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데미안 싯다르타 #문학 #오디오북 #작가전기 #스토리텔링 #세계문학 #인생이야기”의 전체 스크립트입니다. 타임스탬프를 클릭하면 해당 장면부터 영상이 열려요. 다른 영상이 필요하다면 유튜브 스크립트 추출기를 이용하세요.
0:00 독일 전체가 그를 매국노라 불렀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아들의 충경, 아내의 정신분열. 가족은 무너졌고 정신은 조각났습니다. 나는 오직 내 마음속에서 저절로 솟아나려는 것을 살아보려 했을 뿐이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문 안쪽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헤셋 씨, 들어오세요. 떨리는 손이 차가운 금속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열었습니다. 끼! 방 아내는 낯선 세계로부터 밀려오는 눈부신 햇살 속에서 정신분석의 융의 제자랑 박사가 그를 맞이했습니다.
0:47 그가 자신의 어둠과 마주한 순간 걸자 데미안이라는 거대한 알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이 지옥 같은 절망에서 태어난 소설 데미안. 그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수천만 명이 그의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걸까요? 오늘은 헤르만헬스의 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1877년 7월 2일 독일 남서부의 작은 강변 마을 칼부에서 헤르만 헤세가 태어났습니다. 슈바르츠발트 즉 검은 숲 서쪽 기스에 잘 잡은이 마을은 나겔트강이 구비쳐 흐르고 붉은 지붕의 목조 건물들이
1:32 오밀조밀 늘어선 그림 같은 곳이었지만 그 아름다운 외건 뒤에는 숨막히는 규율이 있었습니다. 루터교 경건주의 신앙이 마을 전체를 지배했고 이루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가야 했으며 술과 춤과 허탄한 것들은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알았고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살았으며 그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공동체에서의 추방을 의미했습니다. 칼이브는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숨막혔습니다. 해스의 가정은이 분위기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아버지 요한네스는 발트 독일인 출신의 경건주의 선교사로 오늘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 해당하는 발트 지방 출신이었습니다.
2:18 그는 인도에서 수년간 선교 활동을 한 뒤 귀국하여 칼부의 선교 출판사에서 일했으며 엄격하고 원칙적이 돼 아들을 분명히 사랑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의 방식이 규율과 교정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헬스가 반항할 때마다 요한네스는 일기에 이렇게 섰습니다. 헤르마는 오늘도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었지만 헬스에게 그것은 때로 감옥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들이 실을 쓰고 싶다고 하면 아버지는 기도가 먼저라고 했고 철학책을 읽고 싶다고 하면 성경이 먼저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3:05 어머니 마리 군데트는 인도 태생의 선교사 가문 출신으로 지성적이고 예민했으나 신경증적 불안과 우울에 평생 시달렸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깊이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안정적으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햇세는 어머니에게서 따뜻함과 불안을 동시에 물려받았습니다. 훗날 햇세가 평생 우울증과 실망한 것, 그리고 소설 속에서 끝없이 어머니가 편 여성 인무를 찾아 헤맨 것은이 유년의 감정적 지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이 가정에서 헬스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외할아버지 헤르만 군데트 박사였습니다. 군데트는 당대 독일 최고의 인도학자 중 한 명으로 인도 남부 케랄라
3:52 지방에서 수십년간 선교 활동을 하며 말라엘 나머 사전을 편찬하고 성경을 말라엘 나머로 번역했습니다. 말라엘 나머어는 인도 남부의 드라비오적 언어로 문법 구조가 산스크리트어와 완전히 달라서 유럽 학자들이 가장 습득하기 어려운 언어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 군데르트는이 난공블락의 언어를 꿰틀어 사전으로 정리했습니다. 단순한 선교사가 아니라 진정한 언어 천재였습니다. 그의 칼부 서제는 마을의 어떤 공간과도 달랐습니다. 30개가 넘는 언어의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독일어 신학서 옆에 산스크리트 원전이 불교 경전 번역서 옆에 페르시아 시집이 나란이서
4:38 있었습니다. 칼부의 루터교 예배당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마을에서이 서제만큼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조용히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일곱살의 햇세는 그 서제에서 수많은 오를 보냈습니다. 책들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분위기에서 뭔가 거대하고 이질적인 세계에 냄새를 맡았습니다. 어느 날 외할아버지가 산스크리트 문법서를 펼쳐 보이며 말했습니다. 헤르만,이 문자들은 수천 년 전 사람들이 신과 이야기하던 방식이란다.이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신과 언어와 삶의 방식이 있어. 루터 교만이 신으로 가는 길이 아닌 것처럼 칼부만이 세상의 전부가
5:25 아니란다. 그 말이 어린 햇세의 가슴에 깊이 박혔습니다. 그리고 오래 장들어 있다가 1922년 시따르타라는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시따르타가 부다를 만나고도 그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그 유명한 장면. 어떤 스승도 당신을 대신해서 깨달을 수 없다는 그 철학은 사실 외할아버지의 서제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햇세는 여섯 살 무렵 어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말을 서슴없이 했습니다. 학교가 지루하다고 가르치는 것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라틴어 학교에 들어간 지에는 선생님이 틀린 것 같다고 공개적으로 지적했다가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6:12 선생님들은 그를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로 기록했고 부모는 그의 반항을 신앙의 결핍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헬스에게 그것은 반항이 아니었습니다.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모르는 것을 알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이 차이를 당시 칼부의 어른 중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고 햇세는 그 외로움을 평생 안고 살았습니다. 해세가 성장한 1880년대 독일은 제2 제국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절이었습니다. 국가주의와 군사주의, 산업화의 열기, 진보에 대한 맹목적 낙관이 지속힌이 시대에 칼부의 경건주의 분위기는 헬스에게 이중의 압박이 되었습니다.
7:00 국가가 요구하는 충성스러운 독일인과 가정이 요구하는 경건한 기독교인. 그 두 틀 어디에도 햇세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두 세 개의 경계 위에서 있었고 그 불안정한 자리가 오히려 그를 평생 탐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칼부가 그를 만들었고 동시에 칼부가 그를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긴장 속에서 햇세라는 작가가 태어났습니다. 1891년 14살례 횟세는 비르베르 주 전역에서 치르는 라틴어 특별 시험에 합격하여 마을부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마을부론은 12세기에 시토의 수도사들이 세운 수도원을 개조한 곳으로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
7:47 유산에 등지될만큼 중세 고디 건축의 정수가 살아숨쉬는 장소였습니다. 회랑을 따라 걷다 보면 수백년의 시간이 돌벽에 새겨진 것이 느껴졌고 안뜰 분수 소리는 사계절 내내 멈추지 않았습니다.이 신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당시 비루텐베르크에서 대단한 영이었습니다. 졸업하면 빈겐 신학교를 거쳐 루토교 목사가 되는 탄탄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요한네스는 아들이 드디어 제기를 찾았다고 안도하며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헤르만이 마을부론에 합격했다. 하나님께서이 아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 그러나 마을부론에 도착한 해스의
8:33 속마음은 아버지와 전혀 달랐었습니다. 고디 가치와 오래된 돌벽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중세의 공기가 되어 있는 그 공간은 분명 아름다웠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새벽 5시 이상 빽빽한 수업일과 저녁 기도, 침묵의 식사 시간, 그리고 모든 것이 향하는 단 하나의 목적지인 루터교 목사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헬스는 점점 숨막혔습니다. 수업 시간에 라틴 문복 대신 실을 쏟고 기도 시간에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밤마다 혼자 촛불 아래에 앉아 그 대화 실러를 읽었습니다. 그것이
9:19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입학한지 여섯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892년 3월에 어느 밤이었습니다. 기온은 영화였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햇세는 코트도 챙기지 않았습니다. 돈도 없었고 행손지도 없었습니다. 그냥 담장을 넘었습니다. 그저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20시간 동안 실종되었다가 경찰에 발견되어 끌려왔을 때 그는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를 향한 갈망이 죄입니까? 이튿날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는 단 한 줄이 쓰여 있었습니다.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습니다.
10:05 15살 소년에이 선원 앞에서 요한네스와 마리는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황당함과 분노와 절망이 한꺼번에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에게 이것은 허세가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목사가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현실이 될 뻔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헬스의 상태는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극심한 우울증과 자살충동이 그를 덮쳤고 1892년 여름 그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권총을 손에 넣으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 요한네스는이 사건 이후 일기에 떨리는 필체로
10:51 이렇게 적었습니다. 헤르만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나는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 위기 앞에서 부모가 선택한 방법은 당시 경주의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것이었습니다. 바트볼의 블루마르트 목사에게 아들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크리스토프 블루마르트는 경건주의 전통의 치유 사역자로 기도와 안수로 정신적 질병을 고친다고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사역에는 구마 의식에 가까운 요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 극히 취악한 상태 헬스에게 블루마르트가 말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은 내 탓이 아닐
11:36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둠을 몰아내려면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 헬스에게이 말은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신앙의 부족이나 악마의 유혹으로 해석되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또 하나의 폭력이었습니다. 헬스는이 체험을 평생의 수치로 여겼고 기독교 근본주의와 모든 교조적 신앙에 대한 깊은 거부감을 내면에 새겼습니다. 그것이 훗날 그의 소설에서 교회와 제도 종교가 구원이 아니라 억압의 장치로 반복해서 묘사되는 이유였습니다. 바트볼 이후에도 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슈테텐의 정신병원에 잠시 입어했고 바트, 칸슈타트
12:22 김지움에서 학업을 제기하려 했으나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893년에는 애슬린겐의 서점에서 견습생으로 일했지만 4흘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모든 것이 실패였습니다. 그리고 1894년 17살의 횟세는 칼부의 시계 공장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일리 페로트 시계 공장은 교회 탑에 달린 대형 시계를 수리하고 제작하는 곳이었습니다. 통리바퀴를 줄로 다듬고 기어를 조립하고 무거운 추를 조정하는 작업이 하루 종일 반복되었습니다. 금속먼지가 코를 자극하고 기름 냄새가 작업 보게 되었습니다. 햇세는 이곳에서 14달을 일했습니다.
13:08 흥미로운 것은 햇세가이 시절을 단순한 고통으로만 기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지고 다루는 노동에서 묘한 평온함을 발견했습니다. 생각이 멈추고 손만 움직이는 그 고요한 시간이 어지러운 정신의 작은 휴식이 되었습니다. 훗날 그가 몬타뇨라에서 수체아를 그리고 정원을 가꾸며 기쁨을 찾은 것도이 경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906년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신학교를 떠난 한스 기벤나트가 시계 공장에 들어가는 장면은 헬스의 자신의 기억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소설 속 한수와 달리 햇세는 살아남았습니다.
13:55 그리고 다음 행선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1895년 가을 18살의 햇은 튜빈겐의 해켄하우어 서전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티빙계는 독일 남서부의 대학 도시로 괴태와 해겔과 헬린이 거일던 골목이 남아 있는 곳이었습니다. 네카르강이 붉은 지붕들 사이를 구비쳐 흘렀고 거리에는 학생들과 교수들이 뒤섞여 걸었습니다. 햇세는 대학생이 아니었습니다. 서점 점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이 서점을 나의 진짜 대학이라고 불렀고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서점의 하루는 아침 8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새로 들어온 책들을 분류하고 손님
14:40 주문을 처리하고 책장을 정하는 일이 저녁까지 이어졌습니다. 급변은 형편 없었습니다. 돈이 없어 점심을 굶으면서도 그 돈으로 책을 샀습니다. 다락방 숙소는 좁고 추웠습니다. 그러나 헬스에게 진짜 하루는 서전문이 다친 이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촛불 하나, 책 한 권, 그리고 완전한 구독. 새벽 한두시까지 읽고 섰습니다. 4년 동안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지 않고 오직 책과의 연애에만 몰두했습니다. 햇세는이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튜빈견에서 처음으로 진짜 자유를 맛보았다. 누구도 내게 무엇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오직 내가 원하는 것만
15:28 읽었다. 그가 읽은 것들의 목록은 경의롭습니다. 괴태 전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고 실러의 희곡들을 탐독했으며 헬돌린의 비가와 클라이스트의 드라마를 밤새어 읽었습니다. 철학에서는 니체가 그를 강타했습니다.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는 헬스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친는 죽었고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는 니체의 선언은 칼부의 경건주의 신앙 속에서 자한 헬스의 세계관을 뿌리찌 흔들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적 세계관도 깊이 파고들었고 스핀호자와 칸트도 실름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외할아버지 서제에서 처음
16:15 냄새를 맡았던 그 동양 세계 인도와 중국의 종교 문헌들도 계속 읽어 나갔습니다.이 이 시절 새가 가장 깊이 메루된 작가는 노발리스였습니다. 29살을 요절한이 독일 낭만주의 시인은 밤에 참가와 미완성 소설 하인이 폰 오프터 딩겐을 남겼습니다. 밤, 꿈, 죽음, 내면의 탐색이라는 낭만주의의 정수를 담은이 작품들은 해스에게 문학적 게시나 다름 없었습니다. 사회와 충돌하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예술가. 외부 세계보다 내면 세계를 더 진실하다고 믿는 인간. 노발리스의 테마는 헬스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닮아 있었습니다.
17:02 햇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노발리스를 읽으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100년 전에도 나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된다. 1899년 해는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들과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시간을 자비로 출판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두 책을 합쳐 몇십부도 팔리지 않았고 당시 저명한 작가였던 파울 해에는 헬스에게 사실상 글 쓰기를 포기하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횟세스는 달랐습니다. 그냥 계속 썼습니다.
17:48 그런데 이무려 뜻밖의 경려가 찾아왔습니다. 당대 독일어권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이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헬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경려 편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글에는 아직 날 것에 거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진짜 목소리가 있습니다. 계속 쓰십시오. 무명 청년 헬스에게 릴케의 편지는 거대한 등불이었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01년에는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피렌저의 미술관에서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눈앞에서 보았고 베네츠아의 우화를 따라 걸으며 예술과 빛과 삶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18:33 있는지를 실감했습니다. 햇세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피렌체는 나에게 예술이 사치가 아니라 삼 자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아름다움은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1901부터는 바젤의 라이점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일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썼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1903년 서점미를 마침내 그만두었습니다. 아무런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냥 써야 했습니다. 1904년 소설 페터 카맨트를 독일 최고의 문학 출판사 피셔에서
19:20 출간했습니다. 스위스 산촌 출신의 청년이 도시와 세상을 박랑하며 예술과 자연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주인공 패턴은 사실상 헬스 자신이었습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지친 독일어권 독자들이이 소설에서 자신들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27살의 횟세는 하룻밤 사이에 독일 문단에 가장 주목받는 신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서점 점원에서 직업 작가로 티빙겐 다락방에서 촛불을 켜고 책을 읽던 그 청년이 마침내 자신의 책을 독자들의 손에 쥐어 준 것이었습니다.
20:05 페터 카맨트가 베스트셀러가 된 바로 그 외인 1904년 27살의 헬스는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습니다. 마리아는 햇세보다 아홉살 연상에 바젤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독립 사진 작가였습니다. 단순한 아마추오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스위스 최초에 독립 여성 사진 작가로 꼽힐만큼 전문적인 작업을 하고 있었고 17세기부터 수학자와 물리학자를 연이어 배출한 명문 베르누이 가문의 후손이었습니다. 유체역학의 베르누이 법칙을 발견한 다니엘 베르누이가 바로 그녀의 조상이었으니 마리아는 음악과 예술뿐 아니라 지적으로도 뛰어난 여성이었습니다. 아홉살의 나이 차이는 당시로서도 눈에
20:52 띄는 것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의하해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예술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고 그것이 둘을 잡아당겼습니다. 결혼 직후 헬스는 마리아와 함께 보데노수 근처에 작은 마을 가이엔 호펜으로 이사했습니다. 처음에는 낡은 농가를 빌렸고 1907년에는 직접 집을 지어 정척했습니다. 헬스가이 마을을 선택한 것은 단순히 자연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열렬히 잃고 있던 레프 톨스토이의 삶을 직접 실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최고의 귀족 출신임에도 직접 바트를 갈고 논민들과 함께 일하며 부와 명성을 거부한 채 소박하게 살았습니다.
21:39 햇세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채소밭을 가꾸고 과수원에서 사과와 배를 직접 따고 이웃 농부들과 막걸리 한잔을 나누는 삶. 정장을 거부하고 작업복 차림으로 온종일 흙을 만지는 햇세를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의야하게 바라보다가 결국 글 쓰는 농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햇세는이 시기를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가이앤노펜에서 톨스토이처럼 살고자 했다. 단순하고 정직하고 땅에 발을 붙인 삶. 그러나 나는 곧 깨달았다. 톨스토이는 농부였지만 나는 그래도 작가였다. 낮에는 흙을 만지고 저녁에는 촛불 아래 글을 썼습니다. 그 이중적인
22:25 생활이 헬스에게는 맞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점점 힘들어지는 삶이었습니다. 가이의 노폐는 바지에 관은 달랐습니다. 연주에도 없었고 예술과 동료들도 없었으며 문화적 자극이 거의 없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피아노를 치고 사진을 찍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균열은 처음부터 조용히 자라고 있었습니다. 문학적으로는이 시기가 풍요로웠습니다. 1906년 수레바퀴 아레서를 발표하여 또 한 독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이 이 소설은 마울부론 신학교 시절 자신의 경험을 직접 모델로 삼은 것으로 천재 소년 한스 기나트가 교육
23:12 시스템의 압력에 짓눌려 서서히 파멸해 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햇세는이 소설을 쓰면서 15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것입니다. 소설 한스가 신학교를 떠난 뒤 시계 공장에 들어가는 장면. 감가에서 혼자 앉아 있는 장면들은 모두 햇세 자신의 기억이었습니다. 소설 안에 햇세가 담은 메시지는 냉혹하고 선명했습니다. 시스템은 뛰어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시스템은 수능하는 아이를 원한다. 그 두 가지가 충돌할 때 시스템은 절대지지 않는다. 수레바퀴 아래는 오늘날에도 독일어권 학교에서 교육 비판 소설에 고전으로 읽힙니다. 출간된지 100년이 넘었지만 그
23:59 메시지는 조금도 날지 않았습니다. 한스 기벤나트가 겪은 것을 지금도 어느 교실에서 누군가가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이에노펜에서 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첫째 브루노가 1905년, 둘째 하이노가 1909년, 막내 마르틴이 1911년에 태어났습니다. 아이들이 생기면서 햇세와 마리아의 삶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헬세는 아이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일상적인 돌봄으로 표현하는 것을 극히 어려워했습니다. 아이가 울면 어쩔 줄 몰랐고 일과 방해받으면 예민하게 반응했으며 결국 서제문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4:45 마리아는 그런 햇세를 지켜보며 점점 지쳐갔습니다. 림과 육가를 혼자 떠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예술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두 개의 무게를 혼자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리아가 헬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과 같은 집에 살지만 그 아이들의 아버지는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냥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햇스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정확한 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햇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혼자 있어야 그을 쓸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를 쓰지 못하면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그도 알았고 마리아도
25:31 알았지만 그것이 이유가 되어 준다고 해서 상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910년 출관한 게르트루드는 음악가와 여성 사이에 엇갈린 사랑을 다루고 1914년 출관한 로스알덴은 예술에 몰두하는 화가 남편과 그로 인해 소회되는 아내 사이에 낀 아이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소설의 결말은 비극적 파곡이었습니다. 훗날 햇세는 이렇게 인정했습니다. 로스알데를 쓰는 동안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이 나의 결혼 이야기라는 것을.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었다. 소설를 쓰면서 자신의 결혼 종말을 예고한 작가. 그것이이시기
26:18 해스의 모습이었습니다. 글쓰기는 그에게 도피이기도 했고 동시에 가장 정직한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11년 가을 햇세는 화가 친구 한스 스토체네거와 함께 동남아시아로 항해를 떠났습니다. 가이앤노펜의 삶에서 잠시 빠져나오고 싶었던 것도 있었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서제에서 맡았던 그 동양 세계의 냄새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도 있었습니다. 배는 스리랑카 즉 당시 신론을 거쳐 수마트라와 말레이 제도까지 이어졌습니다. 인도 본토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항해 내내 지독한 배물미와 열대병에 시달렸고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27:04 나아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몇 달에 걸친 여정이 끝났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동남아시아는 기대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햇세가 꿈꾸온 것은 고요하고 지혜롭고 내면이 충만한 동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본 것은 영국 식민 지배 아래 뒤틀릴 전통문화였고 서구 상품과 열대 빈곤이 공존하는 한구 도시들이었으며 기독교 선교와 토착 신앙이 충돌하는 마을들이었습니다. 유럽의 기계 문명에 질려 동양을 찾아왔더니 동양이 이미 유로파되어 있었습니다. 해스는 스토르체네고에게 이렇게 털어 놓았습니다. 나는 동양을 찾아왔는데 여기서 내가
27:51 보는 것은 영국 양복을 입고 홍차를 마시는 사람들 뿐이다. 내가 찾는 것은지도 위에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바로이 실망이이 환멸이 헬스에게 결정적인 통차를 선물했습니다. 귀국하는 배 위에서 햇세는 천천히 결론 내렸습니다. 진정한 동양, 진정한 지혜는 지리적 장소에 없습니다. 그것은 외부 세계 어딘가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있습니다. 불교의 깨달음도 힌두교의 해탈도 어떤 스승의 가르침도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직접 살아냄으로써만 얻을 수 있습니다.
28:36 지도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있고 그것은 오직 자기 안을 들여다볼 때만 발견됩니다.이 결론이 훗날 시따르타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시따르타가 부다를 직접 만나고도 그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그 유명한 장면. 어떤 가르침도 당신을 대신해서 깨달을 수 없다는 그 메시지는 1911년 실망스러운 항해 위에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실망이 가장 깊은 통찰로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헬스의 삶에서 이런 역설은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실패가 자품이 되고 상처가 문학이 되고 환멸이 철학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헬스라는 작가의
29:22 방식이었습니다. 1914년 8월 사라예보의 총성 두발이 유럽 전체를 전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독일 전역은 전쟁 열기에 들끌었습니다. 독일 지식인들이 전쟁지지 선언문에 서명했고 교수들은 강단에서 전쟁의 필요성을 설교했으며 청년들이 자원 입대 행렬을 이뤘습니다. 햇세는 처음에 참전하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심한 근시로 부적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전선에 나갈 수 없었던 횟세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1914년 11월 스위스 최대 일간지에 오, 친구여,이 음존은
30:08 아니네.라는 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여 전쟁의 관기를 경계하고 유럽의 정신적 화해를 호소했습니다. 제목은 베토벤 교양고 9번 사학장에서 바리톤이 부르는 첫 구절을 빌린 것이었습니다. SA의 핵심은 단호했습니다. 우리 독일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총이 들었다. 그러나 총구는 이웃의 형제를 향하고 있다.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조국을 사랑한다. 그러나 조국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잔인했습니다. 독일 저녁에서 비난 편지가
30:54 쏟아졌습니다. 조국의 배신자 비겁한 겁쟁이 독일인의 이름에 먹칠라는 자 매일같이 협박 편지와 오물이 섞인 소포가 날아들었습니다. 한때 페터 카맨친트를 사랑했던 독자들이 이제는 헬스의 책을 불태웠다고 편지에 썼습니다. 헬스는이 시절을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하룻밤 사이에 독자를 잃었다. 그들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이 원하는 작가이기를 그만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햇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스위스 베른에서 전선 각지의 포로 소용소에 갇힌 독일군 포로들에게 책을
31:39 배포하는 인도주의적 사업을 조직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약 50만 건 이상의 책이 그의 손을 거쳐 포로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철조망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 책 한 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햇세는 마을부론 시절 밤마다 촛불 아에서 괴태를 읽던 자신을 기억하며 알고 있었습니다. 1916년은 해스에게 생에 최악의 해였습니다. 세계의 비극이 거의 동실 그를 덮쳤는데 각각만으로도 한 사람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것들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 요한네스의 죽음이었습니다. 요한네스는 해스가 평생 반항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마을부론 탈출 때도 자살 시도 때도
32:25 두 번의 이혼 때도 반전 선원 때도 아버지는 아들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틀렸다고 믿으면서도 그 아들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네스는 죽기 얼마 전 일기에 이렇게 섰습니다. 헤르마는 내가 원하는 길을 걷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 나는 이제 판단하지 않겠다.이 문장이 해스를 무너뜨렸습니다. 살아 있을 때 단 한 번도 제대로 화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영령 기회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반항의 대상이 사라지자 헬스는 뜻밖에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이 아직 거기 있었다는 것을, 그 마음이 사라지지
33:12 않았다는 것을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두 번째는 아내 마리아의 정신질환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삐걱거리던 결혼 생활, 혼자서 살림과 육가를 떠안며 지쳐가던 마리아가 마침내 무너졌습니다. 조층과 우울이 교체하는 증상이 점점 심해졌고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습니다. 헬스는 마리아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그 원인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그에게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는 막내 아들 마르틴의 중병이었습니다. 겨우 다섯 살 백의 아이가 병상에 누웠습니다. 햇세는 침대 옆에 앉아 아이의 손을 잡으면서 아버지로서 자신이 얼마나
33:59 무력한지를 절감했습니다. 병도 고치지 못하고 아내도 구하지 못하고 아버지와도 화해하지 못한 채 떠나보냈습니다.이 세 가지가 한꺼번에 쏟아졌습니다. 햇세 자신도 극도의 신경 세악과 우울증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밥을 먹지 못했고 잠을 자지 못했으며 그를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습니다. 서제에 앉아 빈 종이를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1916년 봄 햇세는 루첼은 근처 조엔베르크 요양원에 입원했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이본이었습니다. 더 이상 혼자서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를 치료한 의사가 유제프 베르나르트랑 박사했습니다. 랑은 칼을 구스타프 용의 직접 제자로 분석
34:45 심리학을 임상에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분석 심리학은 당시만에도 생서하고 논쟁적인 분야였습니다. 프로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에서 갈라져 나온 융의 이론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개인을 넘어서는 집단적 층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류 의학계는 회의적이었지만 헬스에게이 치료는 전혀 다른 무언가였습니다. 첫 면담에서 랑은 헬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햇세는 잠시 침묵했습니다. 긴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답했습니다. 나 자신입니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렵습니다. 랑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것이
35:32 시작이었습니다. 햇센랑 박사와 함께 총 여든 두 번의 심층 분석 세션을 진행했습니다. 한 번의 세션은 여러 시간에 걸쳐 이어졌고 헬스는 자신의 유년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것을 꺼내 놓았습니다. 칼부에 숨막히는 경건주의 아버지와의 갈등 마을부론 탈출 자살 시도 구마식의 수치 두 번의 실패한 결혼 전쟁 중의 고립 말로 꺼내 놓으면서 햇은 자신의 삶을 처음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이 이 과정에서 융의 핵심 개념들이 하나씩 횟세의 내면 지도로 들어왔습니다. 그 가운데 해스를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개성화 과정이었습니다.
36:19 융히 말하는 개성화는 인간이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성, 선과 악 같은 내면의 대립적 요소들을 억압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것들을 통합하여 온전한 자기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햇세는이 개념을 들으며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어린풋이 늦게온 것, 즉 인간 내면에는 서로 싸우는 두 가지 힘이 있고 그 싸움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융의 언어는 정확하게 설명해 줬었습니다. 해스는 그것을 몰라서 방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면서도 말할 언어가 없었던 곳이었습니다. 이제 그 언어를 얻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림자였습니다.
37:07 융이 말하는 그림자는 인간이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판단 때문에 억압하고 부정하는 자하의 어두운 측년입니다. 욕망 분노 질투 폭력성 성적 충동 같은 것들. 사회는 이것들을 숨기라고 요구하지만 융에 따르면 그것들을 억압할수록 그림자는 더 강해집니다. 그리고 결국 통제되지 않는 방식으로 터져 나옵니다.랑 박사와의 세션 중 어느 날 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내 안에 어두운 부분을 두려워했습니다. 칼부에서는 그것이 죄라고 배웠고 신학교에서는 그것이 악마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그 어두운 부분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랑이
37:54 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림자를 외면하는 사람은 절반의 인간입니다. 그림자를 끌어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당신이 두려워했던 그 어둠이 사실은 당신의 가장 창조적인 에너지의 원천입니다.이 말이 헬스의 평생을 바꿨습니다. 헬스는이 치료 기간 동안 자신의 꿈을 꼼꼼히 기록하여 랑에게 가져갔습니다. 융의 분석 심리학에서 꿈은 무의식이 의식에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해스의 꿈에는 강렬한 상징들이 반복해서 등장했습니다. 알을 깨고 나오는 새,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는 형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인물, 죽음과 재생의 이미지들.
38:41 랑은이 꿈들을 햇세와 함께 해석했고 햇세는 자신의 무의식이 얼마나 풍요롭고 얼마나 복잡한 세계를 품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그 꿈들이 고스란이 데미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소설 속 가장 유명한 문장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르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이것은 문학적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헬스 자신이 요양원에서 꾸었던 꿈의 이미지였습니다. 무의식에서 건져 올린 진짜 언어였습니다. 요양원에서 나온 횟세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외관상으로는 비슷해 보였지만 내면에서
39:27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선 사람 특유의 단단함이었습니다. 부서진 곳에 금을 채워넣어 오히려 더 아름다워지는 일본의 킨츠이 도자기처럼 햇세는 가장 깊이 깨진 경험을 통해 가장 단단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쓴 것이 데미안이었습니다. 헬스는이 소설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영으로 1919년 출관했습니다. 감명을 쓴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전쟁 기간 중 매공로 소리를들은 헬스의 이름은 독일 독자들에게 독약이었습니다. 소설이 이름이 아니라 내용으로 읽히기를 원했습니다. 그 전략은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40:13 데미아는 출관 즉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무명신인의 대비작으로 알고 열광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소년 에밀 싱클레어가 데미안이라는 신비로운 친구를 통해 세상에는 자신이 알던 착한 세계와 어두운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배우고 그 두 세계를 통합하는 내면의 여정을 걸어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은 단순한 성장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소설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오직 내 마음속에서 저절로 솟아나르는 것을 살아보려 했을 뿐이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이
40:59 이 두 문장이 전후 독일 청년들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습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독일은 태어였습니다. 소백만 명이 죽었고 카이저의 제국은 붕괴했으며 이전 세대가 믿던 모든 것 국가 신앙 가족 질서 진보가 포연 속에서 제가 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젊은이들은 그 폐어 위에 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기성 세대가 제시하는 답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답들이 이미 한 세계를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종류에 답이 필요했습니다. 해세의 소설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41:47 국가도 종교도 사회도 당신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당신 자신의 내면을 직면하고 당신 안의 어둠을 외면하지 않고 당신 자신이 되려는 용기를 가질 때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대미안니 전후 세대에게 전달한 메시지였습니다. 소설은 그의 권위 있는 폰타상을 수상했고 심사위원들이 작가의 정체를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햇세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햇세는 가면을 벗었습니다. 매국노라 불리던 작가가 전우 세대의 성경을 쓴 작가가 된 것이었습니다. 1916년에 무너짐이 1919년에 부활로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헬스의 삶에서 가장 깊은 구덩이가 가장 높은 도약에 발판이 되었습니다.
42:33 이것이 햇세가 평생 소설 속에서 말하려 했던 것에 실제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태어나르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것. 1919년 헬스는 마리아와 이혼하고 스위스 남부 티치노주의 작은 마을 몬타뇨라로 이사했습니다. 루가노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도 위에 자리잡은이 마을은 이탈리아를 쓰고 이탈리아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올리브 나무와 포도밭이 언덕을 덮고 있었고 멀리 알프스 만년설이 호수위로 빛났습니다. 햇는 성처럼 생긴 날고 기괴한 17세기 바로식 저택 카사 카무체의 방벽한을 빌려 살았습니다. 혼자 밥을 해먹고 혼자 걷고 혼자
43:19 썼습니다. 그러면서 햇세는 인생의 가장 창조적인 시기를 보냈습니다. 몬타뇨라에서 햇세는 수체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글이 안 써질 때마다 밖으로 나가 포도과 호수와 골목을 붓으로 담았습니다. 평생 3천점 이상의 수치아를 남겼고 햇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나는 미쳐 버렸을 것이다. 글 쓰기는 내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이고 그림 그리기는 내가 세상과 화해하는 방식이다.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이 수체아들로 만든 엽서를 판매하여 생활에 보텼습니다. 그리고 1920년대에 몬타뇨라에서 연이어 세 편에 걸작을 완성했습니다.
44:05 시따르타는 햇세가 두 단계에 걸쳐쓴 소설입니다. 1일부는 단숨했었지만 2부를 쓰는 데서 막혔습니다. 시따르타가 세속의 삶 속으로 들어가 쾌락과 욕망을 경험하는 부분을 쓰르는데 햇세 자신이 그 경험의 진실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의 2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1922년 마침내 완성했습니다. 소설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시따르타가 고타마 붓다를 만나는 대목입니다. 시따르타는 붓다의 가르침에 간복하지만 그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가르침이 완전하고 진실함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가르침을
44:51 통해 깨달음은 얻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깨달음은 얻은 것은 어떤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전수될 수 없습니다. 스승도 경전도 당신을 대신해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삶을 직접 살아냄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시따르타의 심장이었고 1911년 실망스러운 동남아시아 항해에서 태어난 철학이었습니다. 1927년 출간된 황야의 일은 햇세가 신사를 쓴 소설로 그의 작품 중 가장 실험적이고 가장 도발적입니다.이 이 소설이 나왔을 때 중년 남성의 내면적 방황과 성적 해방, 환각적
45:36 장년 때문에 독일에서는 햇세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해리 알러는 교향 있는 중년 지식인이지만 사회와 화해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로 마술국장 입구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문앞에 섰습니다. 광인들 외에는 입장 불가. 나는 웃으며 들어갔습니다. 어차피 나는 모든 기준으로 보아 광인이었으니까요. 황야의 1인는 출간 당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했지만 1960년대 미국 반문화 운동에서 재발견되어 히 세대의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록밴드 스테프 울프가이 소설의 이름을 그대로 밴드 쓴 것은 그 영향의 상징이었습니다.
46:23 1930년 발표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해스의 소설 중 가장 서정적인 문체를 가진 작품입니다. 중세 독일 수도원을 배경으로 금욕적 신학자 나르치스와 관능적 방 예술과 골드문트의 우정과 대립을 그립니다. 수십년지 다시 만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헬스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습니다. 나르치스여 나는 그대처럼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없었다면 나는 나 자신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르치스가 답합니다. 골드문채여, 그대가 없었다면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요.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요.
47:09 이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 금욕과 관능, 햇세는이 두 세계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 이야기가 아니라 햇세 자신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1924년 헬스는 루트뱅거와 결혼했습니다. 스위스 바제 출신의 젊은 성학가로 새보다 22살 연하였습니다.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삐걱했습니다. 루트는 콘서트와 파티와 사람들로 가득찬 삶을 원했고 햇세는 조용한 서제와 방해받지 않는 창작을 원했습니다. 사실상 결혼 직후부터 따로 살다시피 했고 3년 만인 1927년 이혼했습니다. 나는 두 번 실패했다. 그러나 실패의
47:55 이유는 상대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결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헬스의 예측은 틀렸습니다. 세 번째 결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니논 돌비는 우크라이나 체르니오치 태생의 미술 사학자로 헬스보다 16살 연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오래되었습니다. 니노는 18살이던 1910년대 초부터 헬스의 열렬한 독자였고 직접 편지를 써서 문적 감상을 전했습니다. 해스는 그 편지들에 성실이 답했고 수년의 서신교환 끝에 1931년 결혼했습니다. 니노는 헬스가 평생 찾던 파트너였습니다. 그의 창작이 얼마나 고독하고 성호적인
48:42 과정인지를 알았고 그 고독을 방해하는 대신 오히려 가능하도록 모든 것을 조율했습니다. 쏟아지는 편지를 대신 처리했고 방문객들을 걸러냈으며 원고를 정리했습니다. 햇세는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은 내가 숨쉴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요. 당신이 없었다면 유리할 유인은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요. 니논도 햇세에게 솔직했습니다. 햇세가 지나치게 자기 세계에 갇치면 직접 말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도피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으로 도망치는 것도 도피입니다. 햇세는 그런 말을들을 수 있는 관계가 처음이었습니다. 니논과의 결혼은 헬스가 세상을 떠나는 1962년까지
49:28 30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 청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만에 독일은 나치일당 독재 체제로 변모했고 1933년 5월 베를린 광장에서 유대의 작가와 반나치 지식인들의 책이 불태워졌습니다. 하니 하인네 지그은트 프로이트 베르톨트 브레이트의 책들이 불꽃 속으로 던져졌고 군중은 환호했습니다. 스위스 몬타뇨라에서이 소식을 듣던 패스는 조용히 분노했습니다. 그는 당시 출판사와 연계된 서평지에서 편집 고문으로 일하며 독자들에게 책을 추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이 자리를 이용해 나치가 금지한 유대의 작가들의
50:15 책을 꾸준히 추천했습니다. 나치 관계자들의 항의와 압력이 들어오자 헬스의 대답은 짧았습니다. >> 좋은 책은 좋은 책입니다. 저자가 유대인인지 아닌지는 내 서평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현직 고문직을 그만두었고 그의 책들은 나치 독일에서 판매가 제한되었으며 일부는 근서가 되었습니다. 나츠는 심지어 헬스에게 주어지는 종이 배금량을 제한하여 출판 자체를 방해했습니다. 경제적 타격은 상당했지만 햇세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몬타라의 햇집은이 시기에 망명 지직인들의 비공시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나치를 피해 독일을 떠난 토마스만이 스위스에 정착했을 때 햇세는 그를
51:01 적극 지원했고 두 사람은 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느 날만이 헬스에게 물었습니다. 헬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써야 합니까? 세상이 불타고 있는데 소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햇세가 답했습니다. 세상이 불탈수록 더 써야 합니다. 불이 꺼졌을 때 남아 있어야 할 것들을 지금 써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이 바로 유리할 유의 정신이었습니다. 1931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1943년에 완성한이 소설은 지필에만 12년이 걸렸습니다. 헬스는 유럽이 전쟁으로 불타는 동안 몬타뇨라의 서제에서 지성과 정신의 가치에 대한 가장 긴 질문을
51:46 써내려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크네이트는 인류 최고의 지적 공동체인 카스탈리엔 유의 대가자리를 스스로 버리고 평범한 소년의 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동료들이 그를 붙잡으며 말합니다. "네이트, 당신은 유의 대가입니다.이 자리를 버리고 한 아이의 교사가 되겠다는 것입니까? 큰네이트가 답합니다. 유의 대가는 유의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싶습니다. 완성된 형식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삶은 완성되지 않은 것들 속에 있습니다. 지성은 소중하지만 삶과 분리된 지성은 공허합니다. 유리할 유인은 1943년 스위스에서
52:33 출간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 헬스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주는 결정적 작품이 되었습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하며 유럽의 전쟁 끝났습니다. 몬타뉴라의 햇세는 예순 여덟살이었습니다. 그리고 1946년 가을 노벨문학상 수상통보가 왔습니다. 수상 이유는 깊은 인도주의와 높은 문체를 갖춘 창의적 작품들 그리고 고전적 인도 이상의 용감한 표현이었습니다. 햇세는이 소식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니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드디어 왔군요. 이제 편지가 더 많이 올 것 같어. 예상은 정확했습니다. 하루에 50통이
53:18 넘는 편지가 쏟아졌습니다. 헬스는 대문 앞에 방문객 사절 표지판을 걸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온 편지에는 밤을 세워 답장했었습니다. 삶의 고민을 털어놓는 독자들, 시련의 고통을 호소하는 청년, 전쟁에서 살아남은 뒤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군인에게 횟세스는 짧지만 진심이 담긴 답장을 보냈습니다. 노베상은 헬스의 생활 방식을 단 하나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아침에는 정원을 돌보고 나 수채화를 그렸고 오후에는 독서와 글 쓰기로 했으며 저녁에는 니논과 함께 소박한 식사를 했습니다. 한때 매국놀라 불리던 작가가 독일로 문학의 가장 영예로운 인물이 된 것이었지만 헬스는 그것을 즐기지
54:05 않았습니다. 과거에 상처를 들추는 것을 그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습니다. 백혈병이 서서히 진행되었고 시력도 약해져 말련는 니논이 책을 읽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햇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건강이 나빠질수록 시가 더 많아졌습니다. 마지막 시집에 실린 시들은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자연스러운 귀한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담고 있었습니다. 모든 꽃은 지려한다. 모든 빛은 저물려한다. 그리고 모든 사랑은 언젠가 이별을 원한다. 1962년 8월 8일 햇세는 정원의 죽은 나뭇가지를 정리해 불을
54:51 피었습니다. 그 불꽃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평화로운 일상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니논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튿날 아침인 8월 9일 햇세는 자신의 침대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여든 다섯 살이었습니다. 고통스럽지 않은 인종이었다고 니누는 전했습니다. 그녀가 곁에 있었습니다. 햇세는 몬타라의 성 아본디오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루가노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묘지였습니다. 묘비에는 화려한 문구 없이 이름과 연도만 새겨졌습니다. 파치와 과실을 싫어했던 햇세다운
55:37 마지막이었습니다. 햇세는 평생 딱 하나의 질문을 물고 들어졌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보면 가장 단순한 질문이고 어떻게 보면 가장 위험한 질문입니다.이 질문을 진지하게 파고들면 반드시 사회가 당신에게 씌운 가면과 맞닥뜨려야 하고 그 가면을 뜯어내려 할 때 엄청난 저항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햇세는 그 저항을 정면으로 받아냈습니다. 신학교에서 쫓겨났고 매국로 소리를 들었으며 두 번 이운했고 평생 우울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싸움의 끝에서 써낸 것들이 한 세기가 지나도록 사람들의 손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56:22 1892년 3월 15살 소년이 중세 수도원 담장을 넘었습니다. 그 담장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그는 몰랐습니다. 그냥 뛰쳐 나갔습니다. 때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용기 있는 그 한걸음입니다. 햇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새는 알을 깨기 위해 싸운다고 말이죠. 그에게 알은 신학교였고 국가라는 관광였으며 남들의 시선이었습니다. 그가 그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왔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의 위대한 문장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을 가두고 있는 그 아래 껍질이 너무 단단해서 막막하다면 오늘이 남자의 처절한 사투가 당신의
57:08 작은 망치가 되었길 바랍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으로 살기로 결심한 그 순간 이미 당신의 대미아는 시작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