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쫓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다 | 쇼펜하우어 행복론 | 아리스토텔레스 행복론”의 전체 스크립트입니다. 타임스탬프를 클릭하면 해당 장면부터 영상이 열려요. 다른 영상이 필요하다면 유튜브 스크립트 추출기를 이용하세요.
0:00 1850년대 프랑크프르트의 어느 늦은 오후입니다. 비수듬이 들어오는 햇살 아래 책장 가득친 책들 사이로 먼지가 유형하고 쇼펜하우어가 창가 위자에 앉아 푸드 아트마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로크소리와 함께 한 제자가 서제로 들어옵니다. 선생님 들어가도 되겠십니까? 들어오게 아트마가 짓지 않는 걸 보니 자네는 오늘 마음이 꽤 무거운 모양이군.이 녀석은 가벼운 인간에겐 으르렁되거든. 선생님, 오늘은 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자네가 웃으면서 올 때보다 이럴 때가 훨씬 대화할
0:46 만하지. 어디? 무슨 이야기인가? 행복에 대해서입니다. 행복이라. 하필 그 주제를 들고 왔군. 선생님이 불편해 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요즘 제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질문이 하나 있어서요. 저는 올해로 쉰 다소입니다. 정을 때는 뭔가를 이루면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학귀를 받으면, 좋은 자리를 얻으면, 가정을 꾸리면 그러면 행복해질 거라고요. 그런데 선생님, 그 모든 걸 어느 정도 이룬 지금 저는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공허함 속에 있습니다. 이게 대체 뭡니까?
1:32 이루었는데 왜 이뤘습니까? 쇼페하워가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뜻밖에 이름을 꺼냅니다. 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나? 니코마코스 율리학은 훑어본 적이 있습니다. 훑어 보았다. 그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렇게 대야지.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책을 덮고 다음날 똑같이 살아간다. 하지만 그 늙은 그리스인이 2,300년 전에 한 말이 있어.이 말을 자네가 정말로 들었다면 지금 그 공허함의 정체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 어떤 말씀이십니까? 인간은 세상 그 무엇보다 행복을
2:18 추구한다. 그건 너무 당연한 말 아닙니까? 당연하다고. 자네 방금 자네 입으로 모든 걸 이루었는데 행복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 당연한 말이 당연하게 실현되고 있다면 자네가 왜 여기 앉아 있겠나? 아리스토텔레시의이 말이 무서운 건 그것이 당연해서가 아니라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거의 아무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데 있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르게 들립니다.이 말에 쇼페나워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본적으로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 그러니까 그리스어로 에우다이모니아라는 것은
3:03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행복이 아닐쎄. 우리가 보통 행복하다고 할 때 떠올리는 것들, 마시는 것을 먹었을 때의 만족감, 승진했을 때의 쾌감,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봤을 때 따뜻함. 그런 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행복의 일부일 뿐. 행복 그 자체가 아니었네. 에우다이모니아를 지역하면 좋은 다이몬을 가진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 다이몬이란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내면의 영혼 혹은 자기 안에 어떤 본질적인 것이네. 그러니까 에우다이모니아란 자기 안에 가장 본질적인 것이 잘 작동하고 있는 상태. 자기 영혼이 제
3:49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거야. 요즘 말로 하면 이렇겠지. 나답게 살고 있는가?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상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했는데 그는 말하길 행복은 쾌락이 아니라 활동이라고 했어. 다시 말해 행복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뜻이야. 그리고 그 하는 것이란 인간의 고유한 기능, 즉 이성을 탁월하게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이었지. 그는이 탁월함을 아레테라고 불렀는데 흔히 덕이라고 번역하지만 나는 차라리 자기 고유의 역할을 가장 잘해 매는
4:37 것이라고 풀어야 더 정확하다고 보네. 제자가 여기서 솔직한 속내를 꺼냅니다. 그런데 선생님 이성을 탁월하게 발휘한다는게 쉰 다섯 먹은 저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젊었을 때야 뭔가를 배우고 도전하고 성취하는게 자연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런게 멀게 느껴집니다. 잠깐. 자네 지금 아주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네. 이성의 탁월한 발휘를 젊은이의 도전과 성추로 한정시키는 오류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아레테 탁월함이란 20배의 야망이나 30배의 경력사키와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네. 그것은 나이에 따라 형태가 변하지만
5:23 본질은 같은 것이야. 형태가 변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자네 나이에는 도리어 더 깊은 형태에 탁월함이 가능해지는 법이야. 생각해 보게. 나무가 봄에 꽃을 피우는 것과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 어느 쪽이 더 탁월한가? 꽃은 화려하지는 씨앗이 있네. 다음 세대를 품고 있단 말이야.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니코마코스 율리학을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바쳤다는 걸 기억하게. 그의 철학적 탁월함은 노년에 이르러 전해줌이라는 형태로 완성된 거야. 자네의 쉰 다섯은 꽃이지는 시간이 아니세 열매가 익어 가는 시간이야. 여기서
6:09 제자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 말씀에는 공감이 갑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상당히 다르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죠. 삶은 고통이라고 의지는 맨목적이라고이 세상은 가능한 세계 중 최악이라고. 그런 선생님이 행복을 논하시는게 조금은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자네 드디어 핵심을 찌르는 군. 솔직하게 대답하지. 나는 분명 이렇게 말했네. 삶의 본질은 고통이라고. 인간의 의지. 맹목적 삶의 유지는 끝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곧 권태에 빠지며 다시 다른
6:56 것을 원하게 된다고.이 진자 운동 고통과 권태 사이에 끝없는 왕복. 이것이 인간 존재의 기본 구조라고 말했지. 그렇다면 행복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여기서 잘 들어야 하네. 나는 행복이 불가능하다고 한 적이 없어. 내가 한 말은 행복을 직접 추구하면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네.이 차이가 결정적이야. 자네가 밤하늘에 별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잡히나 안 잡히지 하지만 고요한 호수에 비친 별은 볼 수 있네. 행복도 마찬가지야. 정면으로 달려들면 잡히지 않아 하지만 보통을 줄이고 삶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헛된
7:43 욕망을 내려놓았을 때 그 자리에 어떤 고요한 만족이 찾아오는 법이지. 나는 그것을 부정한 적이 없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와 내가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는게 아닐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고 했고 나는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다고 했네. 방향이 반대인 것 같지만 도착하는 곳은 의외로 비슷하단 말이야. 등산노의 남쪽길과 북쪽길이 결국 같은 정상에서 만나듯이 선생님 말씀을 정리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추구와 선생님의 고통 감소가 결국 같은 지점으로 수렴한다는 뜻입니까? 정확히 같다고는 하지 않겠네. 하지만
8:31 이렇게 생각해보게. 훗날 사람들이 인간의을 아주 정밀하게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네. 그들이 발견하게 될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일 것세. 인간의 뇌는 행복을 지속시키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것. 뇌가 행복을 지속시키지 않는다고요? 생각해 보게. 만약 인간이 한 번 행복을 느끼면 영원히 그 상태에 머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아닌가? 사냥을 하지 않고 위험을 피하지 않고 후손을 남기려 하지 않을 걸세. 여기서 쇼페나워의 이야기가 놀랍게도 현대 뇌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니 뇌는 아니 삶의 의지는 행복이
9:17 오래 지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어. 이것이 내가 말하는 맹목적 의지의 관계란 말이야. 실제로 훗날 심리학자들이 이것을 쾌락, 적응, 영어로 헤도닉 어댑테이션이라고 부르게 될 걸세. 좋은 일이 생겨도 인간은 곧 그 상태에 적응하고 다시 원래의 감정 수준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지.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1년 후에는 당첨 전과 비슷한 행복 수준으로 돌아간다는 걸 발견하게 되겠지. 또 뇌속에 도파민이라는 물질이 있는데 이것이 재미있는 녀석이야. 도파민은 행복을 느끼게 하는 물질이 아니라 무언가를 원하게 만드는 물질이거든.
10:03 내 과학자들은 이걸 원하기와 좋아하기의 구분이라고 부를 텐데 도파민은 원하기를 담당하지를 담당하지 않는다네. 내가 말한 맹목적 의지가 내 속에서 화학 물질의 형태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야. 그건 정말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오히려 해방적이라고 생각하네. 왜냐하면이 사실을 알면 자네는 더 이상 행복한 상태에 도달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환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진짜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야. 그리고 바로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 다시 빛을 바라는 거네.
10:48 어떻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상태가 아니라 활동이라고 했다고 내가 말했지. 이것이 핵심이야. 쾌락 적응이 일어나는 건 상태로서의 행복에 대해서 좋은 집에 살게 되어 행복하다. 이것은 상태야. 이건 적응되지. 하지만 매일 아침 정원에 나가 흙을 만지며 장미를 가꾸는 것. 이건 활동이야. 이것은 적금되지 않네. 왜냐면 메일이 조금씩 다르니까. 장미가 어제와 오늘 다르게 피니까. 자네가 매일 아침 산책하며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도 마찬가지야. 어제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은 같은
11:34 하늘이 아니거든. 아리스토텔레스는 2,300년 전에 이미 뇌과학자들이 발견할 진실을 철학적 직관으로 꿰뚫고 있었던 셈이지. 상태가 아니라 활동이라는 것. 그러니까 행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뜻이군요. 바로 그거야. 자네 지금 아주 정확한 표현을 했네. 행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야. 그리고 이건 매 철학과도 통하는 부분이네.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로 제시한 것 세 가지를 기억하나? 예술적 관조와 도덕적 동정심 그리고 금욕적 의지의 부정이요. 그렇지. 그런데이 세 가지를 잘
12:21 들여다보게 예술적 관조란 아름다운 것을 깊이 바라보는 활동이야. 도덕적 동정심이란 타임의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하는 활동이지. 의지의 부정이란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의식적 선택의 활동이고 전부 활동이야 상태가 아니라 결국 나도 아리스토텔레스도 행복은 가만히 앉아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매순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지 대화의 분위기가 여기서 한번 가라앉습니다. 제자가 자기 삶의 한가운데를 꺼내 놓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그 말씀이 와닿습니다. 그런데 제 고민은 조금 더
13:07 구체적입니다. 저는 쉰 다섯에 뭔가 큰 전환기를 막고 있는 거 같습니다. 직장에서의 역할이 줄어들고 아이들은 독립했고 아내와 단둘이 남은 저녁 시탁은 조용합니다. 너무 조용해요.이 이 조용함이 때로는 평화 같기도 하고 때로는 벌려진 것 같기도 합니다. 자네 지금 아주 정직한 말을 했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조용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거든 모임에 나가고 취미를 억지로 만들고 작은 기계를 들여다보며 타인의 삶을 훔쳐보면서 자기 삶에 조용함을 외면하지. 인간이 구독을 피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13:54 달라지지만 고독을 피하려는 충동은 같은 걸세. 하지만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을 말해야겠네.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어. 고독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자유를 사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오직 혼자 있을 때만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자네가 느끼는 그 조용함, 그 고요, 그것은 자네를 버린 것이 아니야. 자네에게 찾아온 것이야. 인생에서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자네에게 자네 자신과 마주할 시간이 주어진 거네. 자네는 20대에 무엇을 했나 공부했지. 30대에는 일했지.
14:43 40대에는 가족을 돌봤지. 그동안 자네는 늘 무엇을 위해 살았네. 하기를 위해, 승진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그런데 지금 쉰 다섯에 처음으로 위해라는 단어가 붙을 대상이 흐릿해진 거야. 그리고 자네는 그 흐릿함을 공허함이라고 부고 있지. 하지만 나는 그것을 공허함이라고 부르지 않겠네. 나는 그것을 여백이라고 부르겠어. 동양의 화가들은 그림에 일부러 빈 공간을 남긴다고 하더군. 그 빈 공간이 그림을 완성한다고. 자네 인생의 지금이 시기도 마찬가지야. 무언가로 채워야 할 공어가 아니라
15:30 비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여백이라는 말이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 그는 니쿠마코스 윤리학 열제권에서 행복의 가장 높은 형태를 테오리아 관조적 삶이라고 불렀거든.이 관조라는 것은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쟁취하는 활동이 아니야. 세계를 고요히 바라보고 그 안에서 진리를 의미하는 활동이지. 그리고이 관조는 젊은이에겐 거의 불가능한 거야. 왜냐하면 젊은이에겐 야망이라는 소음이 너무 크거든 오직 삶의 한 바탕 소란을 지나온 사람만이이 관조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네.
16:16 그러니까 지금이 조용함이 관조를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이라는 뜻입니까? >> 가장 좋은 조건이라네. 그리고 자네 뇌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볼까? 훗날 뇌과학자들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걸세. 인간의 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멍한이 있을 때, 오히려 활발하게 작동하는 신경 회로가 있다는 거야.이 회로는 자기 성찰, 과거의 기억 통합, 미래의 상상, 타인에 대한 공감 같은 일을 담당한다고 하네. 자네가 저녁 식탁에서 느끼는 그 조용함, 산책길에서 문득 찾아오는 그 멍한 시간. 그때 자네의 뇌는 놀고
17:01 있는 것이 아닐쎄. 자네의 55년 인생을 정리하고 통합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거야.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오리아가 뇌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셈이지. 멍안이 있는 시간이 오히려 뇌가 가장 깊이 일하는 시간이라니. 그건 알았으면 조급해하지 않았을 텐데요. 인간의 비극 중 하나가 바로 이거야.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 자네의 그 조급판도 이해하네. 세상은 끊임없이 뭔가를 하라고 뭔가가 되라고 뭔가를 보여주라고 다그치니까. 하지만 나는 자네에게 묻고 싶네. 나무가 열매를 익힐 때 소리를 내던가
17:50 소란을 피우던가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햇볕을 받으며 익어 가지 않던가? 선생님이 이렇게 따뜻한 비유를 하시는 건 처음 봅니다. 따뜻한게 아니라 정확한 비유를 한 것뿐이네. 감상에 빠지지 말게. 잠시 침묵이 흐르고 제자가 다시 무거운 주제를 꺼냅니다. 선생님, 한 가지 더 여쭈겠습니다. 제 또래의 사람들, 그러니까 50대 중반에서 60대에 접어드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자신이 더 이상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요. 직장에서 밀려나고 아이들은 자기 삶을 살고 사회는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돌아가고이 쓸모없음의
18:38 감각이 때로는 정말 견디기 어렵습니다. 쓸모 없음이라. 자네 그 단어를 잘 들여다보게. 쓸모라는 것은 누가 정하는 건가? 그야 사회가 정하는 것 아닙니까? 생산성이라든가 경제적 기여라든가 바로 그거야. 자은 지금 사회가 정한 쓸모의 기준으로 자기 존재의 가치를 재고 있는 거네.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의지의 노예 상태야. 사회는 아니 맹목적 삶의 의지는 인간을 생산하는 도구로 쓰고 싶어 하거든. 젊을 때는 생산하라. 중년에는 관리하라. 늙으면 비켜라. 이것이
19:24 의지의 논리야. 하지만 자네가이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어디 있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하게 말했네.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생산이 아니라 이성적 활동이라고. 생산은 도구의 기능이야.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 존재하지. 못을 박을 일이 없으면 망치는 쓸모 없어지네. 하지만 인간은 망치가 아니야.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언가를 생산하데 있지 않아. 이성적으로 활동하는데 생각하고 느끼고 관계 맺고 의미를 찾는데 있단 말이야. 하지만 선생님 머리로는 이해가 됩니다만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20:10 수십년간 사회의 기준으로 살아왔는데 그걸 하루 아침에 어떻게 바꿉니까? 그래, 그건 맞는 말이야. 나도 그 어려움을 부정하지 않겠네. 수십년간 몸에 벤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지.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 주겠네. 인간은 나이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한다는 거야. 젊을 때는 미래를 위해 인맥을 넓히고 정보를 수집하는데 에너지를 쓰지만 나이가 들면서 특히 남은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양보다 치를 선택하게 된다는 거야. 넓은 관계보다 깊은 관계를, 새로운 정보보다 의미
20:57 있는 경험을, 성취보다 만족을 추구하게 된다는 말이지. 그리고 놀라운 건이 변화가 퇴보가 아니라 진화라는 거야. 카스텐센의 연구에 따르면 노년기의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보다 감정 조절 능력이 뛰어나고 부정적인 경험보다 근정적인 경험에 더 주의를 기울이며 전반적인 정서적 안정감이 높다네. 카스텐세는 이것을 근정 편양이라고 불렀어. 그건 제 경험과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저는 오히려 나이 들면서 더 불안해진 것 같거든요. 좋은 지적이야. 카스텐센의 이론이 모든 사람에게 자동으로 적용되는 건 아니세 핵심
21:42 조건이 있어. 남은 시간이 유한하다는 자각. 이것이 건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야. 단순히 죽음이 두렵다는 공포가 아니라 남은 시간이 소중하다는 자각.이 둘은 전혀 다른 거네. 자네가 불안한 건 아마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공포 쪽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일 것이. 하지만 같은 사실. 그러니까 남은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렇게 되지. 남은 모든 날이 소중하다. 에피크로스가 이런 말을 했지.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오지
22:29 않았고 죽음이 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많이 낭비하는 것이다. 인생은 충분히 길고 그 전체가 잘 사용되기만 한다면 미래한 것들을 성취하기에 넉넉히 주어져 있다. 세네카의 그 말은 예전에 읽었을 때와 지금 읽을 때 무게가 다르게 느껴줍니다. 당연하지. 25에 그 말을 읽으면 격원집에 한 줄에 불과하지만 신 다섯에 읽으면 자기 인생에 요약이 되니까 이것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 있네. 젊은이는 윤리학을 배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왜냐면 경험이 부족하기
23:17 때문이라고 자네가 지금 세네카의 말에서 더 깊은 울림을 느끼는 건 자네가 퇴보한게 아니라 성숙했기 때문이야. 선생님. 그렇다면 저는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관조하라. 활동하라. 여백을 즐기라. 말씀은 이해하겠는데 매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란 말씀입니까? 드디어 실천적인 질문을 하는 건. 좋아. 여기서부터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세.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세 가지 추미로 나눴네. 첫째는 쾌락적 삶이야.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지. 맛있는
24:02 음식, 좋은 음악, 편안한 잠자리.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네. 다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둘째는 실천적 삶이네.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억을 실천하는 삶이지. 셋째가 앞서 말한 관조적 삶 진리를 탐구하고 세계의 본질을 은미하는 삶이야. 자네 나이에는이 세 가지를 자네만의 방식으로 조합할 수 있네. 내가 구체적으로 말해 보지. 첫째, 쾌락적 삶에 대해 자네나이의 쾌락은 젊은이의 쾌락과 달라야 하네. 젊은이의 쾌락은 강렬함에 있지만 자네 나이의 쾌락은 섬세함에 있어. 아침에
24:48 마시는 커피 한잔의 온기를 온전히 믿기는 것. 산책길에서 바람의 온도가 어제와 다르다는 걸 알아채는 것. 오래된 음악을 다시 들으며 그 음악을 처음 들었던 시절에 자기를 만나는 것. 이것은 젊은이에겐 불가능한 쾌락이야. 이걸 할 수 있으려면 풍부한 기억이 필요하고 미세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성숙한 감각이 필요하거든. 자네에게는 그것이 있네.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찾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사소한 것을 깊이 느끼는 능력이 이미 있다는 말씀이군요. 정확하네. 찾으라는게 아니야. 이미 있다는
25:35 거야. 다만 자네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 사회가 정한 행복의 기준. 더 크게 더 많이 더 빠르게. 이런 기준으로 보면 커피 한잔의 온기는 초라해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자네에게 묻겠네. 스무살 때 급하게 들이킨 커피와 쉰 다섯에 조용한 부엌에서 천천히 마시는 커피. 어느 쪽이 더 깊은 맛을 가지고 있는가? >> 당연히 지금이죠. 보게. >> 자네는 이미 알고 있었어. 다만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를 용기가 없었을 뿐이지. 용기라뇨? 행복을 인정하는데 용기가 필요합니까? 필요하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작은
26:22 행복을 행복이라고 인정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해. 왜냐면 그 순간 자네는 더 이상 큰 행복을 쫓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니까. 사회가 자네에게 부여한 야망. 자네의 부모가 자네에게 물려준 기대. 자네 스스로가 평생 싸운 자상이 모든 것에 조용히 작별을 구하는 거야. 이것은 패배가 아닐쎄 이것은 성숙이야. 비토르 프랑클리라는 사람이 있네. 나치 수영수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인데 그가 이런 말을 했어.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지만 단 한 가지 주어진 환경에서
27:09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 프랑클이 수영소에서 발견한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반드시 가장 강하거나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거야.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지. 그리고이 의미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네. 수영소 밖에서 기다리는 가족을 생각하는 것. 아직 쓰지 못한 책을 완성하겠다는 다짐. 옆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을 나누어 주는 해미. 이런 것들이었어. 자네 쉰 다섯도 마찬가지야. 거창한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네. 내일 아침 아내에게 커피를 한 잔 타 주는 것.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은
27:56 친구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 서제에서 한시간 동안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이 작은 것들 속에 자네 에우다이모니아가 있어. 저는 그동안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너무 큰 그림만 그리고 있었나 봅니다. 자네만 그런게 아닐쎄. 인간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 행복이라는 단어에 너무 큰 기대를 실어놓고 정작 눈앞에 작은 충족은 행복으로 치지도 않지. 그리고는 불행하다고 한탄하는 거야. 이것은 산의 진미를 차려놓고 밥이 없다고 우는 것과 같은 거네. 이제 쇼페하우어가 둘째 실천적 삶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28:41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 즉 공동체적 존재라고 불렀어. 인간은 혼자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거야. 이건 사실 나와 좀 다른 입장이지. 나는 고독을 높이 평가하니까. 하지만 나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네.이 녀석 아트마리야. 나는 인간과의 교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이 작은 생명과의 교감에서 느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네. 타자와의 연결에서 오는 무언가가 있어. 그것이 인간이건 동물이건 자연이건. 현대 심리학에서도 이것을 확인하게 될 것. 하버드 대학에서 80년 넘게 진행한 성인 발달 연구가 있는데 그
29:29 연구의 결론은 놀랍도록 당신했다네. 행복하고 건강한 노년을 보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부도우 명예도 성취도 아니었어. 좋은 관계였지. 깊고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살고 행복했다는 거야. 그리고이 관계라는 것은 수십명의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네. 만 한 사람이라도 자기 마음을 진심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충분했다는 거야. 자네 아까 아내와 단둘이 남은 저녁 식탁이 너무 조용하다고 했지. 그 조용한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자네 55년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
30:14 아닌가? 그 사람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자네는 정말 모르나 아니 알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게 아닌가? 선생님, 저는 그동안 아내에게도 제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세대가 그렇기도 하고 남자가 그런 걸 말로 한다는게 어색하기도 하고 >> 나도 평생 그랬네. >> 내가 사랑한 여인에게 제대로 마음을 전하지 못했지. 그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어리석음 중 하나였다고 지금은 인정할 수 있네. 에피쿠테토스라는 스토화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 우리에게는 두 개의 귀와 하나의 입이 있다. 이것은 말하는 것에 두 배로
31:01 들으라는 뜻이다. 자네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면 듣는 것부터 시작해 보게. 아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내의 침묵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것을 들어보게 듣는 것도 활동이야. 그리고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덕의 실천이기도 하지. >> 듣는 것이 덕의 실천이라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두 종류로 나눴어.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 지적인 덕은 가르침을 통해 얻어지지만 도덕적인 덕은 습관을 통해 얻어진다고 했지. 그리스어로 덕이 에토스이고 습관도
31:48 에토스야. 거의 같은 어원이지. 다시 말해 사람이 되는 것은 한 번의 위대한 결심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실천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네. 매일 아침 아내에게 오늘 하루 어땠어 하고 한마디 건네보게. 모래도 그렇게 하고 글피도 그렇게 하게. 한 달이 지나면 그것은 습관이 될 것이고 습관이 되면 그것은 자네 성품의 일부가 될 걸세.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십관에 의한 덕의 형성이야. 거창한게 아니야. 하지만 작지도 않네. 이제 마지막으로 셋째 관조적 삶에
32:33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건 아리스토텔레스와 내가 가장 가까워지는 지점이네. 나는이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고귀한 길로 예술적 관조를 꼽았어. 아름다운 음악을들을 때 위대한 그림 앞에 설 때 시한편을 은미할 때 인간은 잠시나마 맨목적 의지에서 벗어나 순수한 인식의 주체가 된다네. 그 순간만큼은 원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아. 그저 보고 듣고 느낄 뿐이지 이것이 내가 말하는 의주로부터의 해방이야.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오리아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네. 세계의 본질을
33:20 관조하는 인간은 그 순간 개인적 욕망과 공포에서 벗어나 진리 그 자체와 만나지. 아리스토텔레스는이 상태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행복이라고 했고 나는이 상태를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평화라고 부르겠네. 자네에게 이것을 실천할 방법은 많이 있어. 음악을 진지하게 듣는 것. 미술관에 가서 한품 앞에 오래서 있는 것. 자연 속에서 나무 한 그루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 좋은 책을 천천히 읽는 것. 이런 활동들이 전부 관조야. 그리고이 관조의 능력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지네. 왜냐하면 관조에는 인매가 필요하고
34:08 인내는 시간이 선물하는 덕목이니까 제자가 여기서 새벽마다 자신을 괴롭히는 감정 하나를 꺼내 놓습니다. 선생님, 한 가지만 더 여죽겠습니다. 저는 가끔 후회에 시달립니다. 젊었을 때 일했더라면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새벽에 갑자기 찾아와서 잠을 깨우곤 합니다.이 후회라는 감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후회라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교활한 놈이지. 왜냐하면 후회는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거든 과거를 바꾸라고. 나는 이렇게 본다네. 자네가 25세 한 선택은 25세
34:54 자네가 가진 정보와 경험과 감정으로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어. 그것이 객관적으로 최선이었느냐고 아마 아니었겠지. 하지만 그때의 자네에게는 최선이었어. 쉰 다섯 자네가 25세의 자네를 심판하는 건 공평하지 않네. 왜냐하면 쉰 다섯 자네에게는 30년치 더 많은 정보가 있으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그때 좀 더 용기를 냈대더라면 하는 생각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내 철학의 핵심 중 하나를 말해야겠네. 나는 자유 의지에 대해 깊이 연구한 사람이야. 그리고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이것이네.
35:40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는 있지만 무엇을 원할지는 선택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자네가 25의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은 그때의 자네가 용기보다 안전을 원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때 자네가 안전을 원한 것은 자네의 성경 경험 유전이 모든 것의 합작이지 자네의 의식적 선택이 아니었어. 이것이 씁쓸한 결론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자유를 주는 결론이야. 왜냐면 이걸 받아들이면 자네는 더 이상 과거에 자기를 탓타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때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변명이 아니라 이해해야 자기
36:27 자신에 대한 이해. 니체가 나중에 이런 말을 하게 될 것. 운명을 사랑하라. 아모르 파티. 니체의이 말은 과거의 모든 것 실수도 고통도 후회도 포함해서 전부 긍정하라는 뜻이야.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지금의 자네를 만들었으니까. 지금의 자네가이 서제에 앉아 행복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면 그 모든 과거가 자네를이 자리로 데려온 셈이지. 후회할 것들조차도 후회할 것들조차 저를 여기로 데려왔다. 그 관점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37:14 관점을 바꾸는 것. 이것도 활동이야. 그리고이 활동은 뇌의 실제로 변화를 일으킨다네. 훗날 신경과학자들이 신경 가소성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게 될 것이. 인간의 뇌는 죽을 때까지 변화할 수 있다는 거야. 오래된 뇌도 새로운 생각을 하면 새로운 신경 회로가 만들어진다네. 자네가 오늘이 대화에서 새로운 관점을 얻었다면 자네의 뇌는 문자 그대로 조금 달라진 거야. 물리적으로 쉰 다섯 뇌도 변할 수 있다고요? 물론이지. 다만 젊은 뇌처럼 빠르게 변하지는 않아. 대신 더 깊이 변하지. 이것도 봄과 가을의 차이와 같네.
37:59 봄삐는 빠르게 내리지만 표면만 적시지. 가을비는 느리지만 땅속 깊이 스며들어. 자네의 뇌는 지금 가을 맡고 있는 거야. 천천히. 하지만 깊이 대화가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제자가 오늘 나눈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선생님, 오늘 대화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는 쾌락이 아니라 활동으로서의 행복이고 그것은 자기 고유의 탁월함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선생님의 철학에서는 행복을 직접 추구하면 잡히지 않지만 보통을 이해하고 헛된 욕망을 내려놓으면 고요한 만족이 찾아온다.
38:46 그리고이 두 가지는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나쁘지 않은 정리야. 하지만 한 가지를 빠뜨렸네. 오늘 우리가 나눈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도 나의 이론도 아니세. 가장 중요한 것은 자네가 오늘 여기 와서 질문했다는 사실이야. 자네는 오늘 쉰 다섯 나이에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네. 많은 사람들은이 질문을 회피하지. 일에 파묻치거나 술에 기대거나 무감각해지거나 하지만 자네는 질문했어.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시에 따르면이 질문 자체가 이미 행복의 시작이야.
39:34 왜냐하면 행복은 이성적 활동이고 질문은 이성적 활동의 가장 순수한 형태이니까 소크라테스를 생각해 보게 그는 평생 질문만 했지 대답을 내놓은 적이 거의 없어. 그런데 서양철학 2500년 역사에서 그보다 더 치열하게 에우다이모니아를 실천한 사람이 있나? 소크라테스는 죽음 앞에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지.이 말은 오만이 아니야. 이것은 초대야. 자네 자신의 삶을 성찰하라는 초대. 제자가 마지막 질문을 건냅니다. 선생님은 행복하십니까?
40:21 서제 긴 침묵이 내립니다. 프랑크프르트의 저녁 종소리가 멀리서 울려옵니다. 나는이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네. 삶의 위지는 맹목적이고 욕망은 끝이 없으며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보내지. 하지만 지금이 순간이 서제에서 자네와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이 시간은 내가 말한 예술적 관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고민을 진지하게 듣고 2300년 전에 철학자와 오늘날의 뇌과학을 오가며
41:07 함께 생각하는이 시간. 이것이 행복인가? 글쎄 나는 그 단어를 쉽게 쓰는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이 시간이 고통도 권태도 아닌 무엇이라는 것은 인정하겠네. 그리고 그 무엇이 나쁘지 않다는 것도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는 필요 없네. 대신 부탁이 있다면 오늘 집에 돌아가서 아내에게 커피를 한 잔 파 주게. 그리고 그 커피가 씻기 전에 오늘 하루 어땠어 하고 물어보게 그게 자네 에우다이모니아의 시작일 걸세. 제자가 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초팬하워가 등뒤로 한 마디를 더
41:52 합니다.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완전한 삶에서 실현된다고 했네. 완전한 삶이란 긴 삶이라는 뜻이야. 한 낮에 젊은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아. 저녁에 성숙이 더해져야 하루가 완성되듯이 요년이 더해져야 삶이 완성되는 거네. 전에는 지금 삶을 완성해 가고 있는 중야. 그것을 잊지 말게. 서제에 다시 고요가 내려앉십니다. 쇼펜하우어가 아트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혼잣 말처럼 중얼거립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2,3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42:39 물었고 지금 내가 묻고 있고 저 젊은이가 묻고 있고 아마 2,300년 후에도 누군가 물을 거야. 답이 없어서가 아니야. 물를 때마다 답이 달라지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이 질문의 아름다운 점이야. 인간은 변하니까 변하는 존재가 변하지 않는 답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지. 이제이 이야기를 듣고 계신 여러분에게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퇴근길 지하철 안에 계신가요? 새벽에 잠이 깨어 무언가를 찾다가이 영상을 틀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43:25 혹은 산책을 하며 이어폰으로 듣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쇼페나워 그의 제자가 나눈 대화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2300년 전에 말했습니다. 인간은 세상 그 무엇보다 행복을 추구한다고. 그리고 그 행복은 쾌락이 아니라 활동이며 인간 고유의 탁월함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쇼페하워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했습니다. 행복을 정면으로 쫓지 말라고. 대신 고통을 이해하고 헛된 욕망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찾아오는 고요한 만족을 누리라고. 현대 뇌과학은이 두 철학자의 찰을 놀라운 정밀도로 확인해
44:10 줍니다. 인간의 뇌는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쾌락 적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활동으로서의 행복, 매 순간에 실천으로서의 행복은 적응되지 않습니다. 매일이 조금씩 다르니까요. 행복의 유자 곡선이라는 연구가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감은 20배에 높고 40대 중반에 가장 낮아졌다가 50배 후반부터 다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물론 이것이 자동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카스텐센 교수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44:57 남은 시간의 유한함을 공포가 아닌 소중함으로 자각할 때 양보다 질을 선택하고 넓은 관계보다 깊은 관계를 추구할 때 그 변화가 시작됩니다.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저녁 혹은 내일 아침 아주 작은 것 하나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그 온기를 느끼는 것도 좋고 오래된 음악 한 곡을 처음 듣는 것처럼 귀기울여 보는 것도 좋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오늘 하루 어땠어 하고 한마디 건내는 것도 좋겠습니다. 산책길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며 5초만 멈춰서는 것도 좋습니다.이 이 작은
45:43 것들이 행곡이냐고 물으신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면 그것이 곧 덕이 되고 덕이 곧 행복이라고 쇼페나오라면 이렇게 말하겠죠. 거창한 행복을 쫓느라 눈앞에 평화를 놓치지 말라고. 프랑클이라면 덧붙일 것입니다. 의미는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 지금이 순간의 작은 선택 속에 있다고 여러분의 쉰 바섯은 혹은 예수는 혹은 이르는 꽃이지는 시간이 아닙니다. 열매가 익어가는 시간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익힐 때 소리를 내지
46:29 않듯이 여러분의 성숙도 조용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조용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을 버린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23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행복은 완전한 덕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며 이것은 완전한 삶 속에서 실현된다. 완전한 삶이란 긴 삶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날이 기쁜 날도 고통스러운 날도 후회되는 날도 아무 일도 없었던 날도 전부 합쳐져서 지금의 여러분을 만들었습니다.
47:15 그리고 지금의 여러분은 비로소 행복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는 깊이를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물으십시오. 계속 물으십시오.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남은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은가?이 이 질문들이 여러분을 행복으로 이끌 것입니다. 답이 바로 나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질문하는 것 자체가 이미 에우다이모니아의 실천이니까요. 행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행복은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여러분은 이미서 있습니다.
48:00 오늘이 서제에서 오 말들이 촛불이 꺼진 뒤에도 사라지지 않듯이 2,300년 전의 말이 오늘까지 살아 있듯이 오늘의이 이야기도 여러분의 마음 어딘가에 조용히 남아 어느 날 문득 떠올라 여러분의 하루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