순신이 바다를 장악한 덕분에 일본군의 진격이 멈추기 시작한 거예요. 육지에서는 나라가 무너지고 있었는데 바다에서는 한 사람이 나라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백성들이 스스로 일어났어요. 의병이 곳곳에서 봉기한 거예요. 나라가 못 지켜주니까 농민이 직접 낮과 칼을 들고 일어선 거예요. 스님들이 승병을 조직했고 선비들도 붓 대신 창을 잡았습니다. 광군이 무너진 자리를 백성이 메운 거예요. 왕은 도망갔지만 백성은 싸웠다는 거. 이게이 전쟁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장면이에요. 명나라도 원군을 보내왔고요. 임진느라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데 일본의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확대됐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어요. 전쟁이 잠시 소강

30:45 상태에 들어간 뒤 1597년에 일본이 다시 쳐들어왔거든요. 정유 재란이에요. 근데 이때 조선 수구는 거의 괴멸된 상태였어요. 왜냐면 선조가 이순신을 의심해서 3도수군 통제사 자리에서 파직시키고 감옥에까지 가둬 버렸거든요. 바다를 지킬 유일한 사람을 제손으로 가둔 거예요. 이순신이 빠진 자리에 원균이 통제사가 됐는데 7천양 회전에서 대참회를 당했어요. 조선 수고는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복귀했을 때 남은 전선이 몇 척이었는지 아세요? 13척이에요. 그 많던 조선수군이 고작 13척으로 쪼그라든 거예요. 병사도 100명 남짓이었다고 해요.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이건 불가능해 보이잖아요. 이때 이순신이 올린 장가 있어요.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어옵니다.이 한 줄이 아마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일

31:32 거예요. 13척이었는데 12척이라고 쓴 건 장계를 올리는 시점에 쓸 수 있는 배가 12척이었다는 뜻이에요.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직이라는 단어를 쓴 거예요.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아직 남아 있다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리고 명량 회전이 벌어집니다. 울돌목이라는 좁은 해협이었어요. 판옥선 13척으로 일본 전선 133척과 맞었어요. 숫자만 보면 말이 안 들잖아요. 근데 결과요. 적선 31척을 격파했어요. 조선 수구는 전선 피해가 단 한 척도 없었습니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기적이었어요.이 전투 하나가 정유재란의 흐름 자체를 바꿔 버렸습니다. 그래서 7년에 걸친 긴 전쟁이 마지막 공면으로 접어들어요. 1598년 노량 회전. 태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마지막 해전이었어요.이 전쟁을 끝내는 전투였습니다. 이순신이 직접 선두에서

32:19 북을 치며 전투를 이끌고 있었어요. 그리고 적의 총탄에 맞았어요.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있어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왜요?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자기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퍼지면 군사들의 사기가 꺾이니까요. 죽는 순간에도 자기 목숨이 아니라 전투의 결과를 걱정한 거예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나라를 생각한 사람이에요. 이순 씨는 그렇게 전사했어요. 나라를 구한 장수가 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세상을 떠난 거예요. 7년 전쟁도 끝났습니다. 근데 전쟁이 끝난 뒤가 더 씁쓸했어요. 전쟁 중에 하나로 뭉쳤던 조정이 다시 갈라진 거예요. 농공 행상이 완전히 엉망이 됐거든요. 누가 진짜 공을 세웠느냐를 따지는 과정에서 동인과 서인의 정치 싸움이 다시 불붙은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도망간 왕은 여전히 왕자에 앉아

33:04 있었고 목숨을 걸고 싸운 장수들과 의병들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어요. 이순신은 전사했는데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공을 나눠 가지려고 다투고 있었던 겁니다. 전쟁의 상처는 숫자로 보면 바로 보여요. 전후 조선의 인구가 약 30% 감소한 것으로 추정돼요. 전국 농경지의 2가 황폐화됐고요. 곰걸리 불타고 문화재가 약탈됐고 도자기 장인들은 일본으로 끌려갔어요. 7년이라는 시간이 조선이 200년에 걸쳐 쌓아올린 것들을 송두리째 풀어뜨린 거예요.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는 스피어가 희곡을 쓰고 있었어요. 한쪽에서는 문학의 황금기가 열리고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나라 전체가 불타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이 전쟁은 일본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어요.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지고 도크가와 에도막부가 세워졌거든요. 동아시아 새 나라의

33:51 운명을 전부 뒤바꿔 놓은 전쟁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 뭐냐면요. 선조는 4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자에 앉아 있었지만 역사가이 사람에게 남긴 건 도망간 왕이라는 딱네 글자예요. 반면에 이수희신은 왕도 아니었고 한때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지만 지금 서울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 동상이서 있잖아요. 1968년에 세워진 그 동상이요. 왕자에 앉은 사람과 바다 위에 선 사람. 50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더 기억되고 있는지 이미 아시잖아요. 왕자가 권력의 전부는 아니었던 거예요. 근데요. 7년 전쟁이 남긴 상처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요.이 전쟁의 후유증이 다음 왕들에게 어떤 재앙을 가져왔냐면요. 15대왕, 광해군.이 이 사람의 이야기는 좀 다릅니다. 결말부터 말씀드릴게요.이

34:38 왕은 쫓겨났어요. 조선에서 가장 현실적인 판단을 한 왕이었는데 바로 그 판단 때문에 왕자에서 내려온 거예요. 옳은 선택을 했는데 쫓겨난 겁니다. 광해군은 임진느란 한복판에서 세자로 책봉된 사람이에요. 선조가 의주로 도망가는 동안 광해군은 직접 각지를 돌며 의병을 모았거든요. 아버지가 나라를 버렸을 때 아들이 나라를 지키고 있었던 거예요. 전쟁터를 직접 발록 뛴 왕자였습니다. 그래서이 사람은 전쟁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어요. 전쟁이 뭘 아사아가는지 백성이 얼마나 고통 갔는지를 왕위에 오른 뒤 광해군이 한 일을 보세요. 먼저 대동법을 경기도에 시행했어요. 대동법이 뭐냐면요. 그 전까지는 가난한 농민이든 부유한 양반이든 특산물로 똑같이 세금을

35:23 냈거든요. 근데 중간에서 관리들이 착복하고 없는 특산물을 구하려고 농민이 빚을지는 구조였어요. 광해군이 이걸 쌀로 통일하고 가진 토지 면적에 따라 세금을 먹기도록 바꾼 겁니다. 오늘날로 따지면요. 소득의 비례해서 세금을내는 시스템을 처음 도입한 거예요.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의 부담을 줄이려는 개혁이었습니다. 동의보감도이 시기에 완성됐어요. 허준이 1610년에 편찬을 마친 의학인데 왜이 시점이었냐면요. 7년 전쟁으로 백성들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있었거든요. 의원도 부족하고 약재도 모자한 상황에서 누구든 질병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한글로 된 의학서를 만든 거예요. 전쟁의 상처를 아는 왕이 실용적인 책을 만들게 한 겁니다. 근데 광해군의 진짜 뛰어난

36:08 점은 외교에 있었어요.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냐면요. 임진외란 때 조선을 도와줬던 명나라가 세퇴하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후금이라는 신흥 세력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거든요. 조선 입장에서는 딜레마예요. 영나라한테는 전쟁 때 도움을 받은 은혜가 있잖아요. 근데 후금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고요. 여기서 광해군이 선택한 건 중립 외교였어요. 명나라 편을 들 후금을 자극하지 않는 줄타기를 한 거예요. 명나라가 후금을 치러 가면서 조선의 원군을 요청했을 때 광해군은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전투에서 적당히 항복하라는 밀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요. 겉으로는 명나라 편이었지만 속으로는 후금과의 충돌를 피한 거예요. 지금 와서 보면 이게 가장 현실적인 판단이었거든요.

36:54 근데 여기서 이상한게 하나 있거든요. 이렇게 합리적인 왕이 왜 쫓겨났을까요?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났습니다. 한밤 중에 반정군이 군궐를 장악했어요. 광해군은 폐위됐습니다. 반정 세력이 내세온 핵심 명군이 뭐였냐면요.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져버렸다는 거였어요. 현실적인 외교를 했다는게 오히려 죄목이 된 거예요. 조선에서 반정으로 쫓겨난 왕은 딱 두 명뿐이에요. 연상군 그리고 광해군. 연상군은 폭군이었으니까 쫓겨난게 당연하잖아요. 근데 광해군은요. 전쟁을 직접 겪고 나라를 재건하려 했던 왕이었거든요. 그래서 수백년이 지난 지금 역사가이 사람을 다시 평가하기 시작한 거예요. 폭군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현실주의자였다고. 자, 그러면이 현실주의자를 쫓아내고 왕자에 앉은

37:40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요? 여기서부터 조선이 치른 대가가 시작돼요. 16대 왕 인조.이 이 사람이야말로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장면의 주인공이에요. 인조는 반정으로 왕이 됐잖아요. 그러니까 반정의 명분대로 해야 했어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고 했으니까요.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뒤엎고 명나라 편에 확실하게 선 거예요. 후금을 적으로 돌린 겁니다.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냐면요. 1624년에 먼저 이의 난이 터졌어요. 반정 공신이었던이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거예요. 안정으로 왕이 됐는데 그 반정 세력한테 또 위협받은 겁니다. 이건 간신이 진압했어요. 근데 진짜 재앙은 바깥에서 왔어요. 1627년 후금이 쳐들어왔습니다.

38:26 정묘 호란이에요. 광해군이 줄타기로 막고 있던 전쟁이 결국 터진 거예요. 이건 어찌어찌 형제 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넘겼어요. 근데 끝이 아니었어요. 1636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청태종 홍타이지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합니다. 병자 호란이에요. 이번엔 군신 관계를 요구한 거예요. 형제가 아니라 주인과 신하가 되라는 겁니다. 인조는 남한 산성으로 피했어요. 한 겨울이었거든요. 산성 안에는 식량도 부족하고 뗄감도 모자았어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47위를 버텼습니다. 성 밖에는 청나라 대군이 둘러싸고 있었고 구원군은 오지 않았어요. 성 안에서는 조선의 운명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어요. 최명길은 항복을 주장했어요. 백성이 죽어가는데 체면이

39:12 무슨 소용이냐? 김상원은 끝까지 싸우자고 했어요. 나라의 명예를 져버릴 수 없다. 기록을 따라가 보면요. 최명길이 항공 문서를 쓰면 김상원이 그걸 찢었다고 해요. 둘 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같았는데 방법이 달랐던 거예요. 근데 결국 현실이 이겼습니다. 1637년 음력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 서문을 나왔어요. 용포를 벗고 남색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왕이 입는 옷이 아니에요. 죄인의 옷이었거든요. 왕이 스스로 죄인이 돼서 삼전도로 걸어간 겁니다. 청태종 홍타이즈 앞에서 3배 구고두레를 행했어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찢는 의식이에요. 왕이 이마를 땅에 부딪친 거예요. 한 번이 아니에요. 아홉 번이에요.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 앞에서

39:58 청나라 군사들이 지켜보고 있었어요. 조선의 왕이 이마를 찢는 모습을. 그리고 그 대가로 소연세자와 복림대군이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갔어요. 왕의 두 아들이에요. 왕이 무릎을 꿇고 이마를 찌었는데도 부족했던 거예요. 자기 아들들까지 볼모로 내조해 보여 있습니다. 왕자를 지키기 위해 자식을 적국에 보낸 거예요. 이쯤 되면 궁금하실 거예요. 만약 광해군의 중립 외교가 계속됐더라면 병자 훈란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정답은 아무도 몰라요. 청의 팽창이 워낙 거으니까요. 전쟁이 완전히 안 일어났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습니다. 현실적인 왕은 쫓겨났고 명분을 내세운 왕은 이마를 찌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뭐냐면요. 광해군은 현실을 선택해서 왕자를

40:44 잃었고 인조는 명분을 선택해서 나라의 자존심과 왕의 체면을 전부 잃었어요. 왕좌에 앉은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수천만 백성의 운명이 통째로 바뀐 거예요. 두 왕의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갈릴 수 있다는 거. 이게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무서운 교훈이에요. 근데이 치욕이 끝이 아니거든요. 임진느란에 이어 병자오란까지 조선은 불과 40년 사이에 두 번의 대규모 전쟁을 겪은 거예요. 인질로 끌려간 두 왕자 중에 복림대군이 나중에 왕이 돼요.이 사람이 삼전도에서 품은 치욕과 분노를 어디로 쏟았냐면요. 삼전도에서이 말을 땅에 찌은 왕 인조.이 치옥이 끝이 아니었어요. 다음 왕에게 무엇을 남겼냐면요. 효종. 복림대군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실 수도 있어요.이

41:29 사람은 형 소연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인질로 끌려간 왕자예요. 청나라 심양에서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이 말을 땅에 찢는 아버지를 눈앞에서 받고 적국에 끌려가서 볼모로 살았던 사람이에요. 형 소연 세자가 먼저 돌아왔는데 돌아온지 두 달 만에 의문사했어요. 그래서 복림대군이 왕이 된 겁니다. 효종은 왕이 되자마자 하나만 생각했어요. 북벌. 청나라에 복수하겠다는 거예요. 삼전도에서 아버지가 당한 치욕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니까요. 이건 국가 정책이 아니라 개인의 한이었습니다. 군대를 강화하고 송시열 같은 신하들과 함께 북벌을 논의했어요. 근데 생각해 보세요. 병자고란에서 47일 만에 무릎을 꿇은 나라가 그 청나라를 치겠다는 거예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청나라는 중앙까지 삼킨 대제국이 돼 있었고 조선은 전쟁의 상처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42:15 상태였거든요. 효정은 북벌의 칼을 한 번도 뽑지 못한 채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삼전도의 치욕을 갖겠다고 일을 갈았지만 왕자 위에서 하늘 품은 채 눈을 감은 거예요. 근데 여기서 이상한게 하나 있거든요. 효종이 죽고 나서 조선이 갈라진 이유가 전쟁도 아니고 반란도 아니에요. 상복이에요. 현종 효종의 아들이에요. 제위 15년이 왕의 시대를 지배한 사건이 예송쟁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요. 국회의원들이 장례식장에서 상복을 몇 년 입느냐를 놓고 나라가 둘로 쪼개진 거예요. 효종이 죽었을 때 자이 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느냐?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니까 1년만 입으면 된다고 했고 남는 왕이니까 3년을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기해 예송에 이어 갑인 예송까지 둘 차례나 나라가

43:02 뒤집어졌습니다. 상복 기간 뒤에 숨어 있는 진짜 문제가 뭐냐면요. 효종이 정통성 있는 왕이냐 아니냐는 거예요. 둘째 아들이라서 왕통이 약하다고 보는 순간 효종 이후에 왕 전체의 정통성이 흔들리거든요. 현종 자신의 왕자도 포함해서요. 상복 한 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왕자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싸움이었던 겁니다. 현종은 15년 내내이 논쟁의 한가운데서 서인과 남민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서인과 남인이 싸움이 끝나지 않은 채로 다음 왕에게 넘어갔어요. 그리고 다음 왕은이 싸움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끝냈습니다. 숙종. 조선에서 영조 다음으로 올해 왕자에 앉은 왕이에요. 46년. 근데이 왕이 왕자를 지킨 방법이 무서웠습니다. 환국이라는 걸 했거든요. 환국이 뭐냐면요. 집권 세력을 하루 아침에 통째로 갈아치우는

43:48 거예요. 오늘날로 따지면 여당을 하루 아침에 야당으로 만들고 야당을 여당으로 바꾸는 건데 단순히 자리만 바꾸는게 아니라 밀려나는 쪽은 귀양 가거나 죽는 거예요. 이걸 세 번 했습니다. 경신 황국에서 남민을 몰아내고 서인을 올렸어요. 기사 황국에서는 서인을 몰아내고 남민을 다시 올렸습니다. 갑술 한국에서 또 남인을 밀어내고 서인을 복귀시켰어요. 한번 황국이 일어나면 수십명이 목숨을 잃거나 귀향을 갔습니다. 신하들 입장에서 보면요. 어제까지 내 편이었던 왕이 오늘 나를 죽이는 거예요. 누구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숙종은 왕자를 지키려고 신하들을 체스말처럼 갈아치운 왕이었어요. 강력한 왕권이었냐고요? 맞아요. 근데 그 강력함이 만들어 낸 건 충성이 아니라 공포였습니다.이 환국의 한가운데에 두 여자가 있었습니다.

44:34 인연 왕후와 장희빈.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보셨을 거예요. 근데 실제 역사는 드라마보다 더 잔인했어요. 기사 왕국 때 숙종은 인연항우를 폐비하고 장빈을 왕비로 올렸어요. 남민이 올라가니까 장빈이 올라간 거예요. 갑술한국대는 정 반대였습니다. 장이빈을 다시 끌어내리고 인연항우를 보기시켰어요. 그리고 인연우가 세상을 떠나자 장이빈에게 사약을 내렸습니다. 정치판이 뒤집힐 때마다 왕비가 바뀐 거예요. 왕비의 자리마저 한국의 도구였던 겁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면요. 숙정은 왕자를 지켰어요. 46년 동안 강력한 왕권을 유지했습니다. 아무도 숙종을 위협하지 못했어요. 근데이 왕이 남긴 대가가 고스란이 다음 왕한테 넘어갔습니다. 경종, 장입인의 아들이에요. 어머니가 사약을 받고 죽는 걸 지켜본 아이가

45:20 왕이 된 거예요.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사약을 내리는 거예요. 그걸 지켜보는 아이가 나중에 그 아버지의 왕자를 물려받는 겁니다. 직유했을 때 이미 건강이 크게 나빠져 있었어요. 노로는 경종의 이복 동생 연인군을 세제로 밀어올렸고 소로는 경종을 지켰습니다. 왕좌에 앉아 있지만 바로 옆에서 다음 왕을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앉아 있는 왕보다 기다리는 세제를 향한 눈이 더 많았습니다. 노론과 소론의 줄다리기 속에서 경종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제위 4년 경종은 그렇게 왕자에서 내려왔습니다. 근데이 다음이에요. 경종의 뒤를 이은 왕 바로 그 연인군이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래 왕자에 앉은 사람이 됩니다. 52년 83세까지 살았어요. 조선 최장수 왕.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

46:06 근데이 왕이 저지른 일은 조선 500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처참한 장면이었습니다. 영조.이 이 왕의 숫자부터 보겠습니다. 조선 최장 제위 52년 83세까지 살았으니 조선에서 가장 오래 산 왕이기도 해요. 탕평책을 시행했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요. 여당과 야당을 골고로 등용하는 인사 정책이에요. 숙정때처럼 한쪽만 밀고 한쪽을 죽이는 환곡 정치를 끝내겠다는 거였죠. 균역법도 시행해서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줄였어요. 업정만 놓고 보면 성분입니다. 52년 동안 왕자를 지키면서 조선을 안정시킨 왕이에요. 근데이 왕에게는 아무리 많은 업적을 쌓아도 지울 수 없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아들을 직접 죽인 아버지예요. 영조와 사도세자.이 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영조가 어떤

46:52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야 해요. 영조는 숙빈 최씨의 아들이에요. 왕비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에서 이건 치명적인 약점이었어요. 군궐에서 서출이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녔거든요. 그래서 영조는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경종이 제위 4년 만에 갑자기 죽고 영조가 왕이 됐는데 노론이 경종을 독살하고 영조를 올렸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어요. 이인의 난 같은 반란까지 일어났습니다. 왕좌에 앉았지만 그 왕좌가 정당한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영조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습니다. 학문에 매달렸고 예법을 철저히 지켰어요. 서출이라는 약점을 실력으로 메우려 했던 거예요. 이런 아버지한테 아들이 생겼어요. 사도세자. 영조는이 아들에게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47:37 자기가 못 가진 것, 완벽한 정통성을이 아이는 가지고 있었거든요.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자신의 약점을 보상해 줄 존재였어요. 그래서 완벽한 세자가 되기를 요구했습니다. 학문도 예법도 빈틈 없이 두 살 때부터 글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어요. 근데 사도 세자는 그런 틀에 맞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활 쏘는 걸 좋아했고 무예의 재능이 있었어요. 그림도 즐겼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모범적인 유학자 세자상과는 거리가 멀었죠. 영조가 바란 건 작은 영조였는데 사도세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거예요. 기록을 따라가 보면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점점 벌어져요. 영조가 세자를 불러 그를 외워 보라고 시킵니다. 세자는 아버지 앞에 서면 두려움에 말을 제대로 못 했어요. 영조는 그런 아들이 답답했고 더 나물았습니다. 나물할수록 세자는 더

48:23 움추어들었어요.이 악순환이 수십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아버지의 기대가 아들을 짓눌렀고 짓눌린 아들은 점점 망가져 갔어요. 사도 세자의 정신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옷을 입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났어요. 한 벌의 옷을 입기 위해 수십벌을 태워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행이 점점 심해졌고 군궐 안에서 사건들이 벌어졌어요. 이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압박이 아들의 정신을 무너뜨린 거예요. 여기에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까지 겹쳤습니다. 세자를 지키려는 세력과 세자를 밀어내려는 세력이 부딪히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은 정치적 갈등까지 흡수해 버렸어요. 한 가정의 비극이 나라 전체의 비극으로 확대된 겁니다. 1762년 윤 5월 영조 제위 38년째 되는

49:09 해였습니다. 그 해름 공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요. 영조가 사도세자를 불렀어요. 그리고 자결을 명했습니다. 세자는 자결하지 못했어요. 그러자 영조는 뒤주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뒤주가 뭐냐면요. 쌀을 보관하는 나무 개짝이에요.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크기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 안에 들어가라고 했어요. 사도세자가 뒤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영조가 뚜껑을 닫게 했어요. 그리고 못을 박았습니다. 한 여름이었어요. 뒤주 안에 온도가 어땠을지 생각해 보세요. 사도세자는 그 안에서 파리를 버텼습니다. 물도 없었어요. 음식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그 8일 동안 뚜껑을 열지 않았습니다. 군궐 한가운데에 뒤주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서 세 자가 죽어가고 있었어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열지 못했습니다. 왕의 명령이었으니까요. 8일째 뒤줄을

49:56 열었을 때 사도세자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거예요. 전쟁터도 아니고 법정도 아니고 궁궐 한가운데서 쌀 괴에 넣어서 8일 동안 죽인 겁니다. 이게 이모 화변이에요. 조선 500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처참한 장면이 바로이 장면입니다. 근데 더 씁쓸한 건 그다음이에요. 영전은 아들을 죽인 뒤로 후회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사도세자에게 사도라는 시오를 내렸는데 이건 생각하면 슬프다라는 뜻이에요. 아들을 죽여 놓고 슬프다고 이름을 붙인 거예요. 영조는이 뒤로도 14년을 더 왕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왕자에서 내려오지 못한 거예요. 52년이라는 숫자 안에이 비극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근데 여기서 이상한게 하나 있거든요.이 끔찍한 사건의 한가운데에

50:43 아이가 하나 있었어요. 사도세자의 아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뒤주에 넣는 걸 알고 있는 아이예요.이 아이는 아버지를 죽인 할아버지 밑에서 14년을 살아남아야 했어요. 할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없었습니다. 왕세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14년 뒤 아이가 왕이 됐습니다. 정조 1776년 영조가 83세로 세상을 떠났고 마침내 즉이식이 열렸어요. 조선의 모든 신하가 새 왕의 첫마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조가 입을 열었어요.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조정이 얼어붙었을 거예요. 왜냐면 사도세자는 영조에 의해 폐서인이 된 사람이거든요. 공식적으로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즉위 첫마디로 선언한 거예요. 이건 그냥 자기 소개가 아니었어요. 아버지의 명예를

51:28 되찾겠다는 선전 포고였습니다. 할아버지 영조가 내린 처분이 잘못됐다는 뜻이기도 했고요. 노론의 심장을 겨우는 한 마디이기도 했어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세력에게 나는 그 아들이다. 기억하라고 말한 겁니다. 25살 청년이 조선에서 가장 위험한 한 마디를 즉위 첫날에 던진 거예요. 근데 정조는 복수를 칼로 하지 않았어요.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다. 개혁으로 했어요. 주장각을 세웠어요. 오늘날로 따지면 대통령 직속 정책 연구소 같은 곳이에요. 왕실 도서관이자 싱크탱크였습니다. 정조는 여기서 자기 사람들을 직접 키웠어요. 장용이라는 친일 군영도 만들었습니다. 왕을 직접 호위하는 군대예요. 정치적 기반과 군사적 기반을 동시에 갖춘 거죠. 서울 허통 정책으로 신분의 관계 없이 인재를 동용했어요.

52:14 아버지를 뒤주에 넣게 만든 그 낡은 붕당 정치 구조를 뿌리부터 뜯어 고치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수원 화성을 지었어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그 옆에 새로운 성각 도시를 건설한 겁니다. 1794년에 시작해서 1796년에 완성했어요. 단순한 성각이 아니었습니다. 거중기 같은 최신 기술을 동원한 당대 최고 수준의 건축물이었어요.이 성과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에요. 수원에 가시면 직접 걸어 보실 수 있어요. 200년 넘게 그 자리에서 있는이 성이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쌓한 성이라는 걸 알고 보면 돌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일 겁니다. 정조는 24년 동안 조선을 바꿔 놓았어요. 탕평 인사를 강화했고 문화와 학문을 부흥시켰습니다. 조선 후기 눈의 쌍상스라고 불러도 될만큼

53:01 찬란한 시대를 열었어요.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의 아들이 뒤주를 만든 시대를 뜯어 고친 거예요. 복수를 칼이 아니라 정치로 한 왕 하늘 분노가 아니라 개혁으로 바꾼 왕입니다. 근데 1800년 제위 24년째 되던 해에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독살설이 있지만 확인된 건 아닙니다. 분명한 건 하나예요. 정조가 죽으면서 조선의 마지막 개혁 동력이 꺼졌다는 거예요. 규장각은 힘을 잃었고 장용형은 해체됐습니다. 정조가 24년에 걸쳐 쌓아올린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기 시작한 거예요. 이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은 어떻게 됐을까요?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어요. 한양이 아닌 수원에 제2의 수도를 만들려던 계획이었습니다. 그게 실현됐다면

53:47 조선의 19세기가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어요. 근데 역사에 만약은 없잖아요. 정조가 떠난 자리에 남은 건 11살짜리 어린아들과 권력에 굶주인 외척 가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면요. 영조는 52년 동안 왕자를 지켰지만 아들을 직접 죽인 아버지였고 정조는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의 한을 개혁으로 바꾼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두 세대에 걸친 비극이 조선 후기의 가장 위대한 시대와 가장 처참한 장면을 동시에 만들어 낸 거예요.이 두 장면이 같은 왕자에서 나왔다는게 조선이라는 나라의 비극입니다.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거든요. 정조가 떠난 뒤 조선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됩니다. 왕이 있어도 왕이 아닌 시대가 시작되거든요. 정조가 죽었어요. 1800년이에요. 뒤장각을

54:33 세우고 수원 화성을 쌓고 아버지의 복수를 개혁으로 풀어낸 왕이 떠난 거예요.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많은 역사학자들이 하는 말이에요. 근데 정조는 10년은 커녕 하루도 더 살지 못했어요. 그리고 조선이 달라집니다. 완전히요. 정조의 아들 순조가 왕에 오릅니다. 나이가 11살이었어요. 11살짜리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당연히 못 하죠. 그래서 정순 왕우가 수렴 청정을 시작합니다. 근데 수렴 청정이 끝난 뒤에도 권력은 왕에게 돌아오지 않았어요. 이때부터 조선의 권력은 왕이 아니라 외척 가문의 손에 완전히 넘어갑니다. 안동 김씨예요.이 집안 하나가 나라를 통째로 진 거예요. 오늘날로 따지면요. 대통령은 있는데 실제로는 대통령 장인 집안이 국무청미도 정하고 장관도 정하고

55:19 판사도 정하는 겁니다. 이걸 세도 정치라고 불러요.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정하는 체제예요. 왕이 도장을 찍긴 하는데 도장 찍을 서류를 만드는 건 전부 안동 김씨였던 거죠. 순조의 제위 기간은 34년이에요. 긴 시간이잖아요. 근데이 34년 동안 순조가 왕으로서 뭘 했냐고 물어보면 떠오르는게 거의 없어요. 세종은 32년 제 훈민정을 만들었고 영조는 52년 제 탕평책을 폈어요. 순조는 34년 동안 뭘 했을까요? 왕이 있는데 왕이 아닌 시대였거든요. 그러는 사이 조선의 밑바닥에서는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1811년 홍경내에 난이 터져요. 평안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밀란이에요. 왜 터졌냐면요. 조정에서는 외척 가문끼리 권력 다툼을

56:05 하고 있는데 백성들은 굶어가고 있었거든요. 세금은 올라가는데 돌아오는 건 없었어요. 왕은 허수합비, 권력은 한 집안이 독정, 백성은 방치. 이게 그냥 말로만 그런게 아니에요. 실제로 수천 명이 들고 일어났다가 진압당한 거예요. 나라가 안쪽부터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순조가 제위 34년 만에 죽고 다음 왕이 올라와요. 헌종이에요.이 왕은 여덟살에 즉했어요. 또 어린 왕이에요. 순조도 11살에 시작했는데 헌종은 여덟살이에요. 이번에는 풍양 조씨가 수령 청정을 합니다. 안동김 씨 다음에 품양 조씨. 외척 가문의 이름만 바뀌었지 구조는 똑같았어요. 왕 위에 외척이 있고 외척 위에는 아무도 없는 구조. 왕은 여전히 허수합이었습니다. 근데 여기서 이상한게 하나 있거든요. 헌종은 성장에서 성인이 됐어요. 직접 나란

56:50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됐는데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세도 정치가 그만큼 뿌리가 깊었던 거예요. 조선 초기에 태종이나 세조 같은 왕들은 칼을 들어서라도 왕권을 찾았잖아요. 헌종에게는 칼을 들 흰조차 없었어요. 권력 구조 자체가 이미 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까지 간 겁니다. 결국 헌종은 23세의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요. 왕자의 15년을 앉아 있었지만 왕이었던 적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자, 이제 문제가 생겼어요. 다음 왕을 찾아야 하는데 헌정한테 아들이 없잖아요. 그래서 방계 왕족 중에서 찾았는데이 사람의 이야기가 조선 역사에서 가장 기막힌 반전 중 하나예요. 강화도에 사는 농부가 한 명 있었어요. 매일 나무를 하고 밭을 읽으며 사는 사람이에요. 왕족의 혈통이긴 했지만 그건 먼 친척 수준이었고 궁궐과는

57:35 아무런 접점이 없었습니다.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시골 농구였어요.이 이 사람이 갑자기 왕이 됩니다. 철종이에요. 나무를 하다가 갑자기 왕이 된 거예요. 기록을 따라가 보면요. 철종은 임금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사람이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어제까지 나무를 패던 사람이 오늘 옥자에 앉은 겁니다. 드라마 같죠? 근데 이건 해피 엔딩이 아니에요. 안동김 씨가이 사람을 왕으로 앉힌 이유가 있거든요. 조종하기 쉬운 사람이 필요했던 거예요. 정치를 모르고 인맥도 없고 군궐 사정도 모르는 사람. 완벽한 꼭씨였던 겁니다. 태종 이방원은 형제를 죽여서라도 왕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근데 철종은 왕이 되고 싶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 억지로 왕좌에 앉혀진 거예요. 500년 사이에 왕좌의 의미가

58:21 이렇게까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면요. 철종 제 14년 동안 안동김씨 세도 정치는 절정에 달합니다. 삼정이 물란해졌어요. 전정, 군정, 환곡, 세금을 벗는 세 가지 제도가 전부 무너진 거예요. 지방 관리들이 백성들한테 없는 세금을 만들어서 뜯어내고 그 돈은 중앙의 외척 가문에게 올라갔어요.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요. 나라가 자기들을 약탈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라를 지켜주는게 아니라 나라가 적긴 시대. 조선은 이미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어요. 순조부터 철종까지 세 명의 왕이 63년을 다스렸어요. 근데이 세 명의 왕을 합쳐도 정조 한 명이 24년간 이룬 것만큼도 못했습니다. 왕자가 있어도 왕이 없는 시대. 태조가 피를 흘려 세운 나라. 세종이 빛나게 만든 나라. 정조가 마지막으로

59:06 일으키려 한 나라가 이렇게 허물어지고 있었어요. 이게 세도 정치의 나라였습니다.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거든요.이 다음에 올라오는 왕의 시대에 조선은 왕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 자체가 사라집니다. 안에서 썩어가던 나라에 바깥에서 칼이 날아온 거예요. 조선 518년 27개의 왕자 그 마지막 장이 시작됩니다. 1863년 철종이 죽고 새 왕이 올라옵니다. 고종이에요. 12살이었어요. 또 어린 왕이냐고요? 맞아요. 근데 이번에는 뒤에서 있는 사람이 달라요. 흥선대원군. 고종의 친아버지입니다. 외척이 아니라 왕의 아버지가 직접 나라를 준 거예요. 안동김 씨, 풍양조 씨가 돌아가며 나라를 주물러거린 세도 정치 60년. 그 시대를 처음으로 끊어낸 사람이 흥선 대원군이에요. 흥선 대원군은

59:52 취임하자마자 안동김 씨의 세도 정치를 해체합니다. 그리고 경곡을 다시 짓기 시작해요. 임진한테 불탄 뒤 270년 남게 방치됐던 군거를 보건한 거예요. 왕실의 권위를 되세우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요. 국회의 사당이 270년째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새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복원을 시작한 거예요. 그 정도의 상징적 의미가 있었어요. 근데 여기서 이상한게 하나 있거든요. 흥선대용군이 안으로 나라를 바로 잡으려고 했쓰는 동안 바깥세계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어요. 서양 열강은 이미 증기성과 대포를 갖고 있었고 바로 옆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빠르게 근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이 세도 정치라는 블랙홀에 빠져서 60년을 허의하는 동안 세상은 돌아올 수 없을만큼 변해 있었던 거예요. 이미 너무 늦었을지도 모르는 시점이었습니다. 광해군이 200년 전에 중립교를 했다가 쫓겨 놨잖아요.

1:00:39 그때 광해군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200년이 지나서야 온 나라가 뼈저리게 느끼게 된 거예요.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요. 조선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조약입니다. 근데 이게 불평등 조약이었어요. 일본이 군함을 앞세워서 강제로 문을 연 거예요. 이때부터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됩니다. 일본 청나라 러시아 미국 영국이 나라들이 전부 조선이라는 판 위에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달려둔 거예요. 조선은 체스판이 됐고 조선 사람들은 체스 말이 됐어요. 말이 스스로 움직이는 법은 없잖아요. 고정은이 혼란 속에서 나라를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였어요. 근데 안에서도 문제가 터져요. 1884년 갑신정변 개화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3일 만에 진압돼요. 그리고 1894년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납니다.에서는

1:01:24 열강이 파고 들고 안에서는 백성이 들고 일어난 거예요. 나라가 안팎으로 동시에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종의 제위 기간이 44년이에요. 영조 숙정 다음으로 긴 제위예요. 44년 동안 왕자에 앉아서 나라가 무너지는 걸 지켜본 겁니다.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이 가시나요? 이쯤 되면 궁금하실 거예요. 고정은 대체 뭘 할 수 있었을까?이 상황에서 어떤 왕이 앉아 있었어도 답이 없었던 걸까? 근데 그 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조선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에요. 한밤중에 일본 군인들과 낭인들이 경복공으로 침입합니다. 무장한 외국인들이 조선의 군궐에 들이닥친 거예요.이 사람들의 목표는 명상황우였어요. 그리고이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합니다. 왕비를 군궐에서 외국 군인들이 시혜한

1:02:10 거예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한 나라의 왕비를 그 나라의 군궐 안에서 외국인들이 죽인 겁니다. 세계 역사를 다 뒤져봐도 이런 사건은 찾기 힘들어요. 조선이 세워지고 500년이 넘는 동안 외적에 침입은 있었어요. 임진을란도 있었고 병자고란도 있었어요. 근데 군거란까지 들어와서 왕비를 죽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것도 평시예요. 전쟁 중도 아닌데요. 인조가 삼전도에서 이말을 땅에 찌은 것도 치욕이었지만 적어도 그건 전쟁 끝에 벌어진 일이에요. 을미사변은 전쟁도 아닌 상황에서 군걸리 뚫린 거예요. 조선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이었습니다. 고정은 무너졌어요. 왕비를 잃은 남편이자 왕비를 지키지 못한 왕이 된 거예요. 그리고 1896년 고종은 결단을 내립니다. 군궐을 떠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시해요. 아관 파천이에요. 한

1:02:57 나라의 왕이 자기 궁궐이 아니라 다른 나라 대사관에서 나란 일을 본 거예요. 조선의 왕이 조선의 군궐에서 안전하지 못한 거예요. 병자울란 때 인조는 적어도 남한산성에서 47위를 버텼어요. 근데 고종은 버틸 성조차 없었어요. 자기 궁궐이 안전하지 않으니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도망간 거예요.이 치욕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지시죠? 근데 고종은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어요. 1897년 고종은 큰 결심을 합니다. 조선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해요. 왕이 아니라 황제가 되겠다고 선언한 거예요.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이고 왕이 아니라 황제예요. 더 이상 어떤 나라에도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어요. 500년 넘게 이어온 조선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내려놓을만큼 고종은 절박했던 겁니다. 근데 이름을 바꾼다고 나라가 강해지진 않았어요.

1:03:43 대한 제국은 선포했지만 군사력도 없고 경제력도 없었어요. 열강들은이 선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이름만 바꾼 것 아니냐는 거죠. 선언만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었어요. 1905년 을사 능약이에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빼앗아 갑니다. 다른 나라와 대화할 수 있는 권리 자체가 사라진 거예요. 오늘날로 따지면요. 어느 날 갑자기 외교부가 통째로 없어지고 우리나라 외교를 다른 나라가 대신하게 되는 거예요. 나라의 입을 막아 버린 겁니다. 고종은 마지막 수단을 꺼내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회의 밀사를 보냅니다. 세계에 알리려 한 거예요. 우리나라가 강제로 주권을 빼앗기고 있다고요. 대한 제국이라는 나라가 아직 살아 있다고 도와달라고요. 근데 일본의 방해로 밀사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1:04:29 못했어요. 밀사 중 한 명인 이위종이 기자 회견을 열어 호소했지만 국제 사회는 차갑게 외면했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게 빌미가 돼요. 일본은 고종이 외교적 도발을 했다며 강제로 퇴위시킵니다. 나라를 살리려는 마지막 몸부림이 오히려 왕자를 빼앗기는 이유가 된 거예요. 고종의 44년은 이렇게 끝났어요. 어린 왕에서 시작해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왕비를 잃고 군궐를 떠나고 나라의 이름을 바꾸고 마지막 밀사마저 실패한 뒤에 왕자에서 끌어내려진 겁니다. 고종이 물러나고 순종이 올라옵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예요. 근데 이분의 이야기가 정말 안타까워요. 순종은 어릴 때 군궐에서 올린 커피에 독이 들어 있었던 사건을 겪었는데 이때이가 전부 빠져서 평생 틀리를

1:05:14 끼고 살았습니다.이 영상 처음에 말씀드렸죠. 독의이가 다져서 평생 틀리를 끼고 산 마지막 황제. 그게 바로 순종이에요. 태어나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된 사람이에요. 순종의 제위 기간은 3년이에요. 근데이 3년 동안 순종이 한 일은 없어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거든요. 모든 권력은 이미 일본 통부가지고 있었습니다. 군대도 해산당했어요. 황제라는 이름만 남았을뿐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근데이 시기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났습니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약 2,700여회의 전투가 벌어졌어요. 황제는 무력했지만 백성들은 싸우고 있었던 거예요. 임진을 한 때 선조가 도망갔을 때도 의병들이 일어났잖아요. 300년이 지났는데도 같은 일이

1:05:59 반복된 겁니다. 왕이 못하면 백성이 하는 거예요.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예요.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됩니다.이 순간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세운 나라가 끝났어요. 518년이에요. 세종이 한글을 만들고 이순신이 목숨을 받쳐 지키고 영조가 52년을 앉아서 다스리고 정조가 마지막으로 일으키려 한 나라. 그 나라가 지도에서 사라진 겁니다. 조선 518년 27개의 왕자가 여기서 전부 끝났어요. 태종이 형제를 죽여서 지킨 왕자, 세조가 조카를 죽여서 빼앗은 왕자, 영조가 아들을 죽이고도 52년을 앉은 왕자. 그 모든 왕자가이 하루에 사라졌습니다. 태조가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세운 나라의 마지막은요. 외국 군대 앞에서

1:06:45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황제의 도장 한 번이었어요. 피로 시작된 왕조가 피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무력하게 끝난 겁니다. 태종 이방원이 이걸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순종은 나라를 잃고도 한동안 군궐에 남아 있었어요. 왕자는 사라졌는데 사람은 남아 있는 거예요. 텅빈 군궐에 앉아서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버지 고종이 44년을 싸워도 지키지 못한 나라. 그 나라의 마지막 도장을 찍은 사람이 자기라는 사실. 518년간 이어진 왕자의 마지막 주인이 든다는 건 가장 무거운 짐을 혼자진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조선 27명의 왕 이야기예요. 태저부터 순종까지 건국의 야망에서 멸망의 공허까지 500년 동안 왕자에 앉은 27명이 치른 대가를 전부 보신 겁니다. 여기까지 오셨으면요.

1:07:31 518년 동안 27개의 왕자에 앉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부 보신 거예요. 태조의 야망에서 순종의 공허까지. 한편의 영상으로 500년을 달려온 겁니다. 건국의 피, 전쟁의 불, 왕자의 눈물, 멸망의 침묵까지 잠깐 수만 고르시죠. 27명의 왕들을 전부 보고 나면 숫자 몇 개가 머릿속에 남아요.이 숫자들이 왕자의 진짜 무게를 알려줍니다. 가장 오래 왕자에 앉은 사람 영조예요. 52년이에요. 조선 역대 최장 제위이고 83세까지 살았습니다. 조선의 모든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고 가장 오래 다스린 왕이에요. 탄평책을 펴고 균역법을 시행한 개혁군주이기도 했어요. 근데이 사람은 아들을 뒤주에 가둬서 직접 죽인 아버지였어요. 8일 동안 아들이

1:08:17 죽어가는 걸 알면서도 뒤주를 열지 않은 사람이에요. 52년이라는 시간이이 사람에게 축복이었을까요? 형벌이었을까요? 최장수 왕이라는 기록 뒤에는 아들을 죽인 아버지라는 기록이 붙어 있어요. 가장 짧게 왕자에 앉은 사람 인종이에요. 8개월이에요. 조선 역대 최단기 제위예요. 왕이 되자마자 떠난 거예요. 왕자에 앉아서 뭘 해 볼 시간조차 없었어요. 문정 왕우와의 갈등 속에서 급서했습니다. 왕자의 무게를 느끼기도 전에 사라진 사람이에요. 52년과 8개월 같은 왕자인데 시간의 격차가 이렇게까지 나요. 그리고 가장 어린 나이의 왕자에서 쫓겨난 사람 단종이에요. 12살의 왕이 됐어요. 조선의 정통성으로 따지면 가장 완벽한 왕이었습니다. 세종의 손자이자 문종의 적장자니까요. 근데이 완벽한

1:09:04 정통성이이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어요. 삼촌 세조에게 왕자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됐다가 17배 목숨을 잃었습니다. 왕이 되기에 가장 정당한 사람이 가장 짧고 가장 잔인하게 끝난 거예요. 52년, 8개월, 17살.이 이 숫자들이 왕자라는 자리에 본질을 보여 줘요. 오래 앉는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짧게 앉는다고 덜 아픈 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안 뜬 얼마나 안 뜬 왕자는 반드시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요.이 사람들은 전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들이에요. 드라마 속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로 궁궐에서 숨쉬고 고민하고 결정을 내리고 결국 그 결정에 대가를 치른 사람들이에요. 누군가는 형제의 피로, 누군가는 자식의 죽음으로, 누군가는 나라 자체를 잃는 것으로 대가를 치렀어요.

1:09:50 그리고 그 기록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조선 왕조 신록이에요. 총 1893권, 4,96만 자. 한 사람이 하루 종일 읽어도 수년이 걸리는 분량이에요. 사관이 왕 몰래 기록한 거예요. 왕이 적지 말라고 해도 적었습니다. 왕이 제위 중에는 절대 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이 기록이 정직한 거예요. 왕의 눈치를 보지 않은 기록이니까요. 세계에서 단일 왕조의 연속 기록으로는 가장 긴 역사서예요.이 실록이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됐어요. 같은 해의 수원 화성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 됐습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쌓은 성이에요.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성을 쌓은 건데 그 성이 200년이 넘도록 무너지지 않고서 있어요. 서울 종묘도 세계

1:10:36 문화 유산이에요. 조선의 왕과 왕비의 위패가 봉안된 곳이죠. 조선 왕릉 40이기도 세계 문화 유산이에요. 서울과 경기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왕들의 무덤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500년 전 왕들의 흔적이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거예요. 지하철 타고 갈 수 있는 거리에요.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은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읽을 수 있어요. 사관이 500년 전에 목숨 걸고 적은 기록을 지금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는 거예요. 기록이 살아남은 겁니다.이 영상 처음에 말씀드렸어요. 만약 조선 시대에 왕이 된다고 상상해 보라고요. 가장 좋은 음식을 먹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한마디에 나라가 움직이는 자리에 앉는 거라고요. 부러우시냐고 물었었죠. 이제 27명의 왕을 전부 보셨잖아요.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된 태종, 조카를 죽인 세조, 아들을 뒤주에 놓은 영조, 나라를 잃은

1:11:23 순종.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으신 지금 여전히 부러우신가요? 아마이 영상을 보기 전과 대답이 달라지셨을 거예요. 왕자는 권력의 자리가 아니었어요. 대가를 치르는 자리였거든요. 끝까지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기록 속에 잠든 이야기를 깨워드리는 이상한 역사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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