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남의 기대대로 살고 있는가?" 나를 되찾는 자기 발견의 심리학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완벽 해설”의 전체 스크립트입니다. 타임스탬프를 클릭하면 해당 장면부터 영상이 열려요. 다른 영상이 필요하다면 유튜브 스크립트 추출기를 이용하세요.
0:00 열살 무렵에 에밀 싱클레어에게 세상은 두 개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집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두 누나가 있고 사랑과 엄격함이 함께 있는 곳. 벽에는 성경 구절이 걸려 있었고 식사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었으며 식탁에는 저마다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찬송가가 울렸고 잘못을 하면 용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깨끗하게 닦긴 마룻바닥과 잘 정돈된 옷장.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 그 안에서는 옳고 그름이 분명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이미 다 정해져
0:46 있었습니다. 싱클레어는 그 세계의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문을 나서기만 하면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녀들이 부엌에서 속원거리던 무서운 이야기들. 골목 끝에 도살장에서 풍겨오던 냄새, 술에 취에 비틀거리는 사람들, 도둑질과 싸움에 관한 소문들. 그곳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때렸다는 이야기, 어느 집 아들이 잡혀갔다는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오았습니다. 어른들은 그런 이야기를 아이들 앞에서 쉬시했지만 싱클레어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1:33 세상에는 밝고 정갈한 것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요. 게다가이 두 세계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습니다. 어두운 세계는 저 먼 어딘가가 아니라 바로 집 담장 너머에 있었고 때로는 담장 안쪽까지 들어와 있었습니다.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도 아버지가 인상을 찌뿌리며 넘기던 신문 기사 속에도 그 세계는 함께 있었습니다. 한 지붕 아래에 두 세계가 나란히 숨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싱클레어는 그 어두운 세계를 무서워하면서도
2:18 동시에 그쪽으로 자꾸만 끌렸습니다. 밝은 세계는 안전했지만 어쩐지 답답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늘 착한 아이여야 했고 부모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 어두운 세계는 위험했지만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어린 그는 어느 쪽이 진짜 자신에게 가까운지 알 수 없었고 그 사이에서 늘 어정쩡하게서 있었습니다. 싱클레어가 다니던 라틴어 학교에는 여러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프란츠 크로머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재단사의 아들이었고 13살쯤으로
3:04 싱클레어보다 세 살 가량 위었으며 벌써부터 어른 흉내를 내며 거칠게 굴던 아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술꾼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아이들은 그를 무서워하면서도 은근히 그 무리에 끼고 싶어 했습니다. 크로머 곁에 있으면 자신도 조금은 강해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오후 싱클레어는 몇몇 아이들과 함께 감가의 다리 근처에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그 무리에 크로머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가 얼마나 대담한지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는 어른들 몰래 담배를 피워봤다고 했고 누구는 밤에 혼자 묘지 근처를
3:50 지나간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야기가 오갈수록 아이들의 무용담은 점점 커졌습니다. 싱클레어는 그 자리에서 좁아심을 느꼈습니다. 자기만 아무것도 아닌 아이로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반듯한 집안의 얌전한 아들 규칙을 어겨 본 적 없는 아이. 평소에는 그 자리가 편안했지만이 무리 안에서는 그것이 곧 시시한 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아이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를 생각하자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습니다. 물래방학간 옆 과수원에서 친구와 함께 자루가 가득찰만큼 사과를 훔친 적이
4:36 있다고 말해 버린 것입니다. 완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는 사과 하나 훔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이야기는 마치 정말 있었던 일처럼 술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담을 넘었는지,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까지 그는 그럴 듯하게 덧붙였습니다. 아이들은 놀라워하며 그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 짧은 순간 싱클레어는 우줄한 기분을 맛보았습니다. 겁많고 착하기만 한 아이가 아니라이 무리에 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가 원했던 건 사실 그것뿐이었습니다.
5:22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그 시선 하나를 바꾸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하나 둘 흩어진 뒤로머가 싱클레어를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태어난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 과수원 주인이 누구인지 자신은 잘 알고 있다고. 요즘 도둑 맞은 사과 때문에 주인이 화가 잔뜩 나했다고. 그 주인에게 방금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싱클레어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습니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조금 전 아이들 앞에서 얻었던 그 잠깐의 인정이 모두
6:07 사라지고 거짓말쟁이라는 더 나쁜 이름이 붙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침묵이 곧 인정이 되었고 그 순간부터 그의 거짓말은 크로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크로머가 요구한 것은이 마르크였습니다. 어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엑수였지만 어린 싱클레어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그는 적음통을 털어보았지만 그 안에든 것은 예순 다섯 페니이가 전부였습니다. 그것마저 고스란이 건냈는데도 크로머는 어림도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싱클레어는 신부름을 하고 받은 잔돈을
6:55 몰래 챙겼고 그러고도 모자하자 결국 집안의 도네까지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부엌 선반 위에 놓여 있던 동전을 집어드는 순간 손끝이 떨렸습니다. 훔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그는 정말로 도둑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의 거짓말은 아무것도 훔치지 않은 아이의 허세였는데 그것을 덮는 동안 그는 진짜로 훔치는 아이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돈을 건낸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크로먼은 이제 언제든 휘파람 소리 하나로 그를 불러냈습니다. 그 소리가 들리면 싱클레어는 밥을 먹다가도 숙제를 하다가도 아무 핑계나
7:41 대고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크로머는 신부름을 시켰고 아이들 앞에서 그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었으며 별것 아닌 일로 트집을 잡아 위협했습니다. 어떤 날은 아무 요구도 하지 않고 그저 곁에 세워둔 채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언제 무엇을 요구할지 알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버리였습니다. 싱클레어에게 그 휘파람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소리가 되었고 나중에는 비슷한 소리만 들어도 온몸이 굳어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어머니는 다정했고 누나들은 평온했으며
8:28 아버지는 여전히 반듯했습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이제 그 안에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식탁에 앉아 함께 기도를 올리면서도 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누나들이 웃으며 건내는 말에도 예전처럼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밝은 세계의 문턱을 넘어 들어오긴 했지만 마음은 이미 바깥에 남겨 두고 온 것 같았습니다. 가족들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고 그 사실이 그를 더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저녁 젖은 신발을 신고 들어온 그를 아버지가 가볍게 나무란 일이 있었습니다.
9:15 평소 같으면 부끄러웠을 꾸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싱클레어의 마음에는 전혀 다른 감정이 스쳤습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들이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겨우 신발따위를 나무라고 있다는 것. 그 순간 그는 아버지보다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비뚤어진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이 곧바로 그를 더 깊은 부끄러움 속으로 밀어넣었습니다. 밤이 되면 그는 잠들지 못했습니다. 악몽을 꾸었고 자다가 소리를 지르며
10:01 깨어나기도 했습니다. 몸이 아파씩 알아눕는 일도 잦아졌습니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이 말을 짚었지만 싱클레어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순간 자신이 그 밝은 세계에서 완전히 밀려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아무에게도 기대지 못한 채 혼자서 그 무게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돌아보면이 모든 일의 시작은 아주 사소했습니다. 훔치지도 않은 사과를 훔쳤다고 말한 그 한마디. 그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 앞에서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10:46 아이들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을 조금 더 그럴 듯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어세가 그를 어디까지 데려왔는지 이제 싱클레어 자신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남들의 시선에 맞춰 자신을 꾸며내려던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그 시선 안에 가두어 버린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새학기가 시작될 무렵 학교에 소식 하나가 전해집니다. 다른 도시에서 한 학생이 전화을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이 마을로 이사를 왔다는 것. 그리고 나이에 비해 어딘가 어른스러운 데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이들 사이에 먼저
11:33 돌았습니다. 싱클레어보다 몇 살 위어서 상급반으로 들어온 그 학생은 첫날부터 눈에 띄었습니다. 아이들 무리에 섞이려 애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겉돌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자기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인데도 어쩐지 그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데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습니다. 데미안에 대한 이야기는 금세 학교 전체에 퍼졌습니다. 집안이 부유하다는 말도 있었고 유대인일지 모른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어떤 아이는 그가 이교도라고 했고 또 어떤 아이는 그 집안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두고 이런저런 말을
12:20 지어냈습니다. 아이들은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그런 시기였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앞에 두면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두지 못하고 어떻게든 이름을 붙이려 합니다. 그 이름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름을 붙이는 사람에게 글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작 대미한 본인은 그런 소문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는 아이들의 무리에 끼려고 애쓰지 않았고 그렇다고 외토리처럼 굴지도 않았습니다. 누가 말을 걸면 정중하게 대답했고 그러고 나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상급반이었기 때문에 싱클레어와 마주칠 일도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복도에서
13:08 스쳐 지나갈 때 싱클레어는 그가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걷고 다른 방식으로서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른을 흉내내는 것과 실제로 어딘가 성숙한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데미아는 후자였습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그의 눈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선생님 앞에서 눈을 내리갈 때에도 데미안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대드는 눈빛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상대가 누구든 있는 그대로 마주본다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싱클레어는 그 눈을 마주칠 때마다 어쩐지 마음속을 들킨 기분이 들어
13:54 먼저 시선을 피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 시간에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배우게 됩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입니다.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에 죽였고 신이 그에게 벌을 내려 이마의 표적을 새겼다는 것. 그 표적 때문에 카인은 세상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지만 아무도 그를 함부로 죽이지는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선생님은이 이야기를 언제나처럼 가르쳤습니다. 카인은 악한 사람이고 그 표적은 죄의 낙인이라고 말입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데미안이 싱클레어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14:41 그리고 조금 전에 배운 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는 그 이야기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어떤 벌이 있길래 벌을 받은 사람이 오히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데미아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애초에 그 표적이라는 것부터가 이마의 도장처럼 찍힌 자국은 아니었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보다는 얼굴과 태도에서 풍겨 나오는 어떤 기운에 가까웠을 거라고 했습니다. 카인이라는 사람은 원래부터 남들과 달랐을 거라고 눈빛에 힘이 있고 두려움이 적고 무리에 기대지 않아도
15:27 되는 사람이었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굳이 무섭게 굴지 않아도 주변을 긴장시킵니다. 사람들은 그런 인간을 만나면 불편해집니다.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견디는 대신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남다른 것은 대단해서가 아니라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그 표는 명예가 아니라 죄의 흔적이라고 말입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뒤집힌 채로 대대로 전해졌고 오랜 세월이 지나자 아무도 그 순서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데미안의 이야기였습니다.
16:14 그는 덧붙였습니다. 세상에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는 강한 사람이 만든 것도 있지만 겁먹은 사람이 자기를 지키려고 만든 것도 있다고 말입니다. 어느 쪽이든 이야기를 만든 사람은 늘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 자리를 정해 둡니다. 싱클레어는 걸음을 멈출 뻔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이야기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지 뒤집어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데미안의 말이 불경하게 느껴져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데미아는 자기 해석이 정답이라고 우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이렇게 볼
17:02 수도 있다는 것뿐이라고 어느 쪽이 맞는지는 각자 생각해 보면 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싱클레어를 설득하려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점이 오히려 오래 남았습니다. 누군가 강하게 밀어붙였다면 밀어낼 수 있었을 텐데 데미아는 그저 문 하나를 열어 보였을 뿐이었고 그 문은 한 번 열린 뒤로 좀처럼 다치지 않았습니다. 헤어질 무렵 데미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인사를 건내고 자기 길로 갔지만 싱클레어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싱클레어의 머릿속에서는 같은 질문이 맴돌았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온 것들은
17:48 정말 내가 스스로 판단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런 줄 알고 있었던 것뿐일까? 열살짜리 아이에게이 질문은 너무 컸습니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크로모와의 일은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돈으로 시작된 요구는 갈수록 늘어났고 나중에는 싱클레어에게 이런저런 신부름을 시키며 자기 발밑에 두는 것 자체를 즐기는 듯했습니다. 처음에는 돈이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사람을 마음대로 부린다는 그 감각이 목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18:33 어느 날에는 싱클레어의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누나를 데리고 나오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 말을들은 순간 싱클레어는 온몸이 열어붙었습니다. 이제이 일은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어 버렸고 그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싱클레어는 자신이 두 사람으로 나뉘어 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집에서는 여전히 착한 아들이었지만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 자기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고 그 혼란은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19:20 더더욱 도움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그무렵 대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넌짓이 물었습니다. 요즘 프란츠 크로머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싱클레어는 펄쩍 뛰며 아무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데미아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데미아는 더 캐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무서워하게 되었다면 그 힘을 그 사람에게 넘겨 준 순간이 어딘가에 있었을 거라고. 크로모가 무서운 사람이라서 무서운게 아니라 무서워하기로 한 순간부터
20:05 무서운 사람이 된 거라고 말입니다. 싱클레어는 그 말이 야속하게 들렸습니다.이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뜨끔했습니다. 처음 그 거짓말을 했을 때도 크로머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했을 때도 결국 매번 선택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으니까요. 가장 아픈 말은 되게 틀린 말이 아니라 이미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해 온 말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 어느 날인가부터 휘파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크로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20:50 어쩌다 길에서 마주쳐도 그는 싱클레어를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지나갔습니다. 예전에 그 태도는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야 싱클레어는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데미안이 크로머를 만나 무언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요. 무슨 말이 오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데미아는 그 일에 대해 생색을 내지도 설명을 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싱클레어는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그가 기대했던 것만큼 후련하지 않았습니다. 고맙다는 마음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반발심이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자기 문제를 자기 힘으로 풀지 못하고
21:38 남의 손을 빌렸다는 사실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원을 받았는데도 마음이 온전히 가볍지 않다는 것. 그것은 어린 싱클레어가 처음 겪어 보는 감정이었습니다. 결국 싱클레어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 앞에서 그동안의 일을 털어 놓았습니다. 몇 달 동안 삼켜온 이야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고 오래 참았던 울음도 함께 터져 나왔습니다. 부모님은 그를 나무라기보다 다시 품에 안아 주었고 싱클레어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밝은 세계로 돌아온 기분을 느꼈습니다. 성경 속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던 장면 그대로였습니다.
22:24 다시 착한 아들이 되었고 다시 기도를 올렸으며 다시 아무 일 없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집 안에 공기도 식탁의 자리도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정작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해 준 데미안을 오히려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주치면 인사는 했지만 깊은 이야기는 피했고 카인 이야기 같은 것도 다시 꺼내지 않았습니다. 데미안 곁에 있으면 자꾸만 스스로 생각하라는 요구를 받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그 밝은 세계는 편안했고 편안한 곳에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었고
23:13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싱클레어는 그 안오남에 기대어 지냈습니다. 편하다는 것과 자유롭다는 것이 늘 같은 말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예전으로 완전히 돌아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카인 이야기를들은 날 열린 그 문은 여전히 다치지 않은 채였고 어른들이 옳다고 말한 것을 그대로 옳다고 받아들이는 일이 예전만큼 자연스럽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아직 그 질문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습니다.
23:58 싱클레어는 자랐고 목소리가 굵어졌고 교회에서 정식 신자가 되기 전에 받는 견진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실에서 그는 오랜만에 다시 데미안 옆자리에 앉게 됩니다. 우연히 아니었습니다. 데미안이 자리를 옮겨온 것이었습니다. 몇 해 만에 나란히 앉게 된 두 사람은 수업증의 낮은 목소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앞에서 성경을 풀어 주는 동안 옆자리에서는 전혀 다른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업의 주제는 십자가에 함께 매달린 두 강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뉘우치고
24:45 구원을 약속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끝내 뉘우치지 않은 채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은 늘 앞에 사람을 본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데미아는 다른 쪽에 눈길이 간다고 했습니다. 평생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온 사람이 죽음이 코 앞에 닥쳤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것이 과연 진심이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끝까지 뉘우치지 않은 쪽은 적어도 자기 자신을 배신하지는 않았다고 말입니다. 데미아는 그 사람이 옳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한쪽만 칭찬하고 다른 쪽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않는다는 점을
25:31 짚었을 뿐입니다. 어떤 이야기든 사람들이 오래 칭찬해온 쪽을 잠시 옆으로 밀어두면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점점 더 멀리 나아갔습니다. 데미아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이 세상의 절반만 맞고 있다고 했습니다. 밝고 반듯하고 허락된 것들만 그 신의 몫이고 어둡고 거칠고 부끄러운 것들은 전부 바깥으로 밀려나 악마의 이름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절반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밀려난 절반도 분명히 자기 안에 있는데 없는 척하며 사는 동안 그것은 사라지는 대신 더 깊이
26:17 숨어버립니다. 그러니 세상 전체를 있는 그대로 감당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데미안의 이야기였습니다. 싱클레어에게이 말은 위험하게 느껴졌습니다. 동시에 몇 년 전 카인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같은 감각이 되살아났습니다. 반박할 수는 없는데 받아들이기는 두려운 말. 사람이 정말로 흔들리는 순간은 틀린 말을 들었을 때가 아니라 맞는 것 같은데 아직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인지도 모릅니다. 그무렵 클레어는 데미안의 낯선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수업 중에 그가 아주 깊이 가라앉아 버리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27:03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고 얼굴에서 표정이 완전히 사라져 마치 오래된 조각상처럼 보였습니다. 옆에서 불러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잠시 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왔습니다. 싱클레어는 그 모습이 무서웠지만 동시에 자기 안으로 그렇게까지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견진 수업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싱클레어는 다른 도시에 학교로 떠나게 됩니다.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고 데미안가는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새학교에서 그는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27:49 아는 얼굴 하나 없었고 또래 무리에는 끼지 못했으며 집이 그리웠지만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저녁이면 낯선 기숙사 방에 앉아 창밖을 보며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누군가 말을 걸어 주기를 기다리면서도 막상 다가오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어색해졌습니다. 그런 시기에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상급생 알폰스크였습니다. 베크는 나이도 많았고 아는 것도 많아 보였으며 무엇보다 싱클레어를 어린에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베크는 싱클레어를 데리고 처음으로 술집에 갔습니다. 처음 마신 술은 쓰기만 했습니다.
28:37 그런데 취기가 오르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무겁던 외로움이 잠시 가벼워졌고 말수가 늘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자리가 생긴 것 같았습니다. 싱클레어는 그날 밤을 잊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 그는 자주 술집에 드나들었습니다. 어른 흉내를 내며 큰 소리를 쳤고 세상을 다 아는 사람처럼 냉소적으로 굴었습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척 하는 것이 그 무리에서는 멋있는 태도로 통했고 싱클레어는 그 역할을 제법 잘 해냈습니다. 학교에서는 문제학생으로 이름이 났고 성적은 곤두박질 쳤으며 퇴학 이야기까지 오갔습니다.
29:24 이상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는 점입니다. 착한 아들로 사는 동안 늘 눌러두었던 것이 마침내 밖으로 터져나온 것 같은 후련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후련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술이 깬 새벽이면 어김없이 자기 혐오가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술집으로 향했습니다. 부끄러움을 견디는 방법을 몰라서 부끄러움을 잊는 방법에 기된 것입니다.이 이 시기의 싱클레어는 아직 자기 자신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의 기대대로 사는 대신 술자리 친구들의 기대대로 살고 있었을 뿐이니까요.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30:10 시선의 주인만 바뀐 셈이었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고 해서 저절로 자기 길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얼마 뒤 학교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아버지가 직접이 도시까지 찾아왔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실망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예전 같으면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을 텐데 이번에도 싱클레어의 마음에는 비뚤어진 감정이 함께 올라왔습니다.이 사람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 어린 시절 젖은 신발을 두고 꾸증을 듣던 날에 느꼈던 그 감정이 몇 해가지나 똑같은 모양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나무라는 아버지의 말이 예전만큼
30:57 마음에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싱클레어는 후련하기보다 오히려 아득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또다시 그를 더 깊은 자기 혐으로 밀어넣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시험하듯 지냈습니다. 그 시기를 끊어낸 것은 뜻밖에도 아주 사소한 장면이었습니다. 어느 봄날 싱클레어는 공원을 걷다가 한 젊은 여성을 보게 됩니다. 키가 크고 마른 몸에 소년처럼 단정한 얼굴이었습니다. 스쳐 지나간 것이 전부였는데도 그 얼굴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사람과 한 마디도 나누지
31:44 않았습니다. 이름도 몰랐고 알아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마음속으로 이름을 하나 붙였습니다. 언젠가 어느 화가의 그림에서 본 적 있는 이름 베아트리체였습니다. 단태가 평생 마음에 품고 우러러 보았다는 그 여인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싱클레어의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술집에 밝기를 끊었고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기 시작했으며 몸가짐과 옷차림까지 스스로 단정하게 다잡았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고 다시 책을 폈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단을 맞아서도 벌이 무서워서도 아니었습니다.
32:30 마음속에 울어러볼 무언가가 생기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함께 달라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사랑한 대상이 실제 그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으니 그가 품은 베아트리체는 사실상 자기 마음이 만들어낸 형상이었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자기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밖에다 세워두고 그것을 우러러 보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다가갑니다. 그무렵부터 싱클레어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얼굴을 그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종이 위에 나타난 얼굴은 공원에서 본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33:17 몇 번을 다시 그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붓을 주인 소은 그가 보았던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던 것을 자꾸만 꺼내 놓았습니다. 완성된 얼굴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명하지 않았고 나이도 가음하기 어려웠으며 어딘가 자기 자신을 닮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 그림을 버리지 못하고 방에 세워둔 채 오래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문득 알아차렸습니다. 그 얼굴은 데미안이었습니다. 밖에서 찾던 것이 사실은 안에 있었다는 것을 싱클레어는 이렇게 손끝을 통해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오래 잊고 있던 기억
34:04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살던 집 대문 위에는 낡은 문장이 하나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래 몸을 반쯤 빼낸 세 마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수백번은 그 아래를 지나다녔지만 싱클레어는 한 번도 그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정작 그 문장을 두고 저게 무엇이냐고 물었던 사람은 데미 아니었습니다. 오래 전 일이었는데도 그 장면이 이제야 뚜렷하게 되살아났습니다. 싱클레어는 이번에는 그 세매를 그렸습니다. 어두운 지구를 닮은 둥근 덩어리 마치 거대한 알과도 같은 그것을 힘껏 밀어내며 머리를 내미는 한 마리
34:52 맹금이었습니다. 며칠을 매달려 완성한 그림은 어딘가 서툴렀지만 그리는 동안 그는 이상하리 많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림이 마르자 그는 그것을 봉투에 넣어 데미안에게 보냈습니다.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고 제대로 닿으리라는 기대도 없었습니다. 다만이 그림을 알아볼 사람은 세상에 한 명뿐이라는 확신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 답이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교실에서 책을 펴자 그 사이에 작은 쪽지 한 장이 끼워져 있었습니다. 누가 언제 넣어두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새 한 마리가 알을 깨고
35:39 나오려 애쓰고 있다는 것. 그 알이 곧 하나의 세계라는 것. 그러니 태어나려는 자는 자기가 속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는 것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나온 새가 날아가 닿는 신의 이름 하나가 함께 적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아프락사스였습니다. 싱클레어는 그 단어를 처음 보았습니다. 사전에도 없었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습니다. 데미안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으니 되물을 방법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쪽지를 접어 책 사이에 끼워두고 며칠을 그냥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아주 우연히 그 이름이 다시 나타납니다.
36:27 헤로도스를 함께 읽던 젊은 선생님 한 분이 고대의 신비주의 종파와 주술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옛 사람들이 아프락사스라는 이름의 신을 섬긴 적이 있다고 언급한 것입니다. 그 신은 밝은 것과 어두운 것,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한 몸에 지닌 존재로 여겨졌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저 지식 하나를 흘려보냈을 뿐이었습니다. 교실에 다른 학생들에게는 시험에도 나오지 않을 옛날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그 순간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습니다. 몇 해 전 데미안이 말했던 반쪽자리
37:14 신 이야기가 이제야 하나의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밖에서 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안에서 오래 자라고 있던 물음에 붙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무렵 클레어는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어린 시절 살던 집으로 돌아가는 꿈이었습니다. 대문 위에는 그 샘의 문장이 빛나고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면 누군가가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어머니 같기도 하고 데미안 같기도 하고 자기 자신 같기도 한 사람이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얼굴이었습니다.
37:59 그 품에 안기는 순간 벅찬 기쁨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꿈에서 깨고 나면 그 얼굴이 오래 남았고 싱클레어는 이번에도 그것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무렵 싱클레어가 하는 일은 늘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마음속에 떠오르면 그는 그것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먼저 그려 보았습니다. 알아듣기 전에 알아보는 방식이었던 셈입니다. 어느 저녁 싱클레어는 낯선 골목을 걷다가 작은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오르간 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배 시간도 아닌데 누군가 홀로 연주하고
38:45 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즐겨 듣는 곡도 아니었습니다. 바흐보다도 앞선 시대의 작곡과 북스테우대의 음악이었고 아름답다기보다 어딘가 간절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는 사람의 소리 같았습니다. 싱클레어는 그날부터 저녁마다 그 단벼락 아래에 서서 연주를 들었습니다. 연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는 그 소리에 자기 마음이 자꾸 붙들리는 이유를 궁금해했습니다. 며칠 뒤 그는 근처의 작은 술집에서 그 연주자와 마주앉게 됩니다. 이름은 피스토리우스였습니다.
39:31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을 공부했지만 중간에 그만두었고 지금은 오르간을 연주하며 고대의 종교와 신화를 혼자 파고들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이는 싱클레어보다 한참 위였는데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그는 싱클레어를 어린 학생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싱클레어가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꺼냈습니다. 아프락사스 피스토리우스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을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그 신에 대해 생각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자기 말고도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두 사람 모두
40:16 놀랐습니다. 올해 혼자 품고 있던 물음을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을 단숨에 가깝게 만듭니다. 그날 이후 싱클레어는 자주 피스토리우스를 찾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난로불 앞에 앉아 올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피스토리우스는 불을 들여다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타오르는 불꽃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 안에서 온갖 형상이 떠오르는데 그것은 불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흐르는 물이나 구름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밖을 보고 있다고 믿지만
41:04 사실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밖에다 비춰보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 중에서 싱클레어의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서 어떤 마음을 발견하고 놀라거나 두려워할 때 문제는 그 마음 자체가 아니라는 것. 그것을 금지된 것으로 여기고 없는 척 밀어내는 태도가 사람을 더 병들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안에서 올라온 것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피스토리우스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유독 견디기 힘든 이유도 그 미움만에 자기 자신의 어떤 모습이 들어 있기
41:51 때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싱클레어에게이 말은 오래 기다려온 대답 같았습니다. 어린 시절 두 세 개 사이에서 어정쩡하게서 있던 자신, 밝은 쪽에 속하려고 어두운 쪽을 없는 척했던 자신이 한꺼번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 어두운 절반을 없애야 할 것으로만 여겼는데 그것도 결국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 무렵 싱클레어에게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큰나우어라는 학교 후배였습니다. 그는 싱클레어가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믿었고 자기에게도 그 길을 알려 달라며 매달렸습니다.
42:37 싱클레어는 난처했습니다. 자기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스승처럼 바라보는 상황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는 몇 번 그를 밀어냈습니다. 매전 자신이 데미안을 밀어냈던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밤 싱클레어는 까닭물을 불안에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가 인적 없는 곳에서 큰 아우어를 발견합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참이었습니다. 싱클레어는 그를 붙들어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날 밤 싱클레어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누군가를 이끌 수 있다는 뿌듯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43:24 반대였습니다. 사람은 끝내 자기 발로 걸어야 하고 옆사람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아주 적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에서 조금씩 갑갑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피스토리우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언제나 옛 것이었습니다. 고대의 신들, 사라진 종파들, 오래된 상징들.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이 놀라운 세계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싱클레어는 그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스승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있는데 자기 안에서만 무언가가 계속 자라고
44:11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감정이 그만 말이 되어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의 이야기가 골동품 같다고 말해 버렸습니다. 박물관에 놓인 오래된 물건처럼 이미 지나간 것들을 꺼내 보여 줄 뿐이라고 말입니다. 말을 뱉는 순간 싱클레어는 아차 싶었습니다. 피스토리우스의 얼굴에서 핏끼가 가시는 것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무 데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침묵이 싱클레어에게는 어떤 반박보다 아팠습니다. 자기가 한 말이 지나쳤다는 것보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두 사람 다
44:58 알고 있다는 점이 더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나중에 싱클레어가 사과하자 피스토리우스는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말이 정확히 자기 급소를 찔렀기 때문에 아팠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오래 전부터 새로운 무언가를 세우고 싶어 했지만 결국 자기 몫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신학을 그만두었을 때도 오르간 앞에 앉아 옛 음악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도 그는 늘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아무도 그것을 소리내어 말해 준 적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는 옛 것을 지키고 전하는 자리에
45:43 머무를 사람이었고 끝내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이 장면은 작품 전체에서 가장 아픈 대목 중 하나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밀려나는 순간이자 제자가 자신을 키워 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한 걸음 나아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배운다는 것은 언젠가 그 사람을 넘어서는 일까지 포함하는데 그 과정은 되게 이렇게 깔끔하지 않습니다. 헤어질 무렵 피스토리우스는 자신이 싱클레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라고 말했습니다.이 앞은 스스로 가야 하는 길이라고 말입니다.이 작품이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고 있는
46:29 생각도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진짜 과제는 하나뿐이라는 것. 남들이 정해 놓은 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아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일이라는 것.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대신 걸어 줄 수 없습니다. 싱클레어는 그 말을 품은 채 그 도시를 떠났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게 된 것입니다. 아프락사스라는 이름도 불 앞에서 나눈 이야기들도 그대로 남았지만 이제 그는 혼자였습니다. 문을 열어 준 사람도 그 문 앞까지 데려다 준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그 문을 통과한 것은 자기 자신이어야
47:16 했습니다. 그리고 대학 도시에 도착한 어느 날 저녁 싱클레어는 거리에서 아주 오래 기다려 온 얼굴 하나와 마주치게 됩니다. 데미안이었습니다. 몇 해만이었지만 그는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놀라는 쪽은 늘 싱클레어였고 데미아는 마치 오래 전부터이 만남을 알고 있었다는 듯 담했습니다. 사실 그무렵어는 대학 생활에 크게 실망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기대하고 왔는데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같은 노래를 부르고 같은 농담에 웃었습니다.
48:02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각자 자기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습니다. 어릴적 술집에서 어린 흉내를 내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싱클레어는 더 외로웠습니다. 데미안과 다시 걸으며 나눈 이야기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데미아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는 이유가 서로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혼자서 있는 일이 무섭기 때문에 다들 같은 방향을 보고 서서 그것을 우정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물이일수록 바깥에 적을 하나 두어야 유지된다고 덧붙였습니다.
48:47 그러면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세상에는 그 무리에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어릴적 이야기했던 카인의 표적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어떤 모임을 만들거나 깃발을 드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저 남들이 다 옳다고 하는 것 앞에서 혼자 멈칫하게 되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끼리는 마주치면 서로를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며칠 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집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그 집에 들어서던 순간 그는 벽에 걸린 그림 하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춥니다. 언젠가 주소도 모른 채 봉투에 담아 보냈던 그 샘의 그림이었습니다.
49:35 닿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림이 이렇게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현관 안쪽에서 한 여인과 마주친 순간 그는 그 자리에 굳어버립니다. 데미안의 어머니였습니다. 이름은 에바였습니다. 싱클레어가 굳어버린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반복해서 꾸던 꿈속의 얼굴, 그리고 자기 손으로 몇 번이나 그렸던 그 얼굴이 눈앞에서 있었습니다. 자기 안에서만 존재하던 형상이 실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에바브인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오래
50:21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맞아 주었습니다. 싱클레어가 자신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그 집에서는 그 사실이 이미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날 이후 싱클레어는 그 집을 자주 드나들게 됩니다. 그 집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얻었습니다. 무엇을 믿는지, 왜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지 변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착한 아들 노릇을 하지 않아도 대담한 척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남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지 않은 채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에바 부인을 향한 싱클레어의 마음은
51:08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고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가지려는 마음이라기보다 오래 헤매다 마침내 제자리에 도착한 사람의 마음에 가까웠습니다. 그가 그토록 오해 밖에서 찾아 헤맸던 것이 사실은 자기 안에 있던 얼굴이었다는 사실이 그 집에서 확인된 셈입니다. 그 집에는 여러 사람이 드나들었습니다. 오래된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 별자리를 읽는 사람, 인도의 수행법을 익힌 사람. 저마다 다른 것을 붙들고 있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들 세상이 정해 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51:55 그중에는 조금 의습강스러워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자기 확신이 지나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데미아는 그런 사람들까지 굳이 가려내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남이 정해 준 답에 만족하지 못한 채 계속 묻고 있느냐였기 때문입니다. 그무렵 데미아는 이상한 이야기를 자주했습니다. 유럽이라는 세계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이미 텅 비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전부터 이어져온 질서를 계속 붙들고 있지만 그 질서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겉모습만 남은 것은 오래 버티지
52:41 못하고 언젠가 한꺼번에 무너진다고 말입니다. 그는 자기가 꾸는 꿈 이야기를 들려 주기도 했습니다. 도시가 무너지고 거대한 무리가 몰려다니는 꿈이었습니다. 싱클레어는 그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데미안이 아무 근거 없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이 소설이 쓰인 시기를 생각하면이 대목은 한 청년의 예감이라기보다 그 시대를 통과한 사람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졌습니다. 거리의 공기가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깃발을 들고 몰려나왔고 어제까지 서로 무심하던 이들이 어깨를
53:29 걸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들 무언가 거대한 것에 속하게 된 표정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각자 외롭게 지내던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이름 앞에서 처음으로 하나가 된 듯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데미안이 말했던 그 무너짐이 이런 모습으로 시작되리라고는 싱클레어도 미쳐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데미안이 먼저 소집되었습니다. 떠나기 전 그는 싱클레어에게 앞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짧게 이야기했습니다.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무너진 자리에서 무엇이 새로워지는지를 지켜보는 사람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54:16 작별 인사를 하러 갔을 때 에바브이는 올해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슬퍼하는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앞으로 그가 겪게 될 일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습니다. 그리고 싱클레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전선으로 떠나게 됩니다. 전쟁터의 시간은 그가 상상하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이야기 속에 영웅도 신념도 그곳에는 없었습니다. 진흙과 취위와 기다림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장뿐이었습니다. 다만 이상하게도 그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잇는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55:02 평소 점잔턴 사람이 무너지기도 했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사람이 놀라운 얼굴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싱클레어는 그 광경을 보며이 거대한 파괴가 어쩌면 무언가가 태어나기 위한 진통일지도 모른다는 데미안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알을 깨는 일은 새에게도 아픈 일이라는 것을 그는 이제 다른 의미로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밤 하늘을 올려다보던 싱클레어는 구름 사이로 거대한 형상이 떠오르는 것을 봅니다. 여인의 모습이었고 에바 부인을 닮아 있었습니다. 그 형상이 몸을 뒤척이자 무수한 별들이 쏟아져 나와 하늘 전체로 흩어졌습니다.
55:48 그리고 그 중 하나가 곧장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것 같았던 순간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싱클레어는 급하게 마련된 야전 병원에 누워 있었습니다. 온몸이 아팠고 주위에는 신음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옆자리에 누은 사람을 본 순간 그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데미안이었습니다. 데미아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는 묻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당부해 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싱클레어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자기 대신 인사를 전해
56:36 달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데미아는 그 인사를 그대로 건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자신이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떠나기 전 데미안이 남긴 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다시 부르게 되더라도 예전처럼 누군가가 달려와 도와주지는 않을 거라고 그때는 자기 아내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그러면 자신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크로머에게 시달리던 아이를 대신 구해 주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때 옆자리에는 낯선 사람이 누워 있었습니다.
57:21 데미아는 없었습니다. 상처를 치료받는 동안 싱클레어는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웠습니다. 아플 때마다 그는 눈을 감고 자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거울 같은 그곳에서 한 얼굴을 만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얼굴이었는데 어느새 그를 이끌어 주던 그 친구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돌아보면 싱클레어가 걸어온 길은 대단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었습니다. 남들 앞에서 초라해 보이기 싫어 지어낸 거짓말 하나에서 시작해 어른들이 옳다고 한 것을 처음으로 의심해 보고 반대편으로 달려가 봤다가
58:08 울어러 볼 대상을 만들었다가 스승을 만나고 또 그를 넘어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사이 그는 여러 번 남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었고 그때마다 자기 자신에게서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부모님의 기대, 아이들 무리의 기대, 술자리 친구들의 기대, 그리고 자신을 스승으로 여기던 사람의 기대까지. 그 기대들은 하나같이 그럴 듯했고 하나같이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만난 것은 새로운 세계도 대단한 깨달음도 아니었습니다. 눈을 감고 자기 안을 들여다봤을 때 거기 있던 자기 얼굴 하나였습니다.
58:53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날아간 곳도 결국 그곳이었는지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밀리언 마인드였습니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