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나라를 산 값에 팔아먹은 매국노들의 최후!! 을사조약 서명 직후 벌어진 일”의 전체 스크립트입니다. 타임스탬프를 클릭하면 해당 장면부터 영상이 열려요. 다른 영상이 필요하다면 유튜브 스크립트 추출기를 이용하세요.
0:00 나는 이제 죽어도 호위호식하며 죽을 수 있게 됐다. 조선의 군부 대신이 을사 조약의 도장을 찍고 집에 돌아와 가족들 앞에서 한 말입니다. 그의 이름은 이근택. 그가 정말 호위호식하며 죽었을까요? 정말 그랬습니다. 이근택만이 아니에요. 도장찍은 다섯 명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천수를 누리고 자기 집에서 눈을 감았어요. 이완용, 박재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처형당한 사람, 옥에서 죽은 사람, 자결한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 특히 이완용은 이른 가까이 살았어요. 두 번이나 자기 나라를 팔아넘긴 자가
0:46 자식들 손을 잡고 예순 여덟 감았습니다. 그런데이 다섯 명의 마지막은 누구도 똑같지 않았습니다. 한 명은 도장을 찍은 직후 자기 집에서 칼을 맞습니다. 한 명은 매국으로 받은 돈을 매국 직후에 다 날려버려요. 한 명은 식민지 조선이 무너지는 걸 24년 동안 끝까지 다 지켜봅니다. 다섯 명 준 누가 그랬는지 그들의 마지막은 어땠는지 그리고 그들이 모은 땅은 지금 누구의 손에 있는지 오늘 한 명씩 끝까지 추적해 보겠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눌러 주시고 다섯 명 중에서 여러분이 가장 융서할 수 없는 한 명은
1:32 누구인지 그 이름을 댓글에 남겨 주세요. 먼저 1905년 11월 17일 그날 밤으로 가봅니다. 장소는 덕수궁 중명전. >> 지금도 정동에 가시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서울 시청역에서 걸어서 10분. 벽돌로 지어진 2층짜리 양관. 겉으로 보면 그저 오래된 서양식 걸묵이지만 그 안에서 대한제국의 운명이 결정된 곳입니다. 그날 오후 일본 특파 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대신들을 소집합니다. 이미 덕수궁 주변은 일본군. 헌병대가 포위한 상태였어요. 총칼이 회의장 밖을 둘러싸고 있었던 거죠. 회의장 안에 모인 대신은 여덟명. 분위기는
2:20 어땠을까요? 상상하실 필요 없어요.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학부 대신 이완용이 직접 남긴 기록이 있고 통간부 즉 1번 자료도 남아 있습니다. 대신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서론의 얼굴을 쳐다봤고 이토는 그 침묵을 즐기듯 한 명씩 손가락을 가리키며 찬송이냐 반대냐를 차갑게 물어내려 갔습니다. 회의는 새벽까지 다섯시간이 넘게 이어졌어요. 회사에서 다섯 시간 회의 해 보신 적 있으시죠? 그것도 회의실 밖에 총든 군인이서 있는 회의를요. 이게 무슨 협상입니까? 그냥 협박이죠. 그 협박 앞에서 끝까지 버틴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는데 참정 대신 한규설 지금으로
3:08 치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통곡하며 반대했고 울면서 안 됩니다를 외치다가 너무 격하게 항해한 나머지 결국 자리에서 실신에 쓰러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회의장으로 들어와 쓰러진 한 규설을 그대로 끌고 나가 별실에 감금해 버립니다. 총리가 끌려나간 회의장에서 남은 대신들이 표를 던졌고 그 결과는 찬성 다섯이었습니다. >> 외부 대신 박재순, 내부 대신 이지용, 군부 대신 이근택, 학부 대신 이완용, 그리고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바로이 다섯이 우리가 부르는
3:54 을사 오적입니다. 조양문에 실제로 도장을 찍은 사람은 외부 대신 박재순이었고 그래서이 조약의 정식 명칭은 한일 협상조약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이름으로는 을사 능약이에요. 늑자가 뭐냐면 억지로 강요했다는 뜻입니다. 조약이 아니라 느약 이름 그 자체가 이건 정상이 아니다라고 박아 놓은 거죠. 그리고 여기서 정말 결정적인 사실 하나를 짚고 가야 하는데이 조양문에는 끝내 고종 황제에 옥세가 찍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황제의 비준이 없었어요. 비준이 뭐냐? 황제가이 조약을 우리나라 이름으로 인정한다고 옥세를 찍어 주는 마지막
4:40 도장. 그게 비준입니다. 그 도장이 끝까지 안 찍힌 거예요. 국제법상 이은 조약이 아니에요. 대신 다섯 명이 도장 찍은 그 종이는 엄밀히 따지면 효력이 없는 문서였던 거예요. 이건 학계에서도 오래 전부터 일관되게 지적해 온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그 한 장의 종이를 근거로 통관부를 세우고 5년 뒤에는 결국 나라를 통째로 가져갑니다. 종이 한 장이 한 나라를 삼킨 셈이죠. 도장찍은 다섯 명. 이제 한 명씩 그들의 마지막을 끝까지 추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완용.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매국의 1인자가
5:26 되었을까요? 놀라운 건 이겁니다. 이완용은 원래 친일파가 아니었어요. 1858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이완용은 25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그야말로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수제였습니다.이 사람이 처음 배운 외국어가 뭔지 아세요? 영어입니다. 조선 최초의 근대식 학교였던 유경공원의 일기 학생으로 들어가 미국인 교사들에게 직접 영어를 배웠던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1887년 그는 주미공사관 참찬관 자격으로 워싱턴에 부임해 1년 넘게 미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며 대리공사 자리까지 지냈습니다. 이때까지의 이완용은 누가
6:13 봐도 명백한 친미파였어요. 그런데 9년 뒤 1896년 악관파천 때 그는 칠러파로 갈아탑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그 사건, 그 일을 뒤에서 주도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이완용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미국이 강해 보일 땐 친미, 러시아가 강해 보일 땐 친러, 일본이 강해 보이자 친일.이 이 사람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딱 이겁니다. 강한 쪽에 줄을 선다. 신념이 아니라 치밀한 계산이었던 거죠. 그래서 더 무서운 사람이에요. 광신적 친일파라면 차라리 단순한데 이완용은 그게 아니라 시대의 바람을 잃고 가장 강한 쪽에
6:59 정확히 배팅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는 점에서요. 여러분 주변에도 이런 사람 한 명쯤 있지 않습니까? 회사 분위기가 안 좋다 싶으면 제일 먼저 줄 갈아타는 사람. 사장이 바뀌면 바뀐 사장편에 가장 먼저 가서서는 그런 사람. 이완용이 딱 그 유형이었습니다. 다만 그가 가아탄게 회사가 아니라 자기가 태어난 나라였다는게 문제였죠. 1905년 을사 조약 당시 이완용의 직책은 학부 대신 지금으로 치면 교육부 장관이었습니다. 그날 회의장에서 다른 대신들이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이 바로 이완용이었어요.
7:47 당시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조약을 받아들이되 자구 수정을 요구하자. 반대가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더 매끄럽게 받아들일까를 고민한 겁니다.이 한 마디가 결정적이었어요. 이토 히로부미가 이완용을 눈여겨 보기 시작합니다. 이자는 쓸만하다. 그리고 정확히 2년 뒤인 1907년. 이완용은 내각 총리 대신 자리에 오르며 대한제국에 사실상 이인자가 됩니다. 그 해 7월 그는 자기 나라 황제를 강제로 끌어내리는 일에 앞장서여 명부는 헤이그 특사 사건에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양위하시옵소서를
8:34 외친 사람이 누구냐?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나라 황제를 끌어내린 신하 이완용이었습니다. 그리고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 이번에도 도장을 찍은 사람은 이완용이었어요.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이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그 순간 그 종이 위에 마지막으로 팬을든 사람이 바로 이완용이었던 겁니다. 그것도 죄책감 한톨요. 여기서 짚고 가야 할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 지금도 명동 한복판에 그대로서 있는 그 성당이에요. 이날 명동 성당에서는 벨기의 황제의 추도식이 열렸고 당시
9:20 조정의 핵심 인사였던 이완용도 그 자리에 참석합니다.시기 끝나고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성당 정문을 막 나서는 그 순간 군밤 장수로 위장하고 길가에서 있던 한 청년이 비수를 뽑아들고 그에게 달려듭니다. 23살의 청년 이재명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젊은이었습니다. 그는 인력거 위에 이완용을 세 번 찔렀어요. 허리, 어깨, 그리고 패. 세 군데 중 패를 관통한 자상이 가장 기뻤고 이완용은 그 자리에서 피를 쏟으며 인력거 위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집니다. 그런데 죽지 않았어요. 곧장 대한의원 지금의 서울대병원
10:08 자리로 실려간 이완용은 응급 수술을 받았고 두 달 만에 회복하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폐손상은 평생 후유증으로 남았지만 즐기게도 살아남아요. 여기서 잠깐 여러분이 1909년 그날 명동성당 앞에서 있었다면 어떠셨을 것 같으세요? 피를 쏟으며 인력거 위에 쓰러진 매국로 한 명과 그 옆에서 일본 헌병들에게 결박당하고 있는 23살의 청년 한 명. 누구를 향해 침을 뱉으셨을 것 같습니까? 이재명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 이듬의 9월 사형됩니다. 향년 법정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어요.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10:56 생명을 빼앗으나 나의 충호는 빼앗지 못할 것이다. 24살의 청년이 자기 목숨을 던져서 매궁로 한 명을 죽이려 했고 그 매국로는 살아남아 그 후로도 17년을 더 누렸습니다. 이게 우리가 마주해야 할 가장 쓰린 사실입니다. 이완용의 만련은 어땠을까요? 한마디로 말씀드릴게요. 화려했습니다. 병합 직후 일본은 그에게 백작 자위를 내렸고 1920년에는 한 단계 더 끌어올려 후작으로 승작시킵니다. 조선 귀족 중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이었어요. 여기에 은사금이라는 명목으로 15만 원이 따로 주어집니다. 1910년 당시 쌀
11:43 한감화 가격이 약 6엔이었으니까 이걸 쌀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25천 가마 지금 가치로 따지면 못해도 수백억 원이 넘는 돈이에요.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완용은 매국으로 받은 돈 위에 또 돈을 쌓아 올린 부동산의 귀제였어요. 총독부와 결탁해 헐값에 전국의 토지를 매입하고 농장을 운영하면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일가의 재산은 끊임없이 불어났습니다. 해방 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재산 조사 자료에 따르면 이완용 일가가 보유했던 토지는 확인된 것만 수십만 평상이었어요. 여의도 면적이 약 87만 평이니까
12:29 여의도와 만먹는 규모의 땅이 한 매국로 일가손에 있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한 시대를 누리던 그가 마침내 무너지는 날이 옵니다. 1926년 2월 이완용은 옥인동 자택에서 천식과 폐렴 합병증으로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미 심장한 분석이 하나 나와요. 17년 전 이재명 의사의 비수에 패를 다쳤던 그 후유증이 결국 사망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는 분석입니다. 그러니까 이재명 의사의 그 칼이 17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마침내 이완용의 숨통을 끊었다고 볼 수도 있는 거죠. 향년 예순 여달. 장례는 일본식 신도 일본 전통
13:15 종교 의식으로 지뤄졌고 조선 총독 사이토마코토가 직접 조문을 옵니다. 조선의 신문들은 침묵하거나 차가운 비웃음 한주를 사설에 박아넣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같은 시대를 살았던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내천 황현 전라남도 구레에서 평생 학문 하나에만 몰도하며 살았던 그 시대의 한 선비였습니다. 황현은 1910년 한일 병합 소식이 구레에까지 전해진 그날 밤 절명시 내수를 써 내려간 다음 스스로 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습니다. 향년 쉰 여섯 그가 남긴 시 한 구절을 들어보시죠. 가을 등불 아래 책을
14:02 덮고 천고를 회상하니 그라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 황현은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의병도 아니었어요. 관직 한 자리 가져본 적 없는 그저 시골에서 책 읽고 글 쓰던 일계 선비였습니다. >> 그런 사람이 자를 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어요. 그 아는 사람이 어찌이 시대를 보고만 있겠느냐. 그가 죽기 전에 남기고 간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매천 야이고이 책에는 조선 말기에 벌어진 모든 매국 행위가 빠짐없이 기록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매천 야의 첫 줄에 등장하는 이름이 누구냐? 바로 이완용이에요. 같은 1910년이라는 시간 위에서
14:50 살았던 두 지식인을 한번 나란히 놓고 보세요. 한쪽은 글 아는 사람이라는 그 단 한 마디에 부끄러움 때문에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끊었습니다. 다른 한쪽은 두 번이나 자기 나라를 팔아넘기고도 일본 자위를 차고 수백억대 재산을 모으며 천수를 다 누렸어요.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글을 읽고 자란 두 사람의 결말이 이렇게 갈렸습니다. 두 번째 인물. 박재순. 이완용과 같은 해 1858년생으로 동갑이죠. 그런데이 사람 을사 조약 때 직책이 뭐였는지 아세요? 외부 대신. 지금으로 치면 외교부 장관입니다. 나라의 외교를 책임지는
15:35 자리. 외국과 조약을 맺을 때 가장 앞에서야 하는 자니.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하는 자리.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바로 그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종이에 도장을 찍은 거예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외교부 장관이 외교권을 팔아넘긴 겁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외교부 장관이 외국의 외교권 넘기는 조약에 사인하고 집에 돌아온 거죠. 상상이 가세요. 그런데 박재순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될 때 그는 내부 대신이었습니다. 내부 대신은 지금의 행정안전부 장관격이죠. 그러니까이
16:20 사람 1905년에 외교권 팔고 1910년에는 나라 전체가 넘어가는 자리에 또 앉아 있었던 거예요. 두 번이에요. >> 이완용만 두 번 도장을 찍은게 아닙니다. 박재순도 두 번 그 자리에 있었어요. 병합 직후 일본은 그에게 자작 자위를 줍니다. 자라는게 뭐나? 일본이 만든 귀족 계급장이에요.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다섯 등급이 있는데 자작은 위에서네 번째 이완용이 받은 백작보다 한 단계 아래죠. 그래도 일반인은 평생 가도 못 받는 신분입니다. 은사금은 10만엔. 당시 쌀로 환산하면 1만
17:06 6천 가마가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죠. 평생 일 안 해도 손주들까지 호위호식할 수 있는 엑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요? 편이 살았어요. 처벌도 없고 추궁도 없고 자책의 흔적도 없습니다. 1916년 6월 20일 병환으로 사망 향년 쉬인 여덟 장례는 일본식으로 치러졌고 조선 총독부 고관들이 줄지어 조문을 왔습니다. >> 조선 백성들의 분노 같은 건이 장례식장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그가 죽는 순간까지 매국에 대해 한마디 사과도 한 줄 후에도 남기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외교부 장건이 외교권 팔고 내부 대신으로 나라 팔고
17:55 자작 자귀에 10만엔 받고 쉬 여덟 가지 살다가 자기 침대에서 눈을 감았어요. 여기서 잠깐 집고 갈게 하나 있어요. 을사 오적.이 이름 누가 붙였을까요? 당연히 후대 역사학자들이 정리했겠지 생각하시는 분들 많을 거예요. 아닙니다. 조약이 체결되고 사흘 뒤로 이름이 붙었어요.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한 사설이 일면을 뒤덮습니다. 제목은 시일 야방 성대곡. 글자 그대로 풀면이 날에 목노와 통곡한다. 쓴 사람은 장지연.이 이 사설에서 장지현은 다섯 대신을 한 단어로 박제해 버립니다. 오후 다섯 명의
18:43 도적 나라를 훔친 자들. 그게 이들의 새 이름이 된 겁니다. 그리고이 두 글자가 그날부터 지금까지 120년 동안 그들의 이름표가 됐어요. 역사책 어디를 펴도 이완용 옆에는 을사 오적이 따라붙습니다. 박재순도, 이지용도 이근택도 권중현도 마찬가지예요. 다음 세 번째 인물 내부 대신 이지용.이 이 사람 이야기가 진짜 앞권이거든요. 다섯 명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에요. 왜냐고요? 왕족이거든요. >> 흥선 대원군의 형 흥인군 이최흥 가문의 후손이고 >> 대한제북 황실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왕실의 피가 흐르는
19:29 사람이었어요. 한 줄로 요약해 볼게요. 황실의 피를 받은 대한제국 황실의 종친이 그 황제의 나락을 일본에 팔았습니다. 남의집 종놈이 주인집 팔아먹은게 아니에요. 주인집 핏줄이 주인집을 팔아먹은 거예요.이 지용은 1870년생 다섯 명 중 막내였어요. 을사 조약 당시 나이가 35. 한창 혈기 왕성할 나이죠. 직책은 내부 대신 지금으로 치면 행정 안전부 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왜이 왕족이 일본에 줄을 섰을까요? 신념 때문에, 사상 때문에, 시대의 흐름 때문에 다 아니에요. 돈입니다. 그냥 돈.이 이
20:16 사람 도박 중독자였거든요. 화투, 마작 그리고 당시 조선에서 막 유행하기 시작한 일본식 도박까지 손대지 않은게 없었어요. 기록에 따르면 이지용은 하룻밤에 수천 N을 날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수천엔 N이 얼만지 감히 안 오시죠? 당시 쌀 한 가마가 6엔이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죠. 수천엔이면 쌀 수백가마예요. 하룻밤에 쌀 수백 가마를 도박판에서 왕족이요. 상상이 되세요? 지금으로 치면 무슨 재벌까? 손자가 강원랜드에서 하룻밤에 수십억을 날리는 격이에요.
21:02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습관처럼요. 그래서 이지영은 늘 돈에 쪼들렸습니다. 빚쟁이들이 왕족집 대문을 두드렸어요. 그리고 일본이 그 약점을 정확히 파고듭니다. 을사 조약 체결을 전후로 일본이 이지용을 매수했다는 정황이 여러 자료에 남아 있어요. 일본측이 그에게 거액을 건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액수는 당시 쌀 천가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지용은 그날 회의장에서 신념으로 도장 찍은게 아닙니다. 협박당에서 찍은 것도 아니에요. 돈 받고 찍은 거예요. 그것도 도박빛 갑을 돈으로 왕조이 자기 황실의 나라를 화투판에서 이른 돈 메꾸려고
21:50 이런 사람이 매국로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매국입니까? 병합 후 이지용은 백작 자위를 받습니다. 은사금은 10만 엔. 평생 일 안 해도 손주까지 호위호식할 돈이었죠. 그런데 이게 이지용 이야기의 하이라이트가 아니에요. 진짜는 지금부터입니다. 이지용은 매국으로 받은 그 10만엔을 매국 직후에 다시 도박판에서 읽기 시작합니다. 나라판 돈으로 화투를 친 거예요. 그리고 1912년 결국 사고가 터집니다. 도박죄로 체퍼. 백작 자위 정지. 일본이 매국 대가로 준 백작 자기 도박 때문에
22:37 박탈됩니다. 매국 7년 만에요. >> 이거 진짜 어처군이 없지 않나요? 왕족 출신 매국로가 일본한테 받은 자위를 일본 법정에서 도박죄로 잃어요. 시나리오로 썼으면 작가가 욕 먹었을 전개예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고요? 그런데 진짜 있었던 일입니다. 자위 정지 이호 이지용은 가산을 다 탕진합니다. 친지들 집을 돌며 돈을 빌리러 다녔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요. >> 황실 종친이었던 사람이 말년에는 돈 빌리러 다니는 신세가 된 겁니다. 친지들도 결국 외면합니다. 1928년 6월 28일 사망 향년 쉰 병합으로부터 18년 뒤였어요. 남긴
23:25 재산은 거의 없었고 자식들의 삶도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이지용은 권력은 있었으나 위험은 없었습니다. 돈은 받았으나 남기지 못했고 자기는 얻었지만 빼앗겼습니다. 핏줄은 왕족이었으나 그 핏줄을 자기 손으로 끊었죠. 이게 왕족 출신 매국로의 만련이에요. 도박으로 망가지긴 했지만 어쨌든 쉰 여덟까지 살았고 감옥도 가지 않았고 자기 침대에서 죽었어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다섯 명 중에서 그나마 현세에서 무너진 유일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제네 번째 인물로 가봅시다.이 사람은 을사조약 직후에 어느 밤 자기 집에서 칼을
24:10 맞습니다. 군부 대신 이근태 다섯 명 중에서 가장 처참한 밤을 보낸 사람입니다. 1865년생 충청도 충주 출신. 원래 직업이 뭐였는지 아세요? 무관이었어요. 칼 차고 다니던 군인이었죠. 그리고이 사람을 발탁해서 키운 인물이 있어요. 명성황. 자, 여기서 잠깐 명성황우가 누구한테 죽었죠? 일본 낭인들 손에 죽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 경복궁 한복판에서 칼에 찔리고 불태워졌어요. 그런데 그 명성황호가 발탁해서 키운 신하가 10년 뒤에 무슨 짓을 합니까? 명성황호를 죽인 그 나라에 도장을 찍어 줍니다. 이게
24:58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은혜를 베푼 사람의 원수에게, 자기를 키워 준 사람의 사례범에게 도장을 찍어 준 거예요. 이런 인간이 세상에 있을 수 있나요? 그런데 있었습니다. 그것도 조선의 군부 대신이라는 자리예요. 이근택의 직책 군부 대신.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 장관입니다. 군 통수권을 가진 사람이 외교권을 넘기는 조약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군대를 책임지는 자가 군대 없는 나라를 만든 거예요. 자기 손으로요. 자, 그런데 이근택 이야기의 진짜 클라이맥스는 지금부터입니다. 을사 조약이 체결된 직후의 어느 밤 이근택은 집으로
25:44 돌아갑니다. 그리고 가족들 앞에서 술 한 잔 걸치고 자랑을 시작하죠. 황현의 매천 야에 그 말이 그대로 기록되 있습니다. 나는 이제 죽어도 호위호식하며 죽을 수 있게 됐다.이 말을 그 집에서 일하던 한 사람이 듣습니다. 옷 짓는 일을 하던 친무였어요. 신부는 종이었습니다. 양반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고 의병도 아니었습니다. 듣고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들고 있던 옷감을 그 자리에서 내던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요. 내가 비록 비천한 종이지만 차마 역적의 옷은 지을 수 없다. 그리고 집을 박차고 나가 버립니다. 여러분 옷 짓는 침목하여 조선의 군부
26:32 대신보다 더 의로웠어요. 글 공부도 안 한 평범한 여인이 나라 먹던 장관 아보다 옳고 그름을 알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날 밤 이야기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친모가 옷감 내던지고 집을 나간 그 지음 자객들이 담을 넘습니다. 이근택의 집에 침입해요. 칼이 번뜩이고 이근택은 목과 어깨를 배입니다. 피를 쏟으며 쓰러져요. 그 순을 구했는지 아십니까? 조선 백성도 조선 군인도 아니었어요. >> 일본 헌병이었습니다. 집 근처에 주둔하던 일본 헌병이 칼소리를 듣고 단녀와여 자객들을 쫓아내고 피흘리며
27:17 쓰러진 이근택을 들쳐엎고 병원으로 옮깁니다.이 장면을 머릿속에 한번 그려 보세요. 조선의 군부 대신이 조선 백성의 칼에 맞아 쓰러졌고 일본 군인의 등에 엎혀 살아났습니다. 이게 무슨 그림입니까? 조선의 대신을 조선 백성이 죽이려 했고 일본이 살렸습니다.이 한 장면이 1905년 조선이 어떤 나라가 됐는지를 모든 걸 다 말해 줍니다. 군부대신이라는 사람이 자기나 백성한테는 적이었고 자기 나라를 침략한 나라 군인한테는 동지였습니다. 이게 을사조약 직후 조선이라는 나라의 진짜 풍경이에요. 그날 밤 이근택은
28:02 어떤 표정이었을까요? 자기를 살려준 일본 헌병에게 고개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을까요? 기록에는 안 나와 있어요. 그런데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그 사람한테는 일본 헌병이 자기나라 백성보다 가까운 존재였거든요. 도장 찍는 그 순간부터요. 칼에 그렇게 찔리고도 즐기게 살아남아요. 그 뒤 이근택도 다른 매국로들처럼 자작 자귀를 받습니다. 은사금은 박재순의 절반인 5만엔. 살아남은 대가치고는 꽤 두둑했죠. 그리고 1919년 사망 향년 쉰은 심장병이었습니다.
28:48 다섯 명 중에서 박재순. 다음으로 일찍 죽었어요. 이제 마지막 다섯 번째 인물입니다.이 사람은 다섯 명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아 식민지 조선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24년 동안 두 눈으로 다 지켜봅니다. 농산 공부 대신 권중현. 다섯 명 중에서 가장 덜 알려진 인물이에요. >> 왜 그럴까요? 이완용처럼 두 번 도장 찍은 것도 아니고 박재순처럼 직접 서명한 외교부 장관도 아닙니다. 이지용처럼 왕족 출신도 아니고 이근택처럼 칼맞은 극적인 밤도 없었어요. 그런데 권중현 왜 잊쳤을까요? 배신을 덜서 죄가
29:34 가벼워서 이유가 어이 없습니다. 너무 오래 살아서요. 오래 살았는데 왜 이치냐고요? 끝까지 들으시면 등골이 선을해질 겁니다. 권중현은 1854년생 다섯명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어요. 을사조약 당시 이미 쉰 하나였습니다. 직책은 농상 공부 대신 지금으로 치면 산업통상 자원부 장관격이죠.이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 뭔지 아세요? 일본 통이었습니다. 젊을 때 일본 공사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했거든요. 일본어가 능통했고 일본 정인사들과 깊은 인맥이 있었어요. 한마디로 다섯
30:19 명 중에서 일본과 가장 오래,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람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을사조약 회의 초반에는 잠시 망설렸다고 해요. 그런데 결국 찬성표를 던집니다. >> 망설림이 길지도 않았어요. 진념을 두고 고민한 흔적도 없습니다. 그냥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었어요. 이유요. 기록에 명확히 안 나와 있어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일본과 가장 친했어요. 통역관 시절부터 쌓은 인맥. 그 자리에서 망설릴 이유보다 찬성할 이유가 더 많은 사람이었던 거죠. 병합후 권중현도 자작 자위를 받습니다. 은사금 5만엔 쌀 8천 감마가 넘는
31:06 돈이었어요. 자, 그럼 여기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권중현의 사망일 1934년 3월 19일 향년 여은 다섯 명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병합으로부터 24년이 지난 뒤에야 죽었어요. 이게 뭘 의미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권중현은 자기가 팔아넘긴 그 나라가 식민지로 굴러가는 24년을 두 눈으로 다 지켜보고 갔다는 겁니다.이 24년 동안 조선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1919년 3일 운동.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헌병의 총칼에 죽어간 동포가 7천명이
31:52 넘습니다. 권중현은 그걸 지켜봤습니다. 1920년 봉호동 전투 청산리 대척 홍범도와 김좌진의 독립군이 일본군을 박살냈다는 소식 그것도 봤습니다. 1932년 두 청년의 의거 이봉창은 도쿄에서에게 수류탄을 던졌고 윤봉길은 상해에서 일본군 사령관을 죽였습니다. 두 청년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소식까지 그것도 봤습니다. 함께 도장 찍었던네 명이 한 명씩 사라지는 것도 다 봤습니다. 24년 동안이 모든 건 다 지켜봤어요. 그리고 자기는 일본 자기를 가진 귀족 신분으로 여든이
32:38 되도록 자기 집 안방에서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권중현이라면이 24년 동안 어떤 생각이 드셨을까요? 만세 부르다 총 맞은 동포들 소식을 들었을 때 봉호동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윤봉길이 폭탄을 던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같이 도장찍은 이완용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일말의 부끄러움이라도 있었을까요? 양심의 가책이라는게 단 한 번이라도 스쳤을까요? 천만해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도장을 안 찍었겠죠. >> 양심이라는게 있었으면 그 24년 중
33:23 한 번쯤은 사과에 한 마디라도 남겼죠. 기록을 아무리 뒤져봐도 권중현이 남긴 후해의 흔적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이근택처럼 칼 맞은 극적인 장면도 없고 이지용처럼 도박판에서 무너진 코미디도 없고 >> 이완용처럼 의사의 칼에 찔린 처절함도 없고 >> 박재순처럼 외교권 팔아넘긴 상징성도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여등까지 살다 갔어요. 후회도 없이, 사과도 없이, 흔적도 없이. 이게 가장 오래 산 매국로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권중현. 어쩌면 다섯 명 중에서 가장 영리했던 매국노입니다.
34:09 이완용은 욕이라도 먹었어요. 이지용은 도박판에서 무너지기라도 했고요. 이근택은 칼이라도 맞았습니다. 박재수는 외교부 장관이라는 상징을 짊어줬어요. 권중현은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영희 무척간 매국노. 그래서 우리가이 이름을 가장 잘 읽는 겁니다. 가장 덜 미워하는 거고요. 그게이 사람의 가장 영리한 선택이었던 겁니다.이 다섯 명 중에서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쯤에서 한 가지 우리가 마주해야 할 사실이 있어요. 다섯 명 모두 일본 자기를 그대로 가진 귀족 신분으로 죽었습니다. 은사금은 자식들에게 그대로
34:56 물려줬고요. 일본식 장례를 치렀고 조선 총독부 고관들이 줄지어 조문을 왔어요. 여기서 우리가 진짜 물어야 할 건 따로 있습니다. 죽고 난 다음에 그 이름이 어떻게 다뤄지느냐? 그 재산이 어떻게 처리되느냐? 그 후손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진짜 이야기는 어쩌면 그 사람들이 다 죽고 난 뒤부터 시작됐는지도 몰라요.이 이야기 1934년 권중현 죽음으로 끝난게 아니거든요. 1934년에서 77년이 더 지난 2011년 대한민국 헌법 재판소에서이 다섯 명의 이름이 다시 호명등이다. 그것도 100년 만에 단로요. 권중현이 죽은
35:44 1934년 거기서 훌쩍 건너니다. 2005년 대한민국 국회에서 한 법이 통과됩니다. 법이 좀 길어요. 친일 반민독 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 줄여서 친일재산 귀속법. 이름은 길지만 핵심은 칼처럼 간단합니다. 친일파가 일제한테 받은 재산. 그리고 그 후손이 물려받은 재산 국가가 도로 가져간다. 이게 끝이에요. 그 한 줄짜리 법이 2006년부터 본격 발동되기 시작합니다. 조사 대상자 명단에 1순위가 누구였을까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이완용. 이완용 일가가
36:29 보유한 토지가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완용의 후손들이 이걸 그냥 가만히 지켜보았을까요? 아니요. 그들은 끝까지 싸웠어요. 변호사 선임하고 소송 걸고 법정 다투고 후손들의 주장이 모였는지 아세요? 개인 재산권을 국가가 빼앗는 건 위헌이다.이 한 주를 들고 헌법 재판소까지 갑니다.이 장면 한번 그려보세요. 이완용의 손자들이 이완용이 매국으로 받은 그 땅을 지키겠다고 대한민국 헌법 재판소 법정에 서요. 100년 전 자기 할아버지가 도장 찍어서 무너뜨린 그 나라의 법정에 말이죠. >> 이런 뻔뻔함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37:15 실제로 벌어진 일입니다. 2010년대 대한민국에서요.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2011년 3월 31일 대한민국 헌법 재판소 판결문이 낭독됩니다. 합헌 한 단어였어요. 친일 재산 귀속법 합헌. >> 헌제가 어떤 논리로이 결론을 내렸는지 아세요? 친일로 모은 재산은 애초에 정당한 재산이 아니다.이 한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국가가 빼앗는게 아니라 원래부터 그들 것이 아니었던 걸 제자리에 돌려 놓는 거다. 헌재는 그렇게 본 거예요. 판결 직후 이완용 일가의 토지가 대거 국가로 환수됩니다. 박재순의 후손이 보유했던
38:02 재산. 이근택의 후손이 보유했던 재산. 권중현의 후손이 보유했던 재산 아, 환수 대상이 됐어요. 이완용이 도장을 찍은게 1905년 11월 17일. 환수가 본격 시작된게 2006년. 그리고 헌제가 합헌 도장을 찍은게 2011년 101년이 걸렸습니다. 100년. 그들이 지은 죄는 100년뒤 후손들의 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법으로 판결로 서류 한 장 한 장으로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진짜 사이달은 이제부터입니다. 환수된 그 재산 땅 돈 그 자산 어디로 갔을까요? 국고로
38:49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옮겨집니다. 독립 유공자와 그 후손을 지원하는 기금으로 매국으로 받은 그 땅이 100년 뒤에 독립운동과 후손을 돕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이완용한테 칼을 꽂았던 이재명 의사의 후손이 도움을 받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완용의 땅이 매국 대가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보상금으로 변신한 거예요. 만약 이완용이 침상에서 폐렴으로 죽어가던 1920년 2월에 그가 100년 뒤에 자기 땅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야? 권중현은 여든까지 살랐으니 어쩌면 죽기 직전에 자기
39:37 자기위가 언젠가 사라질 거라는 예감 정도는 했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자기 후손의 땅이 독립인동과 후손에게 흘러갈 거라고는 절대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100년 뒤에 단도 단로 인정해야 할까요? 아니면 본인들은 이미 다 호위호식하고 죽었으니 없다고 봐야 할까요? 본인들이 살아 있을 때 처벌받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분하고 억울한 결말이죠. 그런데 100년이 지나서라도 그들의 이름이 도적으로 박제되고 그들의 땅이 환수되고 그 땅이 독립 유공자 후손에게 흘러간다는 점에서는 역사가 결국 답을 내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에도
40:25 을사 오적의 후손 중 일부는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평범한 시민으로요. 그리고 모든 친일 재산이 환수된 것도 아니에요. 법의 사각지대에 남아 있는 재산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런 주장이 나옵니다. 100년 전 일을 가지고 후손까지 책임을 묻는 건 과하다. 친일 재산 귀속법은 개인 재산권을 치매하는 위헌적 법이다. 반대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 이완용 일간은 아직도 사과 한 마디 없다. 매국으로 모은 재산을 후손히 누리는 것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공감이 가시나요? 100년이라는 시간이 매국의 무게를 덜어 줄 수 있다고
41:12 보세요. 아니면 100년이 지나도 매국은 매국이라고 보시나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가이 다섯 사람의 이름을 잊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진짜로 사면됩니다. 이완용, 박재선 이지용 이금택 권중현.이 다섯 이름을 우리는 언제까지 기억해 할까요? 그 답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구독과 좋아요 눌러 주시고 댓글 한 줄로이 다섯 이름이 잊지 않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