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이란 무엇인가?" 인류가 잃어버린 가장 고귀한 시간 | 게으름의 철학사 총정리

간단한 요약

이 영상은 "게으름"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다루고 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현대까지 이어지는 여가와 일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가가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 로마 제국에서는 일이 중요시되었고, 바쁜 것이 비참하다는 세네카의 비판이 있었습니다.
  • 산업혁명 이후, 시간은 금으로 여겨지면서 사람들이 더 바쁘게 살게 되었습니다.
  • 현대에서는 여가 시간이 뇌의 창의성과 인지 기능을 활성화함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시작

영상의 시작 부분에서는 한 사람이 바닷가에 앉아 휴가를 지나치며 자신이 쉬고 있다는 착각과 동시에 괴로움을 느끼는 장면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가치가 없게 여겨졌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죄책감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2500년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사회적 맥락에 기인한 것임을 설명합니다.

일하지 않는 시간이 고귀했던 시대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는 일하지 않는 시간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시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여가를 삶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며, 여가는 일에 종속되지 않는 완전한 자유 시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아고라에서 여가를 즐겼던 모습을 통해, 그들은 일하지 않는 시간을 통해 인생의 진정한 질문을 던졌음을 강조합니다.

가장 바쁜 사람이 가장 가난하다

세네카는 로마 변호사로서의 경험을 통해 바쁜 삶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바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나태는 어떻게 일곱 가지 죄악에 들어갔는가

게으름은 처음에는 비난받지 않던 상태였다가 차츰 함께 받아들여진 여가와의 관계에서 나태라는 죄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중세 수도원에서의 규칙은 나태함을 경계하게 되면서 본래의 여가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아케디아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게으름이 더 이상 단순한 나태가 아닌 영혼의 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시간이 돈이 된 순간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시간은 금"이라는 개념이 대중화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노동의 개념이 변화하며 사람들은 수많은 시간 동안 일하였고, 일하지 않는 시간을 낭비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시간이 돈"이라는 발언은 이러한 트렌드를 대표하며, 본디 여가의 의미와 가치는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강조합니다.

하루 4시간만 일하는 세상을 꿈꾸다

러셀과 케인스는 발전하는 기술이나 노동 감소의 가능성을 언급하며 사람들이 보다 적게 일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과거의 전통과 경쟁심에 따라 과중한 노동 시간의 연속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술이 인간의 삶의 질을 높여줄 것이라는 신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살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뇌는 멍 때릴 때 무엇을 하는가

의료 연구들은 우리가 멍 때릴 때 뇌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밝혔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뇌는 과거의 경험을 연결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끝맺음, 쉼표가 있어야 음악이 된다

마지막으로 영상에서는 시간이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공백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점을 다룹니다. 쉼표가 있는 음악이 아름답듯, 삶에서도 쉼과 여유가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그 사람은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내며 이러한 여유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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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한 사람이 바닷가에 앉아 있습니다. 1년을 기다려 온 휴가입니다. 파도가 밀려오고 하늘은 맑고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10분쯤 지났을까요? 손이 슬그머니 주머니로 향합니다.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회사 메일함이 열립니다. 급한 일은 없습니다. 그저 확인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는 다시 바다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명 쉬고 있는데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딘가 찜찜하고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고 이렇게 있어도 되나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0:47 올라옵니다.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몇 초 사이에 휴대폰을 꺼내고 밥을 먹으면서 영상을 틀어 놓고 잠들기 직전까지 무언가를 보고 듣습니다. 하루 중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어쩌면 거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다 그런 시간이 생기면 우리는 그것을 즐기는 대신 죄책감을 느낍니다. 남들은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나만 뒤쳐지는게 아닐까?이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하는게 아닐까?

1:33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쉬지 말라고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울까요? 왜 게으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뜨끔할까요? 언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인류가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전혀 다른 분경이 펼쳐집니다. 2500년 전 그리스에서는 일하지 않는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기한 것이었습니다.

2:19 일은 오히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것, 여가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쉬기 위해 일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더 일하기 위해 쉽니다. 휴식마저 내일의 노동을 위한 충전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반대로 물었습니다.이를 다 마친 다음 그 자유로운 시간에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에게는 그것이 삶의 진짜 질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가장 고기한 것이었던 여가는 어쩌다 일곱 가지 죄악의 목록에

3:04 오르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어쩌다 시간은 돈이 되고 쉬는 것은 손해가 되었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옛날 사람들의 생각을 구경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왜 쉬면서도 불안한지 그 마음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 게으음이라는 오래된 피고인을 둘러싼 2500년의 재판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이 이 재판에서 게으음은 한 때 왕자에 앉았고 한 때 지옥으로 떨어졌으며 다시 법정에 불려나와 자신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장면은 지중의 햇살 아래

3:50 광장에 모여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도시에서 시작됩니다. 그곳에서 여가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이었고 삶의 목적 그 자체였습니다. 기원전 4세기의 아테네로가 보겠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 도시의 심장인 아고라 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들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도 아니고 서둘러 어딘가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335호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정치에 대해, 우주에 대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나절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 서서 말하고 듣고

4:36 반박하고 웃습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한심할지도 모릅니다. 대낮부터 일도 안 하고 잡이나 하다니. 그런데 당시 아테네 사람들의 생각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에게이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시간이었습니다. 오히려 아침부터 밤까지 돈 버는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이야말로 딱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삶을 살 시간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은이 시간을 스콜레라고 불렀습니다. 아무 의무도 없는 자유로운 시간. 먹고 사는 문제에서 풀려나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5:22 말입니다. 그런데이 단어의 운명이 재미있습니다. 스콜레는 훗날 라틴어를 거쳐 영어의 스쿨, 그러니까 학교라는 단어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배우는 곳을 가르키는 말의 뿌리가 사실은 한가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배움이란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그 남는 시간에 세상을 궁금해하다가 저절로 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배움이고 학문이었습니다. 밤하늘의 별은 왜 움직이는지, 세상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이런 질문들은 당장 빵 한 조각도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6:08 하지만 먹고 사는 걱정에서 노연한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한가 속에서 태어난 셈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이를 가르키는 단어입니다. 그리스인들은 노동이나 생업을 아스콜리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대로 풀면 스콜레가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일이 기본이고 쉬는 것이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일을 중심에 놓고 일이 없는 시간을 휴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거꾸로였습니다. 여가가 기본이고 일은 여가가 결핍된 상태였습니다. 언어의 구조 자체가 지금 우리와

6:56 정반대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말의 휴가나 영어의 베케이션은 모두 일에서 잠시 벗어난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일이 먼저 있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 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언어에서는 힘이 먼저 있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무엇을 중심에 놓고 사는가? 그 대답이 단어 하나에 고스란이 담겨 있습니다.이 생각을 철학으로 완성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는 정치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전쟁을 하는 것은 평화를 얻기

7:42 위해서이고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은 여가를 얻기 위해서라고 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은 먹기 위해서이고 집을 짓는 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의 마지막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것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이 여가였습니다. 여가는 다른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모든 수단들이 향하는 최종 목적지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여갈한 빈둥거림이 아니었습니다.

8:28 생각하고 대화하고 세상의 이치를 들여다보는 시간. 인간이 가진 가장 높은 능력을 꽃피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불렀습니다. 잘 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여가를 제대로 누리는 능력도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쉬는 데에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불편한 진실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그렇게 한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대신 일해 주는 노예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밭을 갈고 물건을 만들고 집안일을

9:13 하는 것은 노예와 외국인들의 몫시였습니다. 시민의 여가는 다른 사람의 노동 위에 세워진 성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오히려 곱씹게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들은 손에 넣은 자유 시간을 락으로 채우지 않았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가졌으니 가장 귀하게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에게 갑자기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요? 하루 이틀은 밀린 잠을 자고 영상을 보겠지만 한 달 1년이 주어진다면

9:59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는 자유 시간을 갖는 법은 알아도 그것을 사는 법은 배운 적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여가가 삶의 왕좌에 앉아 있었다면 그 왕좌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중의 주인이 바뀌고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이 세워집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부지런했고 훨씬 실용적이었으며 훨씬 바빴습니다. 정복하고 건설하고 통치하느라 쉴틈이 없는 사람들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분주함의 한복판에서 한 철학자가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10:44 고개를 졌습니다. 모두가 그토록 바쁘게 사는데 정작 제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붓을 들어 짧지만 매서운 글 한편을 쓰기 시작합니다. 제목은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였습니다.이 글을 쓴 사람은 세네카. 로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부유한 철학자였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그는 황제의 미움을 사서 8년 동안 외딴 섬 코르시카로 유배를 당했고 극적으로 돌아와서는 훗날 황제가 될 어린 네로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네로가 황제 자리에 오르자 세네카는

11:31 제국의 실질적인 이인자가 되어 정치의 한복판에서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한가한 서제의 철학자가 아니라 로마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바쁨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는 것. 여기에이 글의 무게가 있습니다. 바깥에서 구경하며 훈수를 둔 것이 아니라 그 소용돌이 안에서 직접 겪으며 쓴 기록이기 때문입니다.이 글은 세네카가 파울리누스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파울리누스는 로마의 식량 공급을 책임지는 고위 관리였습니다. 수십만 명이 먹을 공물을 관리하는

12:16 자리이니 얼마나 바빴을지 짐작이 갑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서로에 파묻혀 살고 쉴새 없이 사람을 만나고 잠시도 자기 시간을 갖지 못하는 사람. 세네카는 바로 그런 사람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첫머리에서부터 정면으로 치고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늘 인생이 짧다고 한탄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낭비하고 있을 뿐이라고 충분히 긴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테네카가 관찰한 로마 사람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지금과

13:04 닮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유력자의 집 앞에서 아침마다 줄을 섭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을 불리는 일에 인생을 다 씁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일을 돌봐주느라 정작 자기 일은 늘 뒷전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신살이 되면 예순살이 되면이 일만 끝나면 그때부터는 진짜 내 삶을 살겠다고. 세네카는 여기에 차가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삶을 시작할 날짜를 왜 그렇게 멀리 잡아두는가? 그날까지 살아 있을 거라고 누가 보장해 주는가? 인생의

13:51 마지막 조각만 자기 자신에게 주려는 계획.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계산이라는 것입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분주하게 사는 사람들을 오쿠파티라고 불렀습니다. 무언가의 점령당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것은이 단어의 뉘앙스입니다. 로마에서이 말은 군대가 도시를 점령할 때 쓰는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네카가 보기에 바쁜 사람이란 자기 시간을 남에게 점령당한 사람입니다. 몸은 자기 것이지만 하루하루는 다른 사람의 욕무, 다른 사람의 부탁, 다른 사람의 기대로 가득차 있습니다.

14:37 그는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땅에 누가 발을 들이면 화를 내면서 자기 인생에 아무나 들어와 시간을 가져가는 것은 내버려 둔다고. 돈은 한 푼도 남에게 거져 주지 않으면서 시간은 달라는 사람마다 나눠 준다고. 돈은 잃어도 다시 벌 수 있지만 시간은 단 1초도 되돌릴 수 없는데 사람들은 정확히 거꾸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네카의 계산법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기준이 뒤집힙니다. 창고의 금마가 가득해도 자기 시간이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적어도 자기 시간의

15:23 주인인 사람은 부자입니다. 그가 보기에 가장 딱한 사람은 백발이 되도록 바쁘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오래 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래 존재했을뿐 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해에 빚된 그의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한구를 떠나자마자 폭풍에 휘말려 이리저리 떠밀려다닌 배를 두고 우리는 그 배가 긴 항해를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오래 흔들렸다고 말할 뿐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여서 세월에 떠밀려 다닌 것과 인생을 항해한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네카가 말하는 진짜 사는

16:08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그는 그것을 오티움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 사람들이 여가를 가리키던 말입니다. 그런데 세네카의 오티움은 단순히 일을 쉬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한가함을 경계했습니다. 이래서는 벗어났지만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도는 상태.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분주함일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말한 오티움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고 먼저 살았던 현자들의 책과 대화하는 시간. 그는 이것을 두고

16:55 시간을 늘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지혜를 읽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수십년에 수백년의 시간을 더해서 사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세네카에게도 그늘은 있습니다. 그는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는 비판을 받았고 폭군이 되어가는 내로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말년네는 반역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제자였던 내로의 명령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습니다. 자기 시간에 주인이 되라고 썼던 사람이 정작 자기 인생의 마지막은 남의 명령으로 끝맺어야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글이 지금까지 읽히는

17:41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문장들은 완성된 삶의 자랑이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싶었던 사람의 절실한 고백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세네카가 세상을 떠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 제국에는 커다란 변화가 찾아옵니다. 새로운 종교가 제국 전체로 퍼져나간 것입니다. 그리고이 변화와 함께 게으음의 운명도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최고의 영광이었고 세네카에게 삶의 회복이었던 그 한가한 시간이 이제는 영혼을 노리는 위험한 것으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18:27 그 이야기는 사막 한가운데 세상을 등지고 홀로 기도하던 수도자들의 작은 방에서 시작됩니다. 한낮 태양이 머리 위에 떠 있을 때 그들을 찾아오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수도자들은 그것을 정호의 악마라고 불렀습니다. 사세기 이집트의 사막으로가 보겠습니다. 이곳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도시의 소음도 재산도 가족도 뒤로하고 오직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채우겠다며 사막의 작은 음막으로 들어온 수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예상치 못한 적이

19:13 나타납니다. 맹수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한 낮에 찾아오는 어떤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해가 머리 꼭대기에 걸리는 정호 무렵. 사막의 공기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때 수도자들의 마음속에 이상한 목소리가 스며듭니다. 해는 왜 이렇게 느리게 움직이는가?이 좁은 방에서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차라리 다른 곳으로 떠나면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운이 감옥처럼 느껴지고 기도는 무의미해 보이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19:59 충동이 견딜 수 없이 커집니다.이 상태를 처음으로 자세히 기록한 사람이 에바그리우스라는 수도자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아케디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어로 돌봄이 없는 상태. 그러니까 아무것도 마음 쓰이지 않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케디아가 단순한 게으음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에바그리우스의 기록을 보면 아케디아에 사로잡힌 수도자는 오히려 부산하게 움직입니다. 창밖을 자꾸 내다보고 해의 위치를 확인하고 누가 오지 않나 서성이고이 핑계 저핑계로 방을 나섭니다.

20:46 몸이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붕 뜨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머물지 못하고 지금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마음. 어딘가 나지 않으신가요?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5분마다 휴대폰을 확인하고이 일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고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좋을 것 같은 그 마음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1500년 전 사막의 수도자들이 싸웠던 상대는 어쩌면 오늘 우리 곁에도 와 있는지 모릅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 생활을 위협하는 여덟 가지 나쁜 생각의 목록을

21:32 만들었고 아케디아는 그중에서도 가장 무겁고 끈질긴 것으로 꼽혔습니다. 그리고이 목록은 약 200년 뒤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손에서 일곱 가지로 정리됩니다. 우리가 지금도 알고 있는 칠 죄종. 그러니까 교만, 질투, 분노, 탐욕, 탐식, 세욕, 그리고 나태의 목록이 여기서 완성됩니다. 사막의 수도자들이 겪던 특수한 마음의 병이 이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곱 가지 큰 죄의 하나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여기서 짚어볼 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원래의 아케디아는 영혼히 매말라

22:18 아무것에도 마음을 쏟지 못하는 깊은 상태를 가리쳤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점점 단순해집니다. 몸을 움직이기 싫어하는 것, 일을 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그 게으음으로 좁아진 것입니다. 마음의 병에 대한 섬세한 진단이 부지런하지 않은 자에 대한 도덕적 낙인으로 바뀌어 간 셈입니다. 중세 수도원은이 적과 싸우기 위한 처방을 내렸습니다. 6세기에 베네딕투스라는 수도자가 만든 수도원 규칙서에는 유명한 원칙이 담겨 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그는 한가함을 영혼의 적이라고 불렀고

23:06 수도자들의 하루를 빈틈없이 짜인 시간표로 채웠습니다. 새벽 기도, 노동, 식사, 독서, 저녁 기도까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는 삶. 비어 있는 시간에 악마가 깃든다면 시간을 아예 비워두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이 처방은 효과가 있었고 수도와는 천년 동안 유럽에서 가장 질서 있고 생산적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역사의 방향이 조용히 틀어집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최고의 시간이었던 한가함이 이제는 악마에게 내어주는 빈틈이 된 것입니다. 여관은 채워야 할 공백이 되었고

23:52 노동은 영혼을 지키는 방패가 되었습니다. 일의 지위와 쉬의 지위가 자리를 맞바꾸는 순간입니다.이 뒤바뀐 생각은 그림과 문학 속에서 점점 더 무서운 얼굴을 갖게 됩니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나태를 의인화해서 그렸는데 당나기 위해 충 늘어져 잠든 사람 달팽이와 함께 있는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단태의 신곡에서는 나태한 자들이 연혹의 언덕에서 쉬지 못하고 영원히 달려야 하는 벌을 받습니다. 살아서 느리게 살았으니 죽어서는 뛰라는 것입니다. 게으음은 이제 단순히 부끄러운 것이

24:39 아니라 지옥과 연혹의 형벌로 다스려야 할 죄가 되었습니다. 1500년 사이에 인류의 마음속에서 완성된이 거대한 역전을 보고 있으면 하나의 질문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쉴 때 느끼는 그 알 수 없는 죄책감은 혹시이 시대가 우리 마음에 새겨 놓은 오래된 흔적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중세까지의 나태는 어디까지나 영혼의 문제, 신가의 관계에서 생기는 죄였습니다. 게으음을 심판하는 재판관은 신이었고 형벌은 사우세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 재판관도 바뀌는

25:27 법입니다. 이제 게으음은 전혀 다른 법정에 서게 됩니다. 그 법정의 재판과는 신이 아니라 시계였고 제목은 영혼의 타락이 아니라 돈의 손실이었습니다. 수도원의 종탑에서 시간을 알리던 종소리가 도시의 시계탑으로 옮겨가고 이윽고 공장의 출근 시계로 바뀌는 동안 인류는 완전히 새로운 계산법을 배우게 됩니다. 시간은 금이라는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그 계산법입니다.이 새로운 계산법이 탄생하는 과정에는 뜻밖에도 종교가 깊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16세기 유럽 종교 개혁의 시대로

26:13 가보겠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기존 교회의 반기를 들면서 낯선 생각 하나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신을 섬기는 일은 수도원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빵을 굽는 사람은 빵을 굽는 일로 구들을 만드는 사람은 구들을 만드는 일로 신을 섬길 수 있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직업을 뜻하는 독일어 베루프에는 부르심이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는데 루터에게 모든 직업은 신이 각자에게 맡긴 소명이었습니다. 먼뜻 들으면 노동의 지위를 한껏 높여 주는 따뜻한 말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노동이 기도만큼 거룩해진 것이니까요.

27:00 하지만이 말을 뒤집으면 전혀 다른 얼굴이 나타납니다. 일하는 것이 신을 섬기는 것이라면 일하지 않는 것은 신의 부르심을 져버리는 일이 됩니다. 게으음은 이제 일곱 죄악의 하나 정도가 아니라 소명에 대한 배신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쇠기를 박은 사람이 제네바의 종교 개혁 칼뱅입니다. 칼뱅의 가르침 중에 예정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 구원받을지는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신이 이미 정해두었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그 결정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이 가르침은 믿는 사람들을 견디기 힘든 불안 속으로

27:47 밀어넣었습니다. 나는 구원받는 쪽일까? 버려진 쪽일까? 답을 알 수 없으니 사람들은 단서라도 찾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대답이 퍼져나갑니다.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라면 그 삶에 표시가 날 것이다. 성실하게 일하고 절제하며 살고 그 결과로 일이 잘되어 가는 것이야말로 선택받았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미친듯이 일하기 시작합니다. 훗날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이 정신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에 시동을 걸었다고 분석했습니다.

28:33 열심히 일에서 번 돈을 흥청망청 쓰지 않고 다시 일에 쏟아붙는 사람들. 쉬는 것을 죄스러워하고 일하는 것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는 사람들이 대량으로 태어난 것입니다.이 정신을 가장 실감나는 문장으로 옮긴 사람은 바다 건너 미국에 있었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입니다. 그는 젊은 상인에게 주는 조언이라는 글에서 그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시간이 돈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의 계산은 구체적입니다. 하루에 10실링을 벌 수 있는 사람이 한나절을 놀았다면 그는 놀면서 쓴 돈만 잃은 것이 아니라 벌 수 있었던 돈까지 잃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29:20 쉬는 시간을 비용으로 계산하는 사고 방식이 여기서 또렷한 모습을 갖춥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최고의 목적이었고 세네카에게는 삶 그 자체였던 시간이 이제는 화폐로 환산되는 자원이 되었습니다. 시간을 쓴다. 시간을 아낀다. 시간을 낭비한다. 시간을 투자한다. 우리가 지금도 무심고 쓰는이 표현들은 전부 돈을 다루는 언어입니다. 언어가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은 시간을 바라보는 마음 자체가 바뀌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이 새로운 시간과는 곧 그것을 완벽하게 구현할 무대를 만나게 됩니다.

30:06 산업 혁명의 공장입니다. 공장 이전의 시대 사람들은 해와 계절의 리듬으로 살았습니다. 농부는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지면 쉬었으며 겨울에는 느슨하게 여름에는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장인들은 자기 작업장에서 자기 속도로 일했습니다. 일과 삶이 뒤섞여 흘러가는 느슨하지만 자연스러운 리듬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장은 전혀 다른 시간을 요구했습니다. 수백명이 같은 시각에 모여 기계에 맞춰 일해야 하니 개인의 리듬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아침 6시에 공장문이 열리고 종이 울리고 지각한 사람은 벌금을 물거나

30:54 아예 그날 일을 얻지 못했습니다. 영국의 도자기 사업가 조사이어 웨지우드는 노동자들의 출퇴근 시각을 일일이 기록하는 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데 오늘날 출근 카드의 조상이 이때 태어난 셈입니다. 노동자들은 이제 해를 보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계를 보고 움직여야 했습니다. 역사가들은이 변화를 두고 인류가 시간의 기율을 몸에 새기는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고 표현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순순히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의 노동자들은이 낯선 시간표에 저항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성월요일이라는

31:40 풍습입니다. 주말에 실컷 놀고 나서 월요일에도 출근하지 않고 하루 더 쉬어 버리는 것인데 마치 월요일이 성인의 축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들 태어나게 쉬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공장주들은 골머리를 알았고 설교자들은 게으음을 꾸짖었으며 학교는 아이들에게 시간 지키기를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몇 세대가 지나자 성 월요일은 사라졌습니다. 시계에 맞춰 사는 삶이 마침내 인간의 두 번째 본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얄구진 반전이 일어납니다. 시간 기율이 완전히 몸에 벤 노동자들은 이제 거꾸로 시간을 무기로

32:25 싸우기 시작합니다. 8시간 노동, 유급 휴가, 주말이라는 것들은 모두이 싸움이 남긴 유산입니다. 취미 권리라는 생각 자체가 시간이 돈이 된 세상에서 태어난 발명품인 셈입니다. 이렇게 해서 게으음의 재판은 세 번째 국면에 이르렀습니다. 신의 법정에서 죄였던 게으음은 이제 경제의 법정에서 손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이 판결이 확고해 보이던 20세기 초, 뜻밖의 인물이 법정에 뛰어들어 게으음의 변호를 자청합니다. 그것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수학과 철학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남기고 훗날 노벨 문학상까지 받게

33:12 되는 당대 최고의 지성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변론 제목은 도발적이게도 게으음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1932년 버트런드 러셀이 발표한 글입니다. 러셀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수학의 기초를 다시 세우겠다며 수천 쪽에 이르는 책을 써낸 논리학자였고 전쟁에 반대하다 감옥에 갇치기도 했던 실천가였으며 훗날 노벨 문학상까지 받게 되는 문장가였습니다. 말하자면 평생을 지독하게 성실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순의 나이에 게으음을 찬양하는 글을 썼으니 세상이 술렁일만

34:00 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열어보면 첫머리부터 웃음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이 근면은 미덕이라는 가르침 속에서 자랐고 그 가르침대로 열심히 일하며 살아왔지만 이제 와 돌아보니 그 믿음이 세상에 엄청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짙게 덧붙입니다. 자신은이 글을 읽는 성실한 사람들이 부디 조금이라도 덜 성실해지기를 바란다고 말입니다. 러셀의 논리는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대단히 진지합니다. 그는 먼저 노동을 둘러싼 오래된 믿음 하나를 도마에 올립니다. 노동은 그 자체로 신성하고 고기하다는

34:46 믿음입니다. 러셀이 보기에이 믿음의 뿌리는 떳떳하지 못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소수의 지배자들은 언제나 다수의 노동 위에서 한가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수가 불만을 품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동은 고귀한 것이라고 성실하게 일하는 삶이야말로 훌륭한 삶이라고 가르치면 됩니다. 그러니까 금면의 도덕이란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심어준 편리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정작 그 도덕을 설교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한가함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서 말입니다. 러셀은이 지점을 꼬집으며 우리가

35:34 당연하게 여기는 성실함이라는 가치가 사실은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묻습니다. 그의 주장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하루 4시간 노동입니다. 허무맹랑한 공상이 아니라 나름의 계산이 깔려 있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경험을 근거로 듭니다. 전쟁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생산 현장을 떠나 군대와 군수공장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상식적으로라면 남은 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해졌어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합국쪽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크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러셀은 여기서 결론을 끌어냅니다.

36:19 현대의 기술은 이미 훨씬 적은 노동으로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드러나지 않았을 비밀이 우연히 드러난 셈입니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 여유를 모두의 자유 시간으로 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루 네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세상. 하지만 세상은 그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8시간 10시간을 일했고 그 결과 한쪽에서는 괄로가 다른 한쪽에서는 실업이 쌓였습니다. 러셀은 이것을 두고 필요한 일에 총량을 나누면 모두가 여유로울 수

37:07 있는데 절반은 뼈빠지게 일하고 절반은 일자리가 없어 굽는 쪽을 택한 어리석음이라고 말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꿈을 꾼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경제학자 케인스입니다. 그는 1930년에 쓴 글에서 대담한 예언을 내놓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로 볼 때 100년 뒤에 후손들은 일주일에 15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풍요롭게 살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진짜 어려운 문제와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넘쳐나는 자유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37:53 하는 문제 말입니다. 그로부터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 답을 맞춰 볼 수 있습니다. 생산력에 대한 예측은 놀랍도록 맞았습니다. 우리는 케인스가 상상한 것보다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런데 노동 시간에 대한 예측은 완전히 빛나갔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일주일에 40시간 넘게 일하고 퇴근 후에도 일에서 놓여나지 못합니다.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면 인간이 자유로워질 것이라던 그 오래된 약속은 왜 지켜지지 않았을까요? 풍요가 커지는만큼 욕망도 함께 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옆 사람보다 뒤쳐질

38:39 수 없다는 경쟁이 멈추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그 오래된 믿음. 일하지 않는 사람은 같이 없다는 믿음이 여전히 우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러셀이 꿈꾼 세상에서 사람들은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까요? 그는 사람들이 마냥 늘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역사 속에서 문명을 꼽히 것들, 학문과 예술과 발명은 대부분 먹고 사는 노동 바깥의 시간에서 태어났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피곤에 절어 있는 사람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퇴근 후에

39:26 남는 힘이 없는 사람에게 여갈한 그저 쓰러져 있는 시간일 뿐입니다. 러셀은 진짜 여가 힘이 남아 있는 상태에 자유시간이 주어질 때 평범한 사람들 안에 잠들어 있던 호기심과 창조성이 깨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러셀이 철학자의 직감으로 내놓은이 주장은 훗날 뜻밖의 지원군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과학이 발전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뇌에서 벌어지는 일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발견은 우연한 관찰 하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실험 장비 속에 누워 아무 과제도 받지 않은 사람들의 뇌가 이상아리

40:12 많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90년대 미국의 뇌과학자 마커스 라이클의 실험실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뇌 영상 장치를 이용해 사람이 어떤 과제를 할 때 뇌의 어느 부분이 켜지는지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계산을 하면 여기가 켜지고 단어를 읽으면 저기가 켜지는 식입니다. 이런 연구를 하려면 비교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과제를 시작하기 전 참가자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때의 뇌는 말하자면 꺼진 상태, 조용한 상태일 거라고 다들 생각했습니다.

40:58 그런데 데이터가 이상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시간에 뇌의 특정 부위들이 오히려 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과제를 시작하면 그 부위들은 도리어 조용해졌습니다. 처음에 과학자들은 이것을 측정 오류쯤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실험을 거듭해도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라이클은이 현상에 이름을 붙입니다. 아무 과제가 없을 때 기본으로 켜지는 회로라는 뜻에서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멍안히 있을 때 뇌는 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41:44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하는 걸까요? 이후의 연구들이 하나씩 밝혀낸 내용은 뜻밖에도 꽤 중요한 일들이었습니다.이 회로가 켜질 때 우리는 지난 일들을 되짚어보고 흩어져 있던 경험들을 연결해 정리합니다. 앞으로 있을 일을 미리 그려보고 여러 갈래의 미래를 시뮬레이션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하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굴리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바깥 세상을 향해 있던 시선이 안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낮동안 쏟아져 들어온 정보들이 도서관에 반납된 책처럼 어지럽게 쌓여 있다면 멍한 시간은 사서가 그 책들을

42:32 제자리에 꽂는 시간인 셈입니다.이 정리가 있어야 경험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로 엮깁니다. 우리가 낭비라고 불러온 그 시간에 뇌는 나를 유지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이 회로의 또 다른 제주는 엉뚱한 것들을 연결하는 능력입니다. 집중해서 일할 때 우리의 생각은 좁고 고든 길을 갑니다. 효율적이지만 길 바깥에 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마음이 풀려 있을 때 생각은 자유롭게 떠돌며 평소라면 만날 일 없는 기억과 지식들이 서로 부딪칩니다. 새로운 발상이란 대게이 뜻밖의

43:19 충돌에서 태어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 앙니 푸행카레의 일화가 유명합니다. 그는 어려운 수학 문제 하나를 붙들고 몇 주를 실름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연구를 잠시 접고 지질 조사 여행을 떠났는데 여행지에서 마차에 오르려고 발판에 발을 딛는 순간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해답이 아무 예고도 없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책상 앞에서 그렇게 애를 써도 오지 않던 답이 문제를 완전히 잊고 있던 순간에 찾아온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부화 효과라고 부릅니다. 어미새가 품은 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자라듯 손에서 놓은

44:07 문제도 마음 깊은 곳에서 계속 익어 간다는 것입니다. 몸을 살살 움직일 때이 효과는 더 커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지는 사람들에게 창의적인 발상이 필요한 과제를 주고 앉아 있을 때와 걷고 있을 때를 비교했습니다. 결과는 뚜렷했습니다. 걷는 동안 사람들은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걷기를 마친 뒤에도 그 효과는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걷기처럼 몸은 가볍게 바쁘고 머리는 한가한 상태가 생각이 떠돌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는 듯합니다. 실제로 역사 속의 사상가들 중에는

44:54 지독한 산책가가 많았습니다.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길을 걸어서 이웃들이 그를 보고 시계를 맞췄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입니다. 그들이 남긴 생각의 상당 부분은 책상이 아니라 길 위에서 만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오면 앞서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 다르게 들립니다. 여가 속에서 학문이 태어난다던 그리스인들의 믿음도 자기에게 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던 로마 철학자의 편지도 자유 시간이 창조를 낳는다던 러셀의 변론도 뇌 과학의 언어로 번역하면 놀랍도록 비슷한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옛 사람들이 내 회로를

45:41 알았을리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오랜 관찰과 경험으로 인간에게는 비어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2500년에 걸친 게으음의 재판은 이렇게 마지막 증언까지 들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판결입니다. 그 판결을 위해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 휴대폰을 손해 준 채 앉아 있던 한 사람에게로 말입니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습니다. 1년을 기다린 휴가 눈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마음은 어딘가 다른 곳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46:26 우리는 그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 불편함은 그 사람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2,500년의 역사가 통째로 들어 있습니다. 그가 느끼는 죄책감의 뿌리를 따라 내려가 보면 사막의 운막에서 정우의 악마와 싸우던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한가함은 영혼의 적이라며 하루를 빈틈없이 채우던 수도원의 시간표가 있고 일하는 것이 곧 소명이라던 종교 개혁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놀았던 한나절를 잃어버린 돈으로 계산하던 상인의 장부가 있고 아침 6시에 울리던 공장의 종소리가

47:12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겹겹이 쌓여 바닷가에 앉은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이렇게 속삭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냐고. 지금이 시간에도 남들은 앞서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목소리들도 있습니다. 한낮의 광장에서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누던 그리스하지 않는 그 시간이야말로 삶의 목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는 바쁜 사람이야말로 자기 시간을 점령당한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고 편지에 썼습니다. 20세기에 어느 지독하게 성실했던 철학자는 예순이 되어서야 금면의

48:00 신화가 우리를 속여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과학은 실험 장비 속에서 뜻밖에 증언을 내놓았습니다. 멍안이 있는 그 시간에 뇌는 흩어진 경험을 모아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엮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게으음을 둘러싼이 길곡인 재판에서 어느 한쪽이 완전히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가는 왕자에 앉았다가 지옥으로 떨어졌고 장부의 손실항목이 되었다가 다시 변호인을 얻었습니다. 시대마다 판결이 뒤집혔다는 것은 어쩌면이 문제에 정답이 없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48:45 보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들, 쉬면 뒤쳐진다는 생각. 바쁘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라는 생각은 하늘이 정해 준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시대가 만들어낸 생각보다 젊은 발명품이었습니다. 인류가 시계에 맞춰 살기 시작한 것은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보면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죄책감보다 한가함을 사랑했던 시간이 훨씬 더 길었습니다. 음악에는 쉼표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리가 없는 자리. 연주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신표는 음악이 잠시 멈추는

49:30 곳이 아닙니다. 쉼표도 엄연히 음악의 일부입니다. 작곡가는 소리를 쓰는만큼이나 신중하게 침묵을 씁니다. 쉼표가 없는 음악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음이 빈틈없이 이어진 소리는 음악이 아니라 소음에 가까울 것입니다. 소리는 침묵이 있어야 노래가 되고 침묵은 소리 사이에 있어야 의미가 됩니다. 어쩌면 삶도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쉼을 삶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삶이 잠시 멈추는 공백으로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2500년의 이야기를 따라온 지금은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

50:17 같습니다. 취은 삶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이 아니라 삶이라는 음악에 처음부터 적혀 있던 쉼표였다고 말입니다. 바닷가의 그 사람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휴대폰을 내려놓습니다. 대단한 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파도 소리가 문득 크게 들렸을 뿐입니다. 밀려왔다 물러나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그는 파도에도 리듬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밀려오는 물과 물러나는 물. 어느 쪽도 헛된 움직임이 아닙니다. 물러남이 있어야 다음 파도가 옵니다.

51:02 그는 모래 위에 몸을 눕힙니다.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그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아주 오랜만에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어디에 적히지도 않지만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언젠가 또 바쁜 날들이 그를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다만 그런 날들 사이에서 문득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찾아왔을 때 그 시간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낭비가 아니라 쉼표라고 소리

51:49 없는이 자리도 내 삶이라는 음악의 일부라고. 25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남겨 놓은 그 오래된 문장들이 파도소리처럼 조용히 곁에 와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밀리언 마인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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