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요약
이 비디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는 불교적 가르침을 탐구합니다.
-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라는 개념에 대한 집착은 괴로움의 근원이며, '무아'를 깨달음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 '본래면목'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영원하고 청정한 본성으로, 언어와 개념을 초월하여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 일상생활에서 마음챙김을 실천하고, 모든 존재와의 연결을 느끼며, 매 순간 깨어있는 것이 무아를 경험하는 방법입니다.
1부 집착하는 나를 발견하다
우리는 자신을 이름, 직업, 역할 등으로 정의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변하기 전의 '나'는 누구였을까요? 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이 혼란과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며, 좋아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도 변합니다. 금강경에서는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모든 것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부처님은 인연 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오온(색, 수, 상, 행, 식)의 흐름만이 존재할 뿐, 영원불변하는 '나'는 없다고 설명합니다. 번뇌를 느낄 때와 느끼지 않을 때 모두 '나'라면, 진짜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나'라는 느낌은 부모, 환경, 지식, 경험 등 수많은 조건들이 만나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조건이 변하면 '나'라는 느낌도 변합니다. 재산이나 지위와 같은 소유물로 자신을 정의하지만, 그것들을 잃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무언가'는 무엇일까요? 몸과 마음은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으므로, '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 장난감에 집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듯이,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집니다. 이러한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이며, 변하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느낍니다. '나'라는 것이 실체가 없다면 무엇을 보호하고 방어해야 할까요? 모든 것이 소중하지만, '내 것'이라고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아의 지혜는 '나'를 지키느라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비난받아도 흔들리지 않고 칭찬받아도 교만해지지 않는 이유는 '나'라는 것이 원래 실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2부 본래면목을 찾아서
부처님은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집착하는 방식의 영원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보고 느끼는 작용은 분명히 일어나지만, 그 뒤에 별도의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 그 자체가 일어날 뿐입니다. 호흡을 누가 하고 있는지, 생각을 누가 만들어내는지 질문하며, 이러한 작용들이 그냥 일어날 뿐 주인이 없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조건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며, 그 과정에서 '나'라는 주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나'는 없고 모든 것은 변하며, 실체라고 집착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나'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을 때 진정한 자유와 가벼움을 경험할 수 있으며,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에너지를 쓸 수 있습니다. 강물은 산에서 시작되어 바다로 가지만, 그 어느 순간도 물은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존재도 부모, 태양, 공기, 땅 등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생각 또한 스승, 책, 경험 등 수많은 조건에 의해 일어납니다. '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우주 전체와 연결된 하나의 현상입니다. 인드라망처럼 모든 것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연결되어 있으며, '나'를 발견하려면 우주 전체를 봐야 합니다. 일상에서 무아를 경험하려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나'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알아차리고, 모든 존재와의 연결을 느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신은 모든 것이고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입니다. 당신은 우주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우주 전체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과정입니다.
당신 부모님의 부모님을 만나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분들의 부모님은 어떤 모습이셨을까요? 거슬러 올라가면 10대 조상, 100대 조상, 천대 조상이 있습니다. 그분들 중 단 한 분이라도 없었다면 지금의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 그 모든 조상이 태어나기 전 당신의 본래 면목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선종의 역대 조사들은 이 질문을 화두로 삼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직 만나기 전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을 보라고.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질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근원, 본질, 진정한 정체성을 직접 체험하라는 간절한 가르침입니다. 중국 당나라 시대 한 젊은 수행자가 해능 선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수년간 경전을 공부하고 계율을 지키며 열심히 수행했지만 여전히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했습니다. 해능 선사께 저를 올리고 물었습니다. 큰스님, 저는 오랫동안 불법을 배웠지만 아직도 번뇌가 끊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까? 해능 선사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번뇌를 없애려 하지 말고 번뇌가 일어나기 전 너의 본래 면목을 보아라. 젊은 수행자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본래 면목이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해능 선사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기 전 아직 이름도 없고 몸도 없던 그때 너는 무엇이었느냐? 젊은 수행자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이 화두를 붙들고 밤낮으로 참구했습니다. 본래 면목 본래면목 태어나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을까? 처음에는 머리로 생각하려 했습니다. 태어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면 영혼 같은 것이 있었을까? 업식이 있었을까? 하지만 모든 생각은 답이 아니었습니다. 생각으로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계속 물었습니다. 걸을 때도 앉을 때도 밥 먹을 때도 쉴 때도 본래 면목 본래면목 석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새벽 그는 산길를 걷다가 우연히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바닥에 쓰러진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습니다. 생각도 멈추고 의문도 멈추고 찾는 자도 찾는 대상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그는 알았습니다. 태어나기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없이 여기 있던 그것을 이름 붙일 수 없고 형태도 없고 오고감도 없는 본래부터 청정한 본성을 그는 해능 선사를 찾아가 저를 올렸습니다.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이제 본래 면목을 보았느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보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본래부터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해능 선사께서 미소지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내가 찾던 것은 멀리 있지 않았다. 다만 내가 밖으로만 찾았을 뿐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통차를 전합니다.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찾아 헤니다. 행복을 찾고 성공을 찾고 사랑을 찾고 의미를 찾습니다. 하지만 정작 찾아야 할 것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여기 지금 당신 안에 있습니다. 본래 면목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당신의 본래 본성입니다. 몸이 변해도 변하지 않고 생각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영원한 진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말로 설명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본래면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래 면목은 언어와 개념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경험해야 하는 것이지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능선의 스승인 홍인 대사께서 제자들에게 개송을 지어오라고 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수제자인 신수는 이렇게 썼습니다.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대와 같으니 때때로 부지런히 닿고 털어서 티끌이 끼지 않게 하라. 이것은 점진적인 수행, 끊임없는 정진을 강조하는 계송입니다. 번뇌를 닦아내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수행을 쌓아가면 언젠가 깨달음에 이른다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해능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를 몰랐지만 누군가에게 부탁해 이렇게 쓰게 했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 밝은 거울도 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일겠는가? 이 이 계송은 완전히 다른 차원을 가르킵니다. 닦을 마음도 깨끗해져야 할 거울도 없애야 할 티끌도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면목은 처음부터 완전하고 청정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홍인 대사께서는 해능의 계송을 보시고 그에게 조용히 법을 전하셨습니다. 육조의 탄생이었습니다. 해능 선사의 가르침은 도노, 즉 단박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깨달음은 시간을 두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천년 동안 어둠이 쌓여 있었다 해도 촛불 하나만 켜면 단박에 밝아지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량 동안 무명에 가려져 있었다 해도 본래 면목을 보는 순간 모든 어둠이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본래 면목을 볼 수 있습니까? 역설적이게도 보려고 S는 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는 자가 바로 본래 면목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자기 자신을 직접 볼 수 없듯이 본래 면목은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수행자가 조주 선사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걔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선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무. 이 한마디 무는 선불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걔에게 불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닌 물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혼란스럽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걔에게도 당연히 불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무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무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있고 없음을 넘어선 것. 언어와 개념을 초월한 것, 직접 체험해야 하는 것을 가르킵니다. 수행자는 이 무자를 화두로 삼아 참구해야 합니다. 무무 생각으로 풀려고 하지 말고 온몸으로 무가 되어야 합니다. 먹을 때도 무, 걸을 때도 무, 잘 때도 무. 이렇게 무자와 하나가 될 때 어느 순간 의단이 타파되며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임재선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먼저 견해를 바르게 해야 한다. 견해가 바르면 생사를 벗어나도 가고 머물러도 자유롭다. 그렇다면 어떻게 견해를 바르게 합니까? 임재 선사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눈앞에서 또렷하게 듣고 있는 이 한 사람 형상도 없고 근본도 없으며 의지할 곳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는 이 활발한 사람. 이것이 바로 부처다. 당신이 지금 이 말을 듣고 있습니다. 듣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귀입니까? 아니면 의식입니까? 귀는 단지 소리의 진동을 받아들이는 기관일 뿐입니다. 의식도 조건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귀도 아니고 의식도 아닌 정작 듣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직접 보라는 것이 선종의 가르침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생각으로 잡을 수 없는 하지만 지금 여기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는 이것 이것이 바로 당신의 본래 면목입니다. 덕산 선사께서는 젊은 시절 금강경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유명했고 자신만만했습니다. 어느 날 남방의 직지인 견성을 가르치는 선승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바로가 보여 주면 본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금강경 주석서를지고 난방으로 가서 그들의 헛된 주장을 논파하려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한 노파가 파는 떡집에 들렀습니다. 떡을 사 먹으려 하자 노파가 물었습니다. 스님, 무엇을 그리 많이지고 가십니까? 덕산이 대답했습니다. 금강경 주석서입니다. 노파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금강경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과거 신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으로 떡을 드시려 합니까? 덕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평생 금강경을 공부했지만 그 순간 자신이 정작 금강경의 진위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과거 마음도 현재 마음도 미래 마음도 잡을 수 없다면 정작 지금 생각하고 의심하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덕사는 자신의 오만을 버리고 용담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하루는 밤늦게까지 용담 선사께 법문을 들었습니다. 시간이 깊어지자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밤이 깊었으니 돌아가 쉬어라. 덕산이 밖으로 나가려다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밖이 너무 어둡습니다. 용담 선사께서 촛불을 켜서 건네 주셨습니다. 덕산이 촛불을 받으려는 순간 선사께서 훅하고 불어 촛불을 껐습니다. 그 순간 치흙 같은 어둠 속에서 덕사는 활짝 깨달았습니다. 다음날 덕사는 자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금강경 주석서를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깊은 현묘한 이치를 안다 해도 그것은 허공에 털럭하나 놓은 것만도 못하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 해도 그것은 큰 바다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만도 못하다. 덕산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촛불이 꺼진 순간 모든 외부의 빛이 사라졌습니다. 볼 수 있는 모든 대상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아는 것은 있었습니다. 어둡다는 것을 아는 것,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 외부에 빛이 없어도 여전히 밝게 깨어 있는 이것이 바로 본래 면목입니다. 우리는 항상 외부를 향합니다. 지식을 쌓고 경험을 모으고 성취를 이루려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촛불과 같습니다. 언젠가는 꺼질 것입니다. 몸도 늙고 기억도 흐려지고 모든 성취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찾아야 할 본래 면목입니다. 백장 선사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은 나에게 무엇을 구하는가? 지금 내 앞에서 또렷하게 듣고 있는 그대들. 그 그대가 바로 부처인데 무엇을 더 구하는가? 부처는 멀리 있지 않다. 부처는 과거의 석가모니만을 가르키는 말이 아니다. 지금이 순간 듣고 보고 생각하는 이것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부처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의심했습니다. 저는 번뇌 많고 무지한 범부인데 어떻게 붙여일 수 있습니까? 백장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다. 다만 미혹하면 중생이요 깨달으면 부처다. 미혹과 깨달음도 실제로는 둘이 아니다. 본래 면목을 보면 미혹도 깨달음도 모두 꿈과 같다. 이 이 말씀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부족한 존재로 봅니다. 더 나아져야 하고 더 깨끗해져야 하고 완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래 면목의 관점에서 보면 처음부터 완전했습니다. 다만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부족한 존재로 여기는 망상이 있을 뿐입니다. 마치 구름이 해를 가렸다고 해서 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구름은 와도 해는 그대로 있고 구름이 가도 해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의 번뇌도 마찬가지입니다. 번뇌가 일어나도 본래면목은 더럽혀지지 않고 번뇌가 사라져도 본래면목이 더 밝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청정하고 완전합니다. 그렇다면 수행은 왜 해야 합니까? 본래 완전하다면 그냥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해 선사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수행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거울이 먼지로 덮여 있으면 닦아야 하듯이 번뇌의 구름이 본래면목을 가리고 있으면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거울의 본질은 닦기 전에도 닦은 후에도 변하지 않는다. 다만 먼지가 거치면 원래의 밝음이 드러날 뿐이다. 운문 선사께 한 수행자가 물었습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운문 선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말은 똥막대기니라. 이 이 답은 충격적입니다. 부처를 가장 더럽고 쓸모 없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왜 이런 답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수행자가 부처를 멀리 있는 신성한 존재로 여기는 관념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부처는 높고 거룩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 지금 일상의 가장 평범한 곳에 있습니다. 먹을 때도 붙여요. 걸을 때도 부처 화장실에 갈 때도 부처입니다. 본래 면목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신비한 경험이나 초능력이 아닙니다. 그냥 지금 여기 이 평범한 일상 그 자체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조주 선사께 한 수행자가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이것은 달리 말하면 불법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조주 선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뜰 앞에 잔나무니라. 뜰 앞에 잔나무 그냥 거기서 있는 평범한 나무. 이것이 불법의 핵심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잔나무는 그냥 잔나무로서 있습니다. 버드나무가 되려하지도 않고 소나무가 되려하지도 않습니다. 더 크려고 애쓰지도 않고 작다고 자책하지도 않습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막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겨울이 오면 잎을 떨굽니다. 아무런 저항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존재합니다. 이것이 본래면목의 모습입니다. 무언가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미 완전합니다.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지금이 순간을 살아갑니다. 우리 인간만이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려고 애습니다. 더 좋은 사람, 더 성공한 사람, 더 깨달은 사람. 하지만 그렇게 애쓰는 것 자체가 본래 면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잔나무는 그냥 잔나무입니다. 당신도 그냥 당신입니다.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완전합니다. 아마케양 선사와 마조도일 선사의 유명한 이라가 있습니다. 젊은 마조가 열심히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막 선사께서 다가와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조가 대답했습니다.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남학선께서 기화장 하나를 주어 옆에서 갈기 시작하셨습니다. 마조가 이상하게 여겨 물었습니다. 스승님, 무엇을 하십니까? 남막 선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거울을 만들고 있다. 마조가 말했습니다. 기화장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남막선사께서 되무르셨습니다. 기화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한다고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마조는 깊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남학 선사께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칠 것인가 소를 칠 것인가? 좌선은 앉는 것이 아니요 부처도 형상이 아니다. 형상 없는 법에 집착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라. 내가 자선하는 부처가 되려 한다면 이것은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내가 앉는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도리에 이르지 못한다. 이 가르침은 무엇을 말합니까? 본래 면목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선도 염불도 독경도 모두 방편일 뿐입니다. 방편에 집착하면 오히려 본래 면목을 놓칩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면 달을 보지 못하듯이 그렇다면 수행은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손가락이 없으면 달을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손가락이 달은 아닙니다. 수행은 필요하지만 수행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본래 면목을 깨닫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그리고 일단 깨달으면 모든 행위가 수행이 됩니다. 밥 먹는 것도 걷는 것도 자는 것도 모두 부처의 행입니다. 방거사라는 제가 거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깊이 깨달은 사람이었지만 출가하지 않고 평범한 가정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딸 영조가 물었습니다. 아버지,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방거사가 대답했습니다. 어렵도다. 어렵도다. 마른 나무에 기름을 바르는 것 같구나. 그러자 부인이 말했습니다. 쉽도다. 쉽도다. 플립 위에 이슬처럼 쉽구나. 영조가 말했습니다.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는 것입니다. 세 사람의 답이 모두 다릅니다. 하지만 모두 맞는 말입니다. 본래 면목을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습관과 개념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본래 면목을 찾는 것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깨달으면 그것은 어렵지도 쉽지도 않습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다만 이제는 나라는 집착 없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입니다. 해능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티끌이 일겠는가? 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본래면목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없습니다. 생각도 감정도 심지어 나라는 것조차 없습니다. 텅빈 허공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텅빈은 죽은 공허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생생한 비어 있음입니다. 그 비어 있음 속에서 모든 것이 자유롭게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기쁨이 와도 그것에 물들지 않고 슬픔이 와도 그것에 빠지지 않습니다. 마치 거울이 모든 것을 비추지만 아무것도 붙잡지 않는 것처럼 한 수행자가 위산 선사께 물었습니다. 백천만 가지 물건이 한 가지로 돌아간다면 그 한 가지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위산 선사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삼배옷 한벌을 지었는데 무게가 7근이었다. 이 대답은 전혀 질문과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수행자는 형의 상악적 질문을 했는데 선사는 옷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선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이 돌아가는 그 한 가지를 어디서 찾습니까?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 지금이 구체적인 삶 속에 있습니다. 청주의 삼배옷, 칠근의 무게 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지금이 순간에 생생한 경험. 이것이 본래면목입니다. 지금이 순간 당신은 무엇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의자에 앉은 느낌, 호흡하는 느낌, 주변의 소리. 이 이 모든 것이 본래면목의 작용입니다. 특별한 것을 찾지 마십시오. 지금 여기 이 평범한 순간 속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석두희천 선사께서 쓰신 참동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밝은 가운데 어둠이 있으니 어둠으로서 대하지 말 것이며 어두운 가운데 밝음이 있으니 밝음으로서 만나지 말라. 밝음과 어둠이 서로 의지하니 마치 앞발과 뒷발이 나아감과 같도다. 이 말씀은 본래 면목의 본질을 가르킵니다. 본래 면목은 밝음도 아니고 어둠도 아닙니다. 밝음과 어둠을 넘어서 있지만 동시에 밝음과 어둠을 모두 포함합니다. 과쁨, 오음과 그름이 모든 대립을 넘어서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넓은 마음. 이것이 본래면목의 모습입니다. 선종에서는 이것을 깨닫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화두 참구, 묵조선, 간화선, 염불선. 방법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생각을 멈추고 개념을 벗어나 본래 면목을 직접 체험하는 것. 임재 선사의 할, 덕산 선사의 방 이런 것들도 모두 제자들의 분별심을 타파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 생각이 끊어지는 그 순간 본래 면목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일상 속에서 본래 면목을 찾는 것이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수행법이 아니라 지금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 있는 것. 설거지를 할 때는 설거지에 온전히 집중하고 걸을 때는 걷는 것에 온전히 깨어 있고 대화할 때는 상대의 말에 온전히 귀기울이는 것. 이렇게 매순간 온전히 현존할 때 본래 면목과 하나가 됩니다. 왜냐하면 본래 면목은 항상 지금 여기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이 순간 여기가 아닌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이곳. 이것이 본래면목이 머무는 곳입니다. 선사들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상심 시도 평상심이 바로도다. 특별한 경지를 구하지 말고 평범한 마음 그대로가 돌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평상심은 번뇌로 가득한 우리의 일상적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집착도 거부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자고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우는 자연스러운 마음. 다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평상심이고 이것이 본래면목입니다. 지금이 순간 당신의 본래 면목은 어디에 있습니까?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지금이 글을 읽고 있는 이것, 생각하고 있는 이것, 의심하고 있는 이것 바로 이것이 본래 면목입니다. 다만 그것을 대상화하려는 순간 놓쳐 버립니다. 왜냐하면 보는 자가 바로 본래 면목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듯이 본래 면목은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순간 분명히 여기 있습니다. 살아 있고 깨어 있고 생생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십시오. 의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이미 완전합니다. 다만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그 모음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었고 찾을 것도 없었고 닦을 것도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완전했고 지금도 완전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완전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해능 선사께서 깨달으신 진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본래 면목입니다.
3부 무아, 자유로운 삶으로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됩니다. 출근 준비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본래 면목을 깨달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깨달음은 산속 동굴에서만 유효한 것일까요? 아니면 이 복잡하고 분주한 세상 속에서도 살아 숨쉬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야말로 자기의 의지처이니 다른 누가 의지처가 되겠는가? 자기를 잘 조복한 사람은 얻기 어려운 의지처를 얻느니라. 이 이 말씀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본래 면목을 깨달았다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의지처를 찾았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외부의 것에 의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재산에 의지하지 않아도 명예에 의지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인정에 의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가장 확실한 의지처가 자기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상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출가하지 않고 세상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왜 속세에서 장사를 합니까? 산속에 들어가 수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상인이 대답했습니다. 산에 들어가면 산이 절이 되고 시장에 나와도 시장이 절이 됩니다. 본래 면목을 알면 어디든 청정도량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깨달음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그는 장사를 할 때도 정직했고 손님을 대할 때도 자비로웠습니다. 이익을 추구하되 탐욕스럽지 않았고 손해를 보아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득과 손실도 모두 인연 따라오고 가는 것일 뿐. 진정한 나는 그 무엇으로도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는 것을. 어느 날 큰 화제로 그의 가게가 전소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쌓아온 재산이 하루 아침에 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슬퍼하고 좌절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2년 따라 모였던 것이 2년 따라 흩어졌을 뿐입니다. 본래 내 것이었던 적도 없고 지금 잃어버린 것도 없습니다. 다만 또 다른 인연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작은 장사부터 시작했습니다. 원망도 없고 조급함도 없이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지혜가 일상에서 펼쳐지는 모습입니다. 나라는 집착이 없으니 이를 것도 없습니다. 내 것이라는 집착이 없으니 빼앗길 것도 없습니다. 다만 지금이 순간 주어진 인연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아를 깨달으면 아무것도 소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도 소중한 것을 잃어도 아무렇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냉정하고 무감각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소유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랑. 내 필요를 채우려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 집착이 없으니 질투도 없고 소유욕도 없고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심도 없습니다. 다만 함께 있는 순간을 온전히 감사하고 떠나갈 때는 아름답게 보내 줄 수 있습니다. 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깊은 수행을 한 사람이었지만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사랑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습니다. 이 이 아이는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잠시 내게 맡겨진 인연일 뿐이라는 것을 아이가 자라면서 그녀는 최선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성장하도록 도왔고 자신의 기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 멀리 떠날 때 그녀는 슬펐지만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아이가 떠나가도 슬프지 않습니까?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슬픔은 느낍니다. 하지만 슬픔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입니다. 그것을 느끼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꽃이 피었다가지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만남과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무아를 깨달은 사람의 삶입니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않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를 강조하셨습니다. 자는 기쁨을 주는 것이고 비는 괴로움을 덜어 주는 것입니다. 무아를 깨달으면 진정한 자비가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나와 남이라는 구분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남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남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됩니다. 하지만 그 고통에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물이 넘치는 것을 보면서도 물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느끼되 그 안에서 길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명확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으니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선사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비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다. 괴로워하는 중생을 볼 때 그 괴로움이 진실이 아님을 안다. 다만 그들이 그것을 모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스스로의 본래 면목을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이 진정한 잡이다. 이 이 말씀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도움은 상대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본래 완전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마치 구름을 걷어내어 해가 드러나도록 돕는 것처럼 일상에서 무아를 실천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출근길 지하철에서 누군가 발을 밟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화가 났을 것입니다. 왜 조심하지 않는 거야? 사과도 안 해. 무례한 사람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