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요약
이 비디오는 흥선대원군 시대부터 한일 병합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다룹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와 쇄국 정책
- 서양 열강의 침략 시도와 병인양요, 신미양요
- 개화 정책 추진과 위정척사 운동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을미개혁
- 대한제국 수립과 광무개혁
-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한일병합
서양 열강의 접근과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
서양 열강은 청나라와 일본이 문호를 개방한 후 조선에도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적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조선은 세도정치로 사회가 혼란하고 외세의 통상 요구가 거세지는 상황에서 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며 개혁 정치를 실시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력을 축출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했으며, 비변사를 축소하고 의정부와 군부의 기능을 부활시켰습니다. 또한, 군사력을 강화하고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비했습니다.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경복궁을 중건했지만, 무리한 공사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양전 사업과 호포제를 실시하고 사창제를 시행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양반 세력의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병인박해, 병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흥선대원군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제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천주교 금지 여론이 높아지자 병인박해를 일으켜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습니다. 이에 프랑스는 병인양요를 일으켜 강화도를 점령했지만, 양헌수 부대의 활약으로 패퇴했습니다. 이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평양에 들어왔다가 평양 군민에 의해 불태워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신미양요를 일으켜 강화도를 침략했지만, 조선의 저항에 부딪혀 물러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개항을 둘러싼 움직임: 아편전쟁, 양무운동, 메이지 유신
19세기 영국은 아편 전쟁을 일으켜 청나라를 굴복시키고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청나라는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양무운동을 전개했지만, 근본적인 제도 개혁에는 실패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근대 국가로 발전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외척 민씨 세력이 득세하고 문호 개방론이 대두되었습니다. 일본은 정한론을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하려 했고,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에 개항을 강요했습니다.
강화도 조약과 불평등 조약 체결
조선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 주장을 차단하고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이후 조일 수호 조규 부록과 조일 무역 규칙을 체결하여 일본인의 개항장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경제적 침탈을 강화했습니다. 1883년 조일 통상 장정을 맺어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를 부과했지만, 일본 상인의 내지 무역을 허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과 열강과의 수교
조선은 일본에 이어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확인받고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적극 주선했습니다. 김홍집은 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조선 책략을 들여왔고, 이를 통해 미국과 수교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강화도 조약과 달리 거중 조정과 관세 부과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 조항이 담겨 있어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영국, 독일, 러시아 등 여러 나라와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지만, 대부분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개화파의 형성, 분열, 그리고 개화 정책 추진
조선에서는 외국의 통상 요구를 배척하는 기조가 강했지만, 일본과 중국이 서양의 문호를 개방하자 일부에서는 조선도 문호를 개방하고 통상을 하자는 통상 개화론이 대두되면서 개화파가 형성되었습니다. 개화파는 개화 속도와 방법, 청나라에 대한 정책 등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분열되었습니다. 정부는 통리 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개화 정책을 총괄하게 하고, 별기군을 창설했습니다. 또한, 각국의 해외 시찰단을 파견하여 서양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고 개화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
조선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자 유생들은 서양 문물의 수용을 거부하고 성리학적 사회 질서를 지키기 위한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860년대에는 서양의 침략 행위에 맞서 척화 주전론을 주장하며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지지했습니다. 1870년대에는 개항 반대 운동으로 바뀌었고,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발하며 외양일체론을 내세웠습니다. 1880년대에는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며 영남 만인소를 올리는 등 개화 반대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890년대에는 항일 의병 운동을 전개하며 일본에 맞서 싸웠습니다.
임오군란과 청나라의 내정 간섭
개화 정책 추진으로 정부의 재정 지출이 늘어나고 일본의 경제 침탈이 심화되면서 서민 생활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식 군인들이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임오군란을 일으켰습니다. 구식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민씨 세력을 공격했습니다. 일본은 조선 내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군대 파견의 움직임을 보였고,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난을 진압한 후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하고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강화했습니다.
갑신정변과 개화당의 몰락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젊은 양반 관료들은 청나라의 내정 간섭과 정부의 사대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했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지원을 약속받고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화당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개화당 정부는 근대 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개혁을 단행하고 14개조 개혁 정강을 마련했지만,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했습니다. 갑신정변으로 개화 세력이 도태되고 친청 보수 세력이 장기 집권하는 등 조선 내 청나라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의 정세와 열강의 이권 침탈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자 고종은 러시아와 접촉하여 러시아와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러시아와 비밀 협약을 추진했습니다. 러시아와 대립하던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고 해군 기지를 건설했습니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 견제를 위하여 청나라와 제휴하고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켰습니다. 이후 청나라의 이홍장의 중재로 러시아가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자 영국군은 거문도에서 철수했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으로 얽힌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동학의 창시, 교세 확장, 그리고 교조 신원 운동
1860년 최제우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의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는 동학을 창시했습니다. 동학은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여성과 어린아이를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했습니다. 이후 동학은 현실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던 농민들에게 큰 지지를 얻으며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동학의 교세가 점점 커지자 조선 정부는 동학을 사악한 종교와 사상으로 규정하여 탄압했습니다. 동학 교도들은 동학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회복하기 위해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습니다.
고부 농민 봉기와 제1차 동학 농민 운동
조선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와 국가 재정의 궁핍을 세금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을 동원하여 강제로 만석보를 축조하고 물세를 걷는 등 수탈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농민들은 전봉준을 필두로 고부 농민 봉기를 일으켜 관아를 습격하고 불법으로 거둔 양곡을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후 정부는 조병갑을 파면하고 새로운 고부 군수를 임명했지만,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 농민 봉기 주모자를 색출하여 농민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약탈하자 반봉건 성격의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이 발발했습니다.
전주 화약과 집강소 설치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라도 주요 지역의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위기 의식을 느낀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고, 일본 역시 텐진 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파병하여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의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그러자 외세의 개입을 원치 않았던 농민군은 청일 군대의 철수와 농민군의 신변 보호, 폐정 개혁 등을 조건으로 관군과 전주 화약을 맺어 전주성을 정부에 돌려주었습니다. 이후 조선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내정 개혁을 추진했고, 농민군은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 개혁안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청일 전쟁 발발과 제2차 동학 농민 운동
동학 농민군과 전주 화약을 맺은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군의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병력 철수를 거부한 것도 모자라 청나라에게 조선의 내정을 함께 개혁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하지만 이일을 거절하자 일본군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뒤 친일 개화파 정권을 앞세워 서울에 군국 기무처를 설치하고 아산만에 주둔에 있던 청군을 기습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농민군은 일본군 타도하는 반침략 기치를 내걸고 2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와 갑오개혁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과 정부 연합군에게 패배했습니다. 결국 1894년 12월 전봉준, 손화중, 김계남 등의 농민군 지도부가 체포되고 1895년 남은 농민군이 진압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층이 중심이 되어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를 비롯한 봉건적 질서를 바꾸려 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외세 침략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운 반봉건 반외세 성격의 민족 운동이었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을 거치며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조선 정부는 교정청 설치하고 동학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반영하여 독자적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제1차 갑오개혁과 제2차 갑오개혁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킨 후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1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고 조선 정부의 개혁을 강요했습니다. 새 정권은 군국 기무처를 설치하고 갑신정변의 개혁안과 동학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수용하여 1894년 제1차 갑오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청일 전쟁 중 추진한 제1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적은 상황에서 자주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면에서 다양한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청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의 개혁에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뒤 군국 기무처를 폐지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와 서광범 귀국시켜 김홍집, 박영효 열림 내각을 구성한 후 2차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을미사변과 을미개혁
삼국간섭 이후 국내 정치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악화되고 러시아 세력이 확장되자 조선 정부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박영효가 명성황후 폐위 음모 혐의로 일본에 망명하고 이범진, 이완용 등 미국 및 러시아와 가까운 인물이 등용되며 제3차 김홍집 내각이 구성되었습니다. 그러자 위기 의식을 느낀 일본은 명성황후가 친러 정책을 주도하였다 판단하여 경복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을미사변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자 김홍집 등의 친일 세력을 중심으로 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고 일본의 간섭에 제3차 개혁인 을미개혁이 실시되었습니다.
아관파천과 독립협회의 활동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실시되자 유생들은 단발에 반발하는 상소를 올렸고, 전국에서는 유생과 농민이 중심이 되어 을미의병을 일으켰습니다. 한편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은 일본의 침략이 거세지자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갑오, 을미개혁을 주도한 개화파 인사들이 제거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여 개혁이 중단되고 단발령 역시 해제되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자주 독립과 근대적 민권 사상을 전파하고자 했습니다.
독립협회의 활동과 해산
독립협회는 자주 국권 운동의 일환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고 독립문을 건립했으며, 만민공동회 등 사회 각계 각층이 참여한 대중집회를 개최하여 근대적 지식과 국권 민권 사상을 소개했습니다. 또한, 열강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는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하고 자유민권 운동을 통해 국민 기본권 확보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독립협회는 자강 개혁 운동의 일환으로 의회 설립 운동을 전개하여 중추원 관제를 개편하고 의회 기능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보수 세력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는 모함을 하였고, 고종은 독립협회 해산과 독립협회 주요 간부의 체포를 명령했습니다.
대한제국 선포와 광무개혁
아관파천 이후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자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증가했습니다. 이에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 생활을 마치고 덕수궁으로 환궁했습니다. 고종이 돌아오자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자주독립 국가임을 알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이에 고종은 1897년 8월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10월에는 환구단에서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선포했습니다. 대한제국은 만국 공법에 기초한 자주 국가임을 국내외에 알리고 복고주의 성격의 광무개혁을 진행했습니다.
광무개혁의 내용과 한계
광무개혁은 구본신참의 원칙을 앞세워 점진적 개혁을 시행했으며, 정치, 군사, 경제,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정치면에서는 전제 황권을 강화하며 이군주제와 의회 설립을 추구하던 독립협회의 정치개혁 운동을 탄압했습니다. 군사면에서는 한성 경비를 위한 시위대를 재설치하고 중앙 군인 친위대를 확대하였으며 지방의 진위대를 증가하였습니다. 경제면에서는 황실 기구인 국내부를 중심으로 정책을 추진해 나갔고 화폐 주조 기관인 전환국 통해 조선 말기 화폐인 백동화를 대량으로 주조하여 근대화 정책의 재원으로 삼았습니다. 교육 면에서는 상공학교, 농림학교 등 실업 기술교육 기관을 세우고 근대 산업기술 습득을 위해 외국의 유학생을 파견했습니다.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삼국간섭 이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지속적인 남하정책을 벌리는 러시아와 한반도 및 대륙 진출 정책을 버리는 일본의 대립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일본과의 군사동맹으로 1902년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고종황제가 1904년 1월 대한제국의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1904년 2월 인천의 재물포 오등 반도의 순에서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격침시켰습니다. 러시아를 공격한 일본은 서울을 점령한 뒤 1904년 2월 대한제국과 한일 의정서를 체결했습니다.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과정
일본은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사적 요지와 시설을 점령하고 정치적 간선 및 외교 행사에 관여하였고 일본는 러일 전쟁에서의 전세가 유리해지는 8월 한국의 고문을 추천한다는 내용에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이후 일본은 미국과 가스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여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권리를 인정하고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1905년 8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어 영국의 인도 지배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서로 승인했습니다. 1905년 9월에는 일본의 승리로 러일 전쟁을 마무리하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멸망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에 의해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하며 통감부를 설치했습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내정에 깊숙히 개입하며 지배권을 강화하였고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이후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서양 열강의 외면으로 성과를 얻지 못하였고 일본은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문제삼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황태자 순종을 즉위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