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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2026년 7월 30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활주로에 미국 정부의 전용기 한 대가 내려앉았 습니다. 트랩을 밟고 내려온 주인공은 단정한 정장차림의 71세 여성이었 습니다. 곧이어 마이크 앞에 선 그는 또렷한 한국어로 준비해온 첫인사를 꺼냈습니다. 한국 국민 여러분께 정중히 인사드립 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을 대표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세계 최강대국이 보낸 새 대사가 자신이 태어난 도시로 돌아온 순간이었 습니다. 신임 주한 미국 대사 미셸 박스티, 한국 이름 박은주입 니다. 1975년 19살의 나이로 서울을 떠났던 시량민의 딸은 어떻게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가 되어 돌아왔을 까요? 오늘은 그 71년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구독과
0:45 좋아요 한 번씩 부탁드립 니다. 이야기는 1955년 6월 21일 서울에서 시작됩니다. 6 .25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겨우 2년이 지난 시점이었 습니다. 전쟁의 포성이 머진지 겨우 2년이 지난 시점이었 습니다. 당시 서울을 당시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 니다. 시내 한복판에도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그대로 쌓여있던 시절이었 습니다. 그 서울에서 박은주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태어났습 니다. 부모는 공산치아를 피해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내려온 시량민이 었습니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그렇게 남으로 내려왔습 니다. 두고 온 고향 땅은 철조막 너머의 세계가 됐고 돌아갈 길은 끝내 열리지 않았습니다. 온 고향 땅은 철조망 너머의 세계가 됐고 돌아갈 길은 끝내 열리지 않았습니다. 훗날 미셸 스틸은 간증해서 할아버지가 북녘에서 제재소를 이끌던 시절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어느 날 들이닥친
1:30 공산정권은 24시간 안에 소달구지 한 대에 실을 짓만 챙겨 떠나라고 명령했습 니다. 평생 일군 제사는 나무 한 토막 씻지 못했고 가족은 먹을 것만 챙겨 남쪽으로 내려왔습 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공산주의는 모두 똑같이 나눠준다지만 결국 몇몇만 갖고 나머지는 가난해지는 것이라고 가르쳤습 니다. 훗날 트럼프 대통령은 그의 가족을 공산주의를 탈출한 가족이라고 직접 소개했습 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가족은 폐허가 된 서울에서 맨손으로 새 삶을 시작했습 니다. 미군의 원조물자와 시장 좌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 시절 수많은 서울 가정 가운데 하나였습 니다. 이 시량민 가정의 기억은 70년 뒤까지 이어지는 이 이야기 전체의 뿌리가 됩니다. 박은주의 어린 시절은 서울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무렵
2:15 가족 전체가 바다 건너 일본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입니다. 아버지는 오사카에서 한국 문화원을 이끌며 교민사회를 돌봤습니다. 어머니는 도쿄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습 니다. 당시 일본에는 식민지 시기에 건너간 한인과 그 후손 수십만 명이 뿌리내려 살고 있었습니다. 차별과 서름 속에서도 한국어와 한국 이름을 지키는 공동체였 습니다. 어린 박은주는 그 교민사회 한복판에서 자라며 일본어를 익혔습니다. 한때는 일본 안에 중국기 학교에서도 공부해 어린 나이에 한, 중, 일 세 문화를 모두 몸으로 겪었습니다. 그는 훗날 이 시절의 경험이 동아시아 안보를 보는 자신의 눈을 만들었다고 회고했습 니다. 학업을 이어간 그는 도쿄의 명문 일본여자 대학에 진학했습 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공부한 소년은
3:01 이미 두 개의 언어와 두 개의 세 개를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5년 가족은 다시 한 번 짐을 쌌습니다. 이번 목적지는 태평양 건너 미국 캘리포니아 이번 목적지는 태평양 건너 미국 캘리포니 아였습니다. 한인의 미국 이민은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난 노동자 100여 명에서 시작됐습 니다. 하지만 이후 반세기 동안 미국은 아시아인의 이민을 사실상 막아놓고 있었습니다. 그 문이 다시 열린 것이 1965년 국적 차별을 없앤 하트셀러 법이었습 니다. 1970년대 내내 한 해 3만 명 안팎의 한국인이 아메리칸 드림을 조차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대로 주변에는 코리아타 운이라는 하와이 사탕수수 입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대로 주변에는 코리아타 운이라는 한인 거리가 빠르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한국 간판을 다한 식당과 마켓이 들어서고 한국어 신문과 방송까지 생겨난 작은 한국이었 습니다.
3:46 19살 박은주도 바로 그 이민 물결 속에서 캘리포니아 땅을 밟았습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페퍼다인 대학교에 들어가 경영학을 공부했습 니다. 이어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MBA, 경영학 석사학위까지 마쳤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영어까지 3개의 언어가 그의 자산이 됐습니다. 국어와 일본어 그리고 영어까지 3개의 언어가 그의 자산이 됐습니다. 당시 한인 이민사회의 구심점은 교회였고 미셸의 집안은 무려 4대째에 이어온 기독교 가정이었 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고 여름이면 성경공부 모임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매일 아침 가족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며 하루를 여는 습관은 평생 그대로 이어졌습 니다. 1981 년에는 젊은 변호사 쇼인 스틸과 결혼해 미셸 스틸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남편 쇼인 스틸은 훗날 캘리포니아 공화당
4:31 주위에 남편 숀스틸은 훗날 캘리포니아 공화당 주위원장까지 오르는 골수 공화당 사람이었 습니다. 두 딸을 낳은 미셸스틸은 겉보기엔 평범한 이민자 주부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의 작은 가게에 종이 한 장이 날아들이면서 이야기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당시 로스앤젤 레스에서 작은 샌드위치 가게를 꾸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가게로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판매세 추징고지서가 도착했습 니다. 성실하게 세금을 내온 어머니에게 날아든 명백히 부당한 추징이었 습니다. 퇴금을 내온 어머니에게 날아든 명백히 부당한 추징이었 습니다. 영어가 서툴렀던 이민자 어머니는 고지서를 붙든 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관청과 다퉈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며 딸 미셸이 대신 싸움에 나섰습니다. 서류를 파고들고 관청문을 두드리며 그는 이민자에게 미국 행정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몸으로 배웠습니다. 이 고지서 한 장이 훗날 그의 인생 항로를
5:16 완전히 바꿔놓게 됩니다. 하지만 그 전에 미국 사회 전체를 뒤흔든 사건이 먼저 터집니다. 1992년 4월 29일 로스앤젤 레스가 불타오르기 시작했습 니다. 한해전 흑인 운전자 로드니킹을 집단구타한 백인 경관들에게 배심원단이 무죄 편결을 내린 날이었습 니다. 분노한 군중의 방화와 약탈은 엉뚱하게도 한인 상권, 코리아타운을 정면으로 덮쳤습니다. 비슷한 시기 한인 가게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 탓에 흑인 사회와 한인 사회의 감정은 이미 위험수위 였습니다. 경찰 병력은 부유한 지역을 지키는데 집중됐고, 코리아타운은 사실상 무방비로 방치됐습 니다. 한인 청년들은 스스로 총을 들고 상점 지붕 위로 올라가 삶의 터전을 지켰습니다. 한인 라디오 방송은 밤새 피해 상황과 구조 요청을 중개하며 사실상 재난본부 역할을 했습니다. 폭동은
6:01 주 방위군이 투입되고서야 가라앉았고 닷새간 5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인 소유 상점 2300여 곳이 불타거나 약탈당했 습니다. 전체 재산 피해 10억 달러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한인들의 몫이었습 니다. 수십 년 동안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 일군 재산이 단 며칠 만에 잿더미가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래 일군 재산이 단 며칠 만에 잿더미가 된 것입니다. 한인사회는 이 사건을 지금도 날짜 그대로 4 .29라고 부릅니다. 37살의 전업주부 미세스틸도 그 불타는 도시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훗날 한인들의 목소리를 전해줄 통로가 주류사회 어디에도 없었다고 이 시기를 돌아봤습 니다. 폭동 이후 한인사회는 시민권 취득과 유권자 등록운동에 대대적으로 나섰습니다. 투표하고 출마하고 자리를 차지해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배운 것입니다. 1993년 미셸 스틸은 리처드 라이어든의 로스앤젤레스
6:47 시장 선거 캠프에 합류했습 니다. 주방과 거실을 지키던 주부가 미국 정치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 순간이었 습니다. 이후 10여 년간 그는 로스앤젤레스 시의 위원직들을 거치며 바닥부터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소방관 채용에 인종 할당을 두자는 논의에 그가 반대하면서 논쟁이 터집니다. 집에 불이 나면 색깔을 보고 끌 겁니까? 자격 있는 사람이 불을 꺼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의원들은 그를 꼭두각시라고 비난했고 신문에는 연일 공격기사가 실렸습니다. 의원들은 그를 꼭두각시라고 비난했고 신문에는 연일 공격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시절 그는 새벽 4시마다 신문을 펼쳐 자신의 기사부터 확인해야 했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라고 기도 속에서 불평하던 시기였다고 그는 훗날 고백했습 니다. 그는 훗날 이 시련이 오히려 자신을 보수 정치인으로 각인시킨 발판이 됐다고 회고했습 니다. 그리고 2006년 미셰스틸은 인생 최대의 승부수를
7:32 던집니다. 캘리포니아의 세금징수를 관장하는 기관 조세형평국의 위원선거에 출마한 것입니다. 위원 선거에 출마한 것입니다. 십수년 전 어머니에게 부당한 고지서를 보냈던 바로 그 계통의 기관이었 습니다. 주 전체를 나눈 선거구에서 뽑는 선출직 위원 4명 가운데 한 자리였습 니다. 결과는 당선, 당시 기준으로 미국에서 한인이 오른 가장 높은 선출직이라는 기록이었 습니다. 그가 맡은 지역구의 납세자만 900만 명, 관할세수는 한 해 146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기억하는 세금 관료는 부당하게 거친 세금부터 찾아내기 시작했습 니다. 재임 중 그가 5500명의 납세자에게 돌려준 돈은 4200만 달러였습 니다. 재임 중 그가 5 ,500명의 납세자에게 돌려준 돈은 4 ,200만 달러가 넘습니다. 한인 언론이 그를 900만 납세자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도 이 무렵입니다. 2010년 재선에 성공했고, 2011 년에는 동료 위원들의 손으로 부위원장에 뽑혔습니다.
8:18 2014 년에는 무대를 옮겨 인구 300만의 오렌지 카운티 슈퍼바이저에 당선됐습 니다. 카운티의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로 그는 2017년과 2020년 두 차례 의장까지 지냈습니다. 이 시기, 그의 인생을 바꿀 또 하나의 인연이 만들어집 니다. 2018년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민주당의 텃밭, 캘리포니아를 찾았습니다. 그때 공항에 나가 트럼프를 맞이한 지역 선출직은 미셸스틸 단 한 명이었습 니다. 트럼프는 이 장면을 잊지 않았고, 이둠의 글을 아시아태 평양계 자문위원회에 위촉했습 니다. 그리고 2020년 11월, 미셸스틸은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해 민주당 현역 할리루다를 꺾습니다. 해안도시 헌팅턴비치 일대, 캘리포니아 48선거 구에서 거둔 승리였습 니다. 영 김, 메릴린 스트리클 런드와 함께 사상 최초의 한국계 여성 연방 하원의원이
9:03 된 것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난 실향민의 딸이 65세의 나이에 워싱턴 연방의회에 입성한 순간이었 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입성 뒤에는 그림자도 있었습니다. 새벽 2시 반까지 이어지는 표결과 살인적인 일정 속에 그는 딸의 생일마저 놓치고 말았습니다. 괴로움 속에 눈물로 접속한 수요일 아침에 의원 기도 모임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 동료 의원은 자기 캠프의 직원이 집앞에서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아픔을 나누며 그를 위로했습 니다. 그는 흔날 하나님이 주신 자리이니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이 시기를 간증했습 니다. 워싱턴에 도착한 그는 사회주의에 맞선다는 기치를 내건 공화당 의원 그룹 Free dom Force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공산주의를 피해온 가족의 딸이라는 이력이 그의 정치 브랜드 그 자체였습 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한반도
9:48 문제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그는 북한 인권 문제에서 미 의회 안에서 가장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의원 가운데 하나였습 니다. 당시 미국에는 북한에 가족을 둔 한인 이산가족이 10만명 규모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북한의 길이 열리는 즉시 상봉을 주선할 수 있도록 이산가족 명단을 미리 등록해두는 법안을 직접 발의했습 니다. 부모가 두고 온 북녘당의 이산가족 문제는 실양민 2세인 그에게 남의 일이 아니었습 니다. 2021년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던 종전선언에는 의회 차원의 반대 움직임을 앞장서 이끌었습 니다. 북한의 핵 위협이 그대로인데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반대의 논리였습 니다. 북한의 핵 위협이 그대로인데 전쟁이 끝났다. 그는 북한 정권의 예측 불가능성을 가장 큰 위협으로 꼽으며 한미일 세 나라의 동맹 강화를 일관되게 강조했습 니다. 하버드대학교 램지어 교수가
10:34 위안부 피해 역사를 왜곡한 논문을 내자 규탄 대응을 주도한 것도 그였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스파이 활동이 미국을 존먹고 있다며 의회에서 가장 강경한 목소리를 낸 것도 그였습니다. 실제로 중국 여성 스파이와 얽힌 동료 하원의원의 자격 문제를 정면으로 공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위구르와 파룽공을 향한 중국의 인권탄압 그리고 탈북민 강제 북송 문제에서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중국 정부가 미국 대학 곳곳에 세운 산정기관 공자학원의 확산에도 제동을 걸었습니다. 교육에서는 부모가 자녀교육을 알 권리를 담은 부모 권리장정 법안을 앞장서 추진했습 니다. 성경적 가치관에 따라 결혼과 가정을 지키는 목소리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2022 년에는 선거구를 옮겨 재선에 성공했습 니다. 베트남계 주민이 많은 이 새 지역구에서도 그는 민주당 후보를
11:19 여유있게 따돌렸습 니다. 민주당 우세 지역에서만 6차례 연속 승리, 미국 언론은 그를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2024년 11월 그 연승신화가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상대는 베트남 난민 가정에서 태어난 젊은 변호사 데릭 트렌이었 습니다. 공산정권을 피해 미국에 온 가족의 자녀끼리 맞붙은 묘한 대진표였 습니다. 개표 초반에는 현역인 미셸 스틸이 꾸준히 앞서나갔 습니다. 하지만 뒤늦게... 도착한 우편 투표가 열리면서 표 차이는 하루하루 줄어들었 습니다. 개표는 몇 주씩 이어졌고 최종 결과는 약 600표 차이의 석패였습 니다. 30년 넘게 쉼없이 달려온 정치 인생이 처음으로 멈춰선 순간이었 습니다. 70을 눈앞에 둔 나이였기에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은투를 예상했습 니다. 하지만 워싱턴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2026년 4월 13일
12:04 트럼프 대통령이 미셸 스틸을 주한 미국 대사로 전격 지명한 것입니다. 또한 미국 대사로 전격 지명한 것입니다. 트럼프는 지명 발표에서 그를 공산주의를 탈출한 가족 출신의 미국 애국자라고 소개했습 니다. 사실 그의 이름은 트럼프 취임 직후부터 1년 넘게 대사 후보로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직업 외교관이 아닌 정치인 출신, 그것도 대통령과 직통하는 최측근을 보낸 파격이었 습니다. 워싱턴 전가에서는 미국의 전략 초점이 중동에서 중국과 동아시아로 옮겨가는 흐름 속의 인선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가장 강경한 반중 정치인을 베이징의 코앞, 서울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구한말 청나라와 일본과 러시아가 부딪히던 한반도는 이제 미국과 중국이 마주서는 최전선이 됐습니다. 낙선한 정치인에게 찾아온 조국을 향한 마지막 임무였습 니다. 6월 17일 미국 상원은 찬성 55표, 반대 39표로
12:49 인준안을 통과시켰 습니다. 민주당 의원 상당수가 반대표를 던진 여야가 갈린 표결이었 습니다. 주한 미국 대사는 1949년 초대 존 무초 이후 77년을 이어온 한미동맹의 핵심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한국계가 오른 것은 오바마 시절의 성 김대사에 이어 역대 두 번째였습 니다. 그 자리에 한국계가 오른 것은 오바마 시절의 성김 성 김대사 역시 서울에서 태어나 이민을 떠난 인물이었지만 여성으로 한국 태생은 미셸 스틸이 처음입니다. 여성 대사로는 2008년 캐슬린 스티븐스 이후 두 번째, 연방 하원의원 출신으로는 역사상 처음이었 습니다. 그리고 2026년 7월 30일, 그를 태운 전용기가 인천국제 공항에 내려앉았 습니다. 전임 골드버그 대사가 떠난 뒤 1년 6개월 넘게 비어있던 자리가 마침내 채워진 것입니다. 공항 앞에는 그의 귀환을 환영하는 시민들과 반대하는 단체가 동시에
13:34 몰려나와 있었습니다. 북한 인권과 대중 강경 노선이 이재명 정부의 기조와 부딪힐 수 있다는 관측도 백악관과 직통하는 대사가 왔다는 기대도 함께 쏟아졌습 니다. 칠순의 신임 대사는 그 앞에서 준비해온 한국어 인사를 또박또박 읽어내려 갔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을 대표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망감이 교체합니다. 그는 이어 한미동맹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동맹이라며 첫 공식 일정을 시작했습 니다. 첫 공식으로 성명에서는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동맹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언급했습 니다. 관세협상과 3 ,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투자, 안보협력까지 새 대사의 책상에는 이미 숙제가 쌓여 있습니다. 외교구의 신임장 사본을 제출하는 대로 그의 공식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하와이 사탕수수 밭에서 시작된 120여
14:20 년의 한인 이민사는 이제 200만 명 규모의 미주 한인사회로 자라났습 니다. 이제 200만명 규모의 미주 한인사회로 자라났습 니다. 그 이민물결에 한가운데 있던 19살 박은주는 51년만에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 미셸 박스틸이 되어 그 서울로 돌아왔습 니다. 영상이 마음에 드셨다면 구독,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리 겠습니다. 영상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 그리고 다음 영상에서 다뤘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더 좋은 영상을 제작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역사브리 핑이었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