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 - 평생 교회 다녀도 모르는 ‘하나님과의 우정’

간략한 요약

이 영상은 시편과 기도를 주제로 하여, 시편이 성경에서 기도를 배우는 중요한 책임을 강조합니다. 주기도문이 기도해야 할 내용을 제시한다면, 시편은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특히 시편 25편 14절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우정이 가능하다는 점도 강조합니다.

  • 시편은 기도를 배우는 곳으로, 모든 상황에서 기도하는 방법을 제시함
  •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이 기도를 통해 가능하다는 점 강조

시편과 기도

영상은 시편과 기도의 관계를 설명하며 시작합니다. 시편은 성경 중 기도를 배우는 책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기도해야 할 내용을 잘 요약해 줌에 반해, 시편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

시편 25편 14절을 인용하며, 여호와의 친밀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친밀함'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소드'라고 하며, 이는 친구 같은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깊은 우정을 나누고자 하며, 기도를 통해 이러한 감사와 친밀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성과 현대 문화

영성에 대한 현대 문화의 관심이 커지면서 세속 문화 속에서 '종교적이지 않지만 영적이다'라는 개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규율이나 훈련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의 우정은 그런 혼란 속에서 진정한 친밀함과 헌신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과의 우정

하나님과의 우정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며, 성경은 이를 여러 구절로 뒷받침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사건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 불린 것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현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신과의 우정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성경의 관점은 이를 뒤집습니다.

우정과 순종

하나님과의 우정은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 15장 14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는 이들이 그의 친구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들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불순종은 우정의 끈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경고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행위나 도덕적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구원받아야 진정한 친구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계약적에서 친밀한 우정으로 변화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기도의 양방향 소통

기도는 하나님께 말하는 일뿐 아니라 역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향 소통이어야 하며,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진정한 우정을 형성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고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함

기도에서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을 원했으며, 이는 단순한 시각적 경험이 아닌 영적 통찰과 깊은 체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부분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우정

예수님의 죽음을 진정한 우정의 행위로 묘사하며, 사랑과 헌신을 통한 친구 관계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이를 통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우정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깊은 충만함을 주며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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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립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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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제가 시편과 기도에 대해 말씀드려야 하는데 어 시편은 성경의 기도책이고 기도를 배우는 곳이다 보니까 할 수 있는 말들이 굉장히 많은데 어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요약해 주지만 시편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곳이에요. 어 그래서 시편에서 인간이 처할 수 있는 모든 상황과 모든 조건이이 시편에 묘사되어 있어요. 그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상황을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 때문에 다를 수 있는 주제가 거의 무한한데 하지만 오늘은 하나만 다루려고 해요.

0:49 그 주제가 뭔지 그리고 왜 그 주제가 도움이 되는지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 제가 생각하고 있는 주제는 시편 25편 14절인데 어, 번역한 거를 보면은 이렇게 읽을 수가 있는데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십이라고 해요. 신구 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고 그리고 그들에게 어 하나님의 언약을 알게 하여 주신다는 거예요. 근데 여기서이 친밀하심이라는이 단어는 히브리어의 소드라는 번역인데요. 그 단어의 번역인데 친한 친구가 친한 친구에게

1:35 주는 그런 친밀하고 친밀한 조언과 충고 같은 거를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어떤 번역에서는 여호와의 비밀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과 함께 한다고 얘기를 하는데 그것도 같은 단어의 어 의미인 거예요. 왜냐면 친구에게 비밀을 말하고 그리고 속을 털어 놓는 거잖아요. 그래서 시편 25편 14절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우정의 관계를 갖는게 가능하다고 말을 하고 있는 거고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속을 털어 놓으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가까운 친구가 되신다는 거예요. 그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지만 기도가 의미하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과의 우정이에요. 왜 지금 이게

2:21 도움이 된다고 제가 생각을 하느냐면 영성이라는 단어를 잠깐 생각해 보면요. 영영 영성. 어, 이게 지금 굉장히 유행하고 있는 단어이고 많이 여러 뜻으로 쓰이는데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뭐 기도를 하는 뜻을 얘기를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어 주의해야 하는게 있어요.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경고인데 우리 세속 문화가 영성을 좋아하는 거는요. 그래서 얘기를 할 때 나는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영적이다. 어라는 어 뜻으로 쓰잖아요. 그리고이 종교적 그리고 뭐 영적이 뜻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저 사람들이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거는 나는 영감을 받고 싶고 나를 초월한 어떤 신적인 것과 연결된

3:08 느낌을 갖고 싶지만은 [콧방귀] 하지만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 그 뜻인 거예요. 나는 제자의 훈련을 원하지도 않고 그리고 공동체에 속해야 하는 훈련을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영적이다는 어떤 신적인 실제나 아니면은 뭐 사랑과 평화 그런 것들과 연결되는 느낌은 원하지만 내 방식대로 살고 싶다라는 거예요. 근데 흥미로운 거는 하나님과의 우정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이 현대인들이 찾고 있는 그 친밀함을 주고 있거든요. 주는 거거든요. 그리고 사실 다른 종교들이 줄 수 없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줄 수 있는 거예요. 동시에 진리에 대한 헌신,

3:54 제자도 희생이 전부 거기에 있어요.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나머지 시간을 제가 이렇게 나눠보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의 우정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우정에 대해서 그게 가능한지 왜 가능한지 어떻게 가능한지 세 가지를 보겠습니다. 첫째 가능합니다. 가능해요. 성경이 그렇게 얘기를 해요. 출애굽기 33장 11절.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그리고 야고보서 2장 23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다고 나와요. 아리스토탈레스는 이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왜냐면

4:39 그는 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말도 안 된다고 봤고요. 어, 그리고 그 이유는 인간은 어, 신과 충분한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라고 얘기를 했었어요.이 [콧방귀] 아리스토텔레스가 신과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얘기를 했었을 때 우리가 충분한 공통점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은 만약에 그렇다면은 친구가 될 수 없는게 맞는 거예요. 어, 왜냐면 CS 루이스는 어, 고대의 우정 개념을 가장 잘 현대적으로 해석한 사람 중 하나인데 그의 책네 가지 사랑에서 어, 이렇게 얘기를 해요. 에로스. 그러니까 어 즉 남녀 간의 로맨틱한 사랑과 그리고 필로스 어 우정의 사랑은 어 본질적으로 다른 건데

5:27 이거를 묘사를 한다면은 에로스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어 흠모를 하는 거고요. 하지만 필로스는 어 그 우정은 어 두 사람이 어깨를 나라니하고 다른 뭔가를 같이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루이스가 말하기를 우정은 언제 시작하냐면 우리가 속으로나 아니면 겉으로 어 얘기를 하기를 어 너도 그래라고 말할 때 시작하는 거예요. 너도이 그림을 좋아해. 너도이 음악을 좋아해. 너도 부모님과 같은 경험을 했구나라고 하면서이 공통점을 갖는 데서 우정이 시작되는 거예요. 너도 그래. 그게 우정의 시작이고 우정이 가져오는 특별한 친밀함의 시작이 되는

6:13 거예요. 그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신을 바라보면서 너도 그래라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그런데 성경은 가능하다고 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마 여기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일 텐데 혹 똑똑한 사람들이 여기에 만약에 있다면은 아마 3,년 후에 어 그분의 글을 사람들이 읽고 있겠죠. 어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똑똑하지만 틀렸어요. 왜 틀렸냐? 성경 신학 거의 [목을 가다듬음] 모든 성경 신학이요. 우리에게 왜 하나님과의 우정이 가능한지를 보여 줘요. 첫째 하나님의 교리를 봅시다. 우리는 3위 일체 하나님을 섬겨요. 음. 물론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6:59 어 새 위격이신 어 하나님을 섬겨요. 새 위격. 성부 성자 성령. 그래서 영원토록 서로를 알고 사랑해 오신 분.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 삼위 일체 하나님 자체가 우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위일체 교리는 어 어떠냐면 하나님의 하나 되심에 너무 무게를 두거나 아니면 새 위격에 너무 무게를 두거나 하면은 문제가 생겨요. 어 그래서 성경적인 이해를 벗어나기 때문에 항상 균형을 지켜야 하는데 지금은 우리는이 새 위격에 대해서 어 볼 거예요. 그리고 어거스틴 성 어거스틴이요. 어 무슨 얘기를 했냐면 어거스틴이 지적했던 거는 만약

7:46 하나님이 하나의 위격이셨다면 그래서 한 위격으로만 존재하다가 어 그리고 나서 나중에 천사나 인간을 창조하기 시작하셨다면은 그러면 사랑은 오직 다른 인격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한 위격으로만 시작하셨다면 사랑이 되기 전에 먼저 능력이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능력으로 존재들을 창조하시고 존재들이 생긴 다음에야 관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이 되는 거예요. 하지만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하나님이 다닐이셨다면 능력이 1차고 사랑이 2차적이 됐을 건데 하지만 하나님은 삼위 일체이시고 영원 전부터 우정이신 하나님이기

8:32 때문에 따라서 우정, 소통 사랑, 관계가 그분에겐 일차적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리는 하나님은 우정의 관계라는 것이고 둘째 창조의 교리.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어요. 거기에 많은 의미가 있지만 한 가지만 보면은 우정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요 사람들의 임종의 시간을 많이 봤는데 왜냐면 목사를 오래 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말할 수 있는 거는 그 자리에서 누구도 죽으면서 아, 돈 많이 벌 걸, 일을 더 많이 할 걸, 더 많은 어 권력을 쌓을 걸이라고 말하는 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항상 하는 말이 자녀들과 더 시간 보낼 것, 친구들과

9:18 더 잘 지낼 걸 하면서 항상 관계를 얘기해요. 왜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은 삼위 일체이시기 때문에 사랑, 우정, 관계가 일차적인 거예요. 그리고 구속의 역사 전체가 있어요. 어, 여러분 아세요? 구속의 역사 전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목을 가다듬음]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우정 우정의 행위라는 거인데 첫째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잖아요. 성자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어요. 그게 무슨 의미예요? 히브리서에 보면은 그분이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해요. 죄를 빼고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죄를 제외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으로 사는게

10:04 어떤 건지 아시는 거예요. 인생을 사는게 어떤 건지 아는 것에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십자가에서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가장 위대한 우정의 행위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거라고 다른 어떤 신도 종교의 어떤 신도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않아요. 다른 어떤 신도 우정의 첫 번째 행위인 그 성육신을 거치지 않았잖아요. 내가 너처럼 되겠다. 내가 너처럼 약해지고 너처럼 죽을 수 있게 되고 너처럼 죽임을 당할 수 있게 되겠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뭘 하셨어요? 우리의 삶뿐 아니라 우리의 죽음 그리고 우리의 어둠 안에서 우리처럼 되신 거예요. 사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10:50 우리의 버림받음을 체험하신 거예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의 버림받음 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을 가다듬음]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을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 울부짖으시고 외치시고 배신당하시고 그런 하나님의 아들을 보세요. 우리가 겪는 그 모든 것들을 겪으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그것까지 겪으시고 이제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보고 당신도 그러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린 거예요.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게 가능한 것이고 성경 신학의 모든 측명이 그것이 가능하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11:36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겁니다. 자, 이제 우리가 지금 기도 얘기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가능하고 왜 가능한지 봤는데 어떻게 가능해지냐? 우리가 하나님과의 우정이라는 관점에서 이걸 기도로 생각하는게 좋은 이유가이 우정이 어 기도의 틀을 제공해 주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은 어 제가 다섯 가지 어 하나님과의 우정을 가꾸는 방법을 말씀해 드릴게요. 어, 첫 번째 순종. 그거 얘기할 줄 몰랐죠.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12:21 순종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 요한복음 어 15장 14절에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하셨잖아요. 그리고 시편 66편 18절에 말해요. 내가 내 마음의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아, 제가 아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요. 저한테 뭐라 그러냐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과 있었던 그 친밀함과 우정을 잃었다고 얘기를 해요. 여기서 아리스토탈레스가 약간 어 관련이 있고 그 사람 한 말한게 맞는데 어 이게 그가 신과의 우정을 말하기 꺼렸던 이유일 텐데

13:07 우리가 너무 다르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성경 신학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걸 제가 보여 드린 거잖아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속죄와 성육심 때문에 놀랍게도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건데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으신 건 아니에요. 물론 성육신과 속죄 때문에 우리와 많이 비슷해졌지만 우리와 완전히 같지는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우정을 그분을 우리와 똑같이 대하는 걸로 생각하면 안 돼요. 순종이 우정에 필요한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면 그분을 더 닮아가게 돼요. 이걸 성화라고 얘기하는데 그리고 오해 우정을 가져본 사람들은

13:53 친구들이 서로에게 스며든다는 걸 알잖아요. 그래서 서로를 닮아가고 그리고 서로를 달 날카롭게 하고 그래서 서로가 더 가깝게 되잖아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그 몫을 이미 자기 몫은 하셨어요. 우리처럼 되시려고 엄청나게 먼기를 오셨잖아요. 성육신과 속죄를 통해서. 하지만 우리가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더 닮아가는 거는 오직 순종을 통해서인 거예요. 그래서 순종 없이는 우정이 없는 거예요. 우정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이고 가까워지고 서로 배우고 서로 닮아가는 건데 그리고 순종이 하나님과의 우정에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얘기를 해요.이 사람이 너의 친구가 되려면 그 사람

14:39 자신 그대로를 받아들여 줘야 한다. 어, 왜냐면 투명성과 정직함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목을 가다듬음] 그 사람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알고 그 사람이 외식하지 않고 그 사람이 내 앞에서 자기 자신이 되어 수 있게 해야 하는게 그게 우정이잖아요. 만약에 그렇다면이 우주 전체를 다 만드신 주인과 우정을 가질 때 우리는 그분을 그대로 용납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건 순종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면은 엘리자베트 엘리엇이 이런 말을 했었는데 제가 잊지 못하는 말인데 어 엘리자베 엘리엇의 남동생이 토미라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그 남동생한테 그 아들한테 네가 장난감을 갖고 놀 수는 있지만 끝나면 꼭 정리를 해야 돼라고 말씀을

15:25 하셨어요. 근데 하루는 토미가 어 그걸 가지고 놀다가 뭐 장난감이 아니라 보통 종이 접기 하면서 이제 종이조가리 같은 것들인데 그런 것들 다 꺼내서 막 놀다가 이제 땅바닥에다가 다 어지러 놓은 다음에 그러고 나서 기억한게 아 나 이제 어 음악 레슨 할 시간이지 어 해서 어 리빙룸으로가 가지고 거실로 가서 피아노에 가가지고 이제 피아노 어 연습을 어 하기 시작을 한 거예요. 그때 이제 어머니랑 그리고 엘리자베 엘리엇이 들어와서 누나가 들어와 가지고 이제 어머니가 말씀하세요. 토미야, 너 장난감 다 치우지 않았잖아라고 했는데 토미가 이제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이 피아노를 칠 때 연습을 찬송가를

16:11 통해서 한 거예요. 그니까 찬송가를 치고 있었던게 그가 연습하는 방법인데 어 그래서 토미가 엄마 나 지금 예수님한테 찬양하고 있어요라고 얘기를 한 거예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뭐라고 어 그러셨냐면 불순종하면서 예수님께 찬양해도 아무 소용 없어라고 말씀하셨대요. 그런데 우리 지금 교회가 주일에 뭔가를 느껴보려고 오지만 불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로 가득해요. 그래서 여기 와 가지고 무슨 기분 좋게 느끼고 싶고 약간 하이 높아지기를 원하고 그런 감정을 느기를 원하는데 예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을 위해

16:58 필요한 첫 번째는 순종인 거고 두 번째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 팀켈러가 결국 그 얘기를 또 하는구나. 예, 맞아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이유입니다. 저는 이거를 말해야 돼요. 그 이유는 어 시편 1편에 그리고 제가 시편 1편을 얘기하기 전에 만약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데 그리고 당신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하심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당신이 행위로 구원받는게 아니고 도덕적 노력으로 구원받는게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통한 선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17:44 하나님과의 관계는 당신과의 관계는 그냥 용역관계고 계약 관계밖에 될 수가 없어요. 기본적으로 당신의 친구가 아니라 상사인 거예요. 그래서 고용주를 위해서 우리가 일할 때 관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고용주와 상사와 뭐 친근할 수는 있지만 그 관계의 근본적인 성격이 있잖아요. 아무리 친근해도 그거는 용역 관계인 거예요. 계약 관계인 거예요. 내가 X YZ를 해야 하고 상사는 그에 대해서 급여을 주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X YZ를 하지 않하면 안으면 아무리 친근해도 결국 해고 당할 거란 말이죠. 그리고 반대로 내가 내 책임을 다 했는데 상사가 급여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말 그만둘 권리와 이유가 다 있는

18:30 거예요. 아무리 친근해도 네가 이만큼 나한테 돈을 주기로 했는데 내가 널 좋아하지만 나는 그만둘 거다. 그래서 친밀함이 있을 수는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관계는 고용 관계인 거잖아요. 상사지 친구가 아니에요. 당신이 은혜의 복음을 믿지 않는다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과의 우정을 가질 수가 없는 거예요. 불가능한 거예요. 용역 관계가 되는 거예요. 자기 할 일 하면서 혜택을 기대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면 어 그럼 내 혜택 어디냐라고 하면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 거예요. 하나님에게 친근했을 수는 있지만 사실 친구는 아닌 거고 사랑받았기 때문에

19:15 사랑하는게 아닌 거예요. 그냥 뭔가를 원하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시편 1편은 흥미롭게도 뭐라고 하냐면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며 주야로 묵상한다고 말해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거는 시편 1편은요. 특히이 구절은 적어도 저에게는 신약이 없이는 아무런 말이 안 되는 얘기예요. 신약이 있으면 완벽한 메시지예요. 여기서 그냥 율법을 기뻐한다고만 말하지 않잖아요. 순종만 한다는게 아니라 주야로 묵상한다고 여기 나오잖아요. 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이거를이 율법을 묵상하는 방식을

20:02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거예요. 어떤 이들은 십계명을 보고 나서는 아, 난 다 지킬 수 있는데 생각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거를 묵상하는 거를 보여 주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 거냐면 여기 살인하지 말라고 써 있지. 근데 그 진짜 뜻은 사랑하라는 거다. 미워하지 말라는 거다. 증오하지 말라는 거다. 여기 가음하지 말라고 써 있지만 진짜는 음욕을 품지 말아라고 말하는 거다.이 잘 들으세요.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지금 하시는 것처럼 말씀을 정말 묵상하고 이해하잖아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지 않은 자가 아니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이 상 산상순을 정말 진짜로 본다면 겁에 질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20:50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렇게 어 얘기를 하셨던 걸로 제가 아는데 누가 이렇게 얘기를 했대요.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산상순대로만 살면 된다라고 했대요. 그때 조수 목사님 뭐라고 했냐면 너 정말 그거 읽어봤냐? 하나님이 나를 산상수훈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거다라고 말씀하셨대요. 산상수훈이 사실이라면 나는 희망이 없다. 보세요.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고 그 율법을 영원한 절망으로 여기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성취하셨다는 거를 이해하는 거예요. 그분은 [콧방귀] 율법을 기뻐하셨고 십자가에 가셔서 우리가 살아야 했던 그 완전한

21:36 삶을 사셨고 우리가 죽어야 했던 죽음을 죽으셔서 이제 그게 다 해결됐기 때문에 우리가 그 율법을 기뻐할 수 있는 거예요. 율법은 내 친구를 기쁘게 하는 방법인 거예요. 그게 율법인 거예요. 그 내 친구가 뭘 싫어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알려 주는 거기 때문에 율법은 이제 더 이상 절망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사용하고 우정 안에서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이 내게 혜택을 주도록 강요하는 방법이 아니라 이제 내 친구를 사랑하고 친구를 닮아가는 방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순종이 첫째이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에 대한 믿음이 둘째인 거고 셋째는 역동적인 양방향 소통인 거예요.

22:22 양방향 소통 없이는 친구가 될 수 없잖아요. 기도가 당연히 하나님께 말하는 거라는 건 우리가 다 알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들어요? 한 방향으로만 가는 건 우정이 아닌 거예요. 때로는 기도가 조명탄처럼 쏠 때가 있어요. 우리가 그냥 쏘아 올리잖아요. 그래서 주님 제발 시편 61편에서처럼 어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지오니 그런 느낌이 우리가 들 때가 있잖아요. 땅 끝에서 부르짖습니다. 그렇게 물론 때로는 기도가 조명탄처럼 우리가 쌓아 올릴 때가 있지만 기도가 진정한 우정이 되려면 우리가 말만 하는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돼요.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된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실제로

23:10 어 어떻게 보면은 어 마음으로 듣는다고 하는게 어 맞는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어 예를 들어서 내가 그냥 느끼기에 하나님이 다른 도시로 이사해라. 아니면 뭐 직장을 그만둬라.이 사람을 어 만나라. 아니면이 사람을 그만 만나라라고 얘기를 하는 할 때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다고. 전 그럴 때마다 뭐라고 하냐면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럴 수도 있겠지. 네가 정말 느낀 걸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하나님의 지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해요. >>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저도 지금 이렇게 말씀을 드리지만 어 표현이 좀

23:57 애매한데 내가 만약 확실하지 않은 메시지를 친구한테서 받았다면 그건 좋은 소통의 방법이 아니잖아요. 그런 거 같은데 뭐 그런 뜻인가? 이 이럴 순 없는 거잖아요.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이 틀릴 수가 있는 거잖아요. 어지 위필드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이 위대한 설교자가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했었대요. 그런데 아들이 어렸을 때 불행하게 병으로 죽었어요. 그래서 위필드가 하나님의 감동이라고 생각했던게 결국엔 자기 교만이었다는 걸 깨달았대요. 그걸 하나님이 계시라고 착각하였던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정말 듣고 싶다면 그게 그게 우정인 건데 친구와 대화하는 것 그럼 성경으로 가야 해요. 왜냐면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24:44 하나님이 말씀하실뿐 아니라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고 얘기해요. 창세기 1장에 보면요.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셨더니 빛이 있었잖아요.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고 그다음에 빛을 만들었다고 안 해요.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그분의 능력인 거예요. 빛이 있으라 하시니까 빛이 그냥 있어진 거예요. 시편 29편에 어 뭐에 대해서 얘기를 하냐면 하나님의 어 말씀이 어 천둥처럼 진동한다고 표현해요.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시킨다고 해요. 창세기 1장처럼.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게 실제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능력인 거예요. 우리랑 같지가 않아요. 우리는 말하고

25:30 나서 그거를 행해야 되잖아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행하는 능력이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들을 때 그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들을 때 그게 그분의 능력이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고 그분의 실제가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1편은 어 첫 번째 시편이잖아요. 근데 시편은 기도책인데 근데 시편 1편은 기도에 관한 얘기가 아니에요. 오히려 성경 묵상에 관한 거예요. 근데 유진 피슨 같은 많은 학자들이 시편을 공부하면서 뭐라고 하냐면 시편 1편은 나머지 시편 전체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얘기를 해요. 마치 뭐와 같냐면 기도 생활을 의미 있게 하고 싶다면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깊이

26:15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로 그에 대해서 반응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이 하신 말씀에 대한 반응인 거지 그냥 내 느낌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는 거예요. 유진필러슨이 어 이것에 대해서 어 말한게 어이 친구는 어 서로 어 얘기를 해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에 반응하고 다시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반응하고 그렇게 친구 관계를 갖는다는 거예요. 왜냐면 기도는 실제로 존재하는 친구에게 반응하는 거거든요. 내가 상상하는 친구가 아니라 그래서 기도는 말씀으로 형성되게 해야 된다는 것이고 유진피럴이 쓴 글에 기도들이 난모하는이 세상에서 어 자기 종교적

27:02 감정을 채우고 뜨거운 열망만 키우는 기도들 가운데 시편은 확 다르게 눈에 뛴다. 우리 마음대로 내버려 든다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신에게 아니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하나님께만 기도하게 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신을 발견하려는 기도와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는 다르다. 전자는 종교적 만족을 탐력하는 것이고 후자는 순종하는 믿음이다. 전자가 더 재미있다. 하지만 후자가 더 중요하다. 기도의 핵심은 자신을 표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27:49 시편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던 사람들의 기도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모든 것과 관계하신다는 걸 아는 사람들의 기도였다. 중심은 그들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이었다. 감정, 영혼, 삶의 의미 다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기도의 이유는 아니다. 인간의 경험이 기도를 촉발할 수는 있다. 하지만 기도를 결정하지는 않는다.이 기도들을 조건 짓는 건 하나님에 대한 교리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경 음악처럼 틀어놓고 성경은 건드리지 않은 채 그냥 우리 안에 영적 감수성만 탐색하며 기도하고 싶어한다. [한숨] 하지만 시편을 기도의 교사로 삼기로

28:35 했다면 이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조건이다. 그래서 양방향이어야 하는 거예요. 친구가 되려면 하나님 말씀 안에 잠겨져 있어야 하고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응답이어야 되는 건데 이게 세세 번째인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본게 순종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 그리고 기도의 역동적인 양방향 소통을 봤어요. 기도가 말씀의 기반에서 어네 번째는 때로는 하나님의 임재의 실제적 경험은 시편에서 이거를 주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게 왜냐면 저는 장로교인이잖아요. 그래서 이게 좀 이상하게 들릴 수가 있는데 때로는

29:21 우리는 그분을 느껴야 해요. 자 보세요. 성경이 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고 얘기를 할 때 이게 무슨 의미인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오늘날에도이 디지털 에이지에 어 우리가 누군가와 이메일을 뭐 주고받거나 아니면은 온라인에서 어 연결이 되어서 아니면 전화로 통화를 하다가 처음으로 직접 이제 어 만나면 직접 보게 되면 그래서 악수하거나 포옹을 할 때 보통 이렇게 말하잖아요. 아유, 드디어 만나네요라고 얘기하잖아요. 그죠? 왜냐면은 우리가 누군가를 어 직접 얼굴대 얼굴로 보는 것은 어 이런 다른 어떤 매체보다 그

30:08 사람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잖아요. 여러 가지 데이터를 우리가 취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의 실제를 우리가 보는 거예요. 이메일이나 아니면 소셜 미디아나 아니면 전화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데이터를 어 우리가 얻는 거잖아요. 그래서이 사람들을 육체로 3차원으로 직접 보는 거잖아요. 그게 성경이 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고 할 때 그런 현상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서 이렇게 감각에 대한 표현을 쓸 때가 있는데 기도에 대해서 어 시편 27편에 다윗이 구하는 한 가지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제 생각에 실제 눈으로 뭔가 보겠다고 하는게 아닌 거거든요. 이거는 어

30:53 시편 63편에 하나님여 내가 주의 성소에서 주를 보아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음으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골수와 기름짓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또 시편에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했잖아요. 그냥 알지어다가 아니라 맛보아 알지어다. 왜 그런 감각의 표현을 쓸까요? 에드월드가 말하기를 우리가 생각으로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걸 아는 것과 기도 안에서 그분의 거룩하심을 마음에 감지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를 변화시키고 더 이상 죄를 짓고 싶지 않게 만든다. 추상적으로 하나님이 사랑 사랑이시라는 거를 아는 것과 실제로 그분의 사랑을

31:40 마음에 느끼고 감지하는 건 다르다. 그건 사랑받는 자로서 살아가게 한다. 국걸하는 대신에 어 분명 차이가 있다라는 거예요. 이런 경험을 우리가 만들어내는 건 아닌데 어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건 우리가 기도할 때 어쩔 때 그분의 얼굴을 볼 때가 있는 거예요. 우리의 눈으로가 아니라 존 오엔이요. 어이 사람은 여러 면에서 꽤 엄격한 신학자인데 이렇게 표현을 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먼저 마음의 실제적인 작동이 먼저 온다. 어 그래서 영적 진리의 생각과 묵상을 고정시켜라. 그다음에 마음의 모든 감정이 그것들을 향해 기울어지고 영적 진리에 달라붙게 해야 된다. 그게

32:26 말하는게 뭐냐면은 먼저 성경적 진리를 마음에 고정시키고 그다음 마음을 그쪽으로 기울이라는 거예요.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거예요. 내가 정말 이걸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면은 내 느낌이 달라질까? 물론 달라지죠. 내 행동이 달라질까? 물론 달라지죠. 스스로에게 한번 말해보세요. 내가 이걸 진짜로 붙잡았는가? 이건 정말 놀라운 진리인데 그럼 내가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나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냐 하면서 진리를 향해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고 존 오이 이렇게 말하는데 그리고 마침내 때로는 풍미와 맛이 찾아오는데 바로 거기에서 영적 삶의 달콤함과 만족이 깃들어 있다. 그때 우리는 경험으로 하나님이 자비하시고 그리스도의 [목을 가다듬음] 사랑이 포도주보다

33:11 낫다는 걸 맛보게 된다. 그리고 덧붙여요.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한 단순한 추측과 교리로서의 관념에 안주한다면 변화시키는 능력을 전혀 받을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영적 빛의 인도 아래 우리의 감정이 때로 온 마음으로 그분을 붙들 때 우리 마음이 그분에 대한 생각과 기쁨으로 가득찰 때 그때 능력이 성품의 변화가 그분에게서 나와 우리를 정결케 하고 성화를 더해주고 때로는 주목하세요.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채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운 우정은 순종을 의미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

33:57 오는 것이고 기도 생활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역동적인 교류에서 오는 거고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하기 때문에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는 하나님과의 우정을 깊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어 이런 여러 가지 중에 예수님의 죽음을 우정의 행위로 묵상하세요. 예수님의 죽음을 우정의 행위로 어데 키너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어 시편과 잠언 주석가인데요. 그가 우정을 정의할 때요. 이제 성경이 우정을 정의할 때 솔직함과

34:44 한결 같음으로 정의한다고 얘기를 해요. 솔직함은 어 뭐 취약함, 약해지는 나약해지는 것, 개방성 아니면 투명성 이런 것이고요. 한결 같음면 헌신이고 그리고 함께 머물러 주는 거예요.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더 친밀하니라라고 하잖아요. 솔직함과 한결 같다는 거는 친구는 항상 그 친구를 받아들여 주고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건데 항상 나를 위해 시간을내어 주고 마음을 열어주고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세요. 제가 대학 때 복싱 수업에 배운 것 중에 기억나는게 별로 없기는 한데 기억하는 거는 절대 두 손을 옆에 내리지 말라고 했어요. 항상 앞에 두라고. 손을 옆에 두지 말아라.

35:31 항상 앞에 둬라. 절대로 옆에다가 너트리지 말아라. 예수 그리스도는 손을 옆에 두신 것뿐만이 아니라 모세 박히셨어요. 더 이상 어떻게 취악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당신을 위해서 완전히 취악해 주셨고 당신을 완전히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고 그리고 절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으세요. 지옥의 모든 것이 쏟아졌는데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씀하시잖아요. 찰스전이 얘기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다보시며 자신을 부인하고 배신하고 떠나고 조롱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우정의 행위로 거기 그냥 머무르셨다. 머무르셨다라고 합니다.

36:16 어, 그 두 번째 프랑켄슈타인 영화가 있는데요. 제가 뭔 얘기하는지 의문하시는 분도 있으실 텐데 그 영화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였었는데요. 거기에 굉장히 유명한 장면이 있어요. 그 괴물이요.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으르렁망 거리잖아요. 근데 그 괴물이 이제 도망치다가 어 숲으로 도망치다가 제 눈먼 노인의 오두막을 발견해요. 그 노인은 장님이거든요. 그래서 괴물이 그 집에 들어갔었을 때 그 노인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오 하나님이 끔찍한 외로움에서 위로가 될 수 있는 친구를 좀 나한테 달라고 기도를 하고

37:02 있는데 그때 괴물이 들어온 거예요. 근데 노인은 보지 못하니까이 괴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거예요. 근데 괴물이 말을 못 하는 걸 알고 이제 노인이 뭐라고 하냐면 아, 너도 장애가 있구나. 나도 장애가 있다. 나는 보지 못하고 너는 말을 못 하니까 우리 같이 친구가 되자. 그래서 노인이 굉장히 친근하게이 괴물을 대해 줘요. 프랭컨슈타인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건데 먹여주고 돌봐주고 노래해 주고 그러면서이 우정의 힘 아래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이 괴물이 인간이 되기 시작해요. 그래서 음식 뭐 조화 같은 말들을 하기 시작을 해요. 그런데이 괴물을 찾던 군인들이 이제이 오두막을 들여다보고 나서 이제 괴물을 보고

37:47 공격하고이 오두말이 오두막이 불에 타요. 그래서 그 장면 끝에 보이는게이 괴물이 이제 숲으로 어 사라지면서 도망가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친구 친구 친구 내 친구 어디 있어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이 프랭킨 슈타인이이 괴물이 꼭 내 자신 같아요. 왜냐면요.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저는 남들이 저에 대해 말하는 것들로 꿰매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부모님은 저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를 하고 친구들은 저에 대해서 저렇게 얘기를 하고 그래서 모두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다른 판결을 내렸는데 그래서 제 자는 프랭켄슈타인 같은 괴물이었거든요.

38:33 그런데 제가 필요한 건 당신이 필요한 건 친구인 거예요. 참 친구. 이런 다른 모든 판결들을 뒤집어 엎고 당신을 진정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궁극의 친구. 우리는 모두 그 괴물 같아요. 모든 인간이 그렇게 외치고 있는 거예요. 친구 친구 친구 궁극의 친구를 찾을 수만 있다면 마침내 내가 되어야 할 인간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바로 여기 그분이 계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에 감사합니다. 다른 어떤 종교도 이거를 제공하지 않고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미쳤다고 하지만

39:19 하지만 그렇지 않음에 정말 감사드리고 이건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그냥 기도 말을 하는게 아니라 기도 안에서 주님의 친구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옵소서. 우리를 찾아 주시고 우리에게 얼굴을 보여 주시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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