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을 모르면 한국사 절반도 모릅니다ㅣ동방18현

간략한 요약

이 영상에서는 한국 유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18인의 학자들을 조명하며, 그들의 학문과 유산을 살펴봅니다. 이들은 문묘에 제향되었고, 각자의 업적과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각 인물의 생애와 영향을 권리낌으로 설명합니다.

  • 18인의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유학이 성립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그들의 학문과 사상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프닝 — 문묘에 모셔진 단 18인

영상은 한국 유학의 흐름을 설명하며, 문묘에 제향된 18인의 인물들이 소개됩니다. 이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 외에도, 한반도에서 학문을 이루고 시대의 정신을 형성한 인물들로, 총 18명이 이 명단에 포함되었다고 강조합니다. 이들은 신라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의 역사적 시기를 넘나드는 위대한 학자들입니다.

① 최치원 — 동방 한문학의 시조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나 동방 한문학의 시조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12세에 당나라로 유학해 천재적인 소질을 나타내며, 성리학 이전의 유교, 불교, 도교를 아우른 통합적 사상가로 명성이 높습니다. 그의 문집은 최초의 개인 문집으로 인정받으면서 한국 문학사에 중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② 설총 — 우리말로 경전을 풀다

설총은 655년에 태어나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해 한국어 표현의 기초를 다진 인물입니다. 그는 신문왕에게 바친 글 <화왕계>로도 유명하며, 이는 왕도 정치의 한국적 표현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업적은 사람들이 유학의 가르침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③ 안향 — 성리학의 씨앗을 들여오다

안향은 1243년에 태어나 고려 후기 성리학을 한반도에 도입한 인물입니다. 그는 원나라에서 주자학의 책을 가져와 국학을 살리기 위한 장학 기금을 만들었으며, 유학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노력이 한반도 성리학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④ 정몽주 — 동방 이학의 조종

정몽주는 1337년에 태어나 고려 말 성리학의 조종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교육 체제를 정비하고 지방 교육 기관을 세우며 성리학을 일반화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기여는 조선 후기에까지 이어져 통치 사상으로 자리 잡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⑤ 김굉필 — 평생의 소학동자

김굉필은 실천적인 도학을 강조하며, 평생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범한 도덕서인 소학의 가르침이 삶에 실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신념은 훗날 그의 제자들, 특히 조광조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⑥ 정여창 — 효행으로 일군 학문

정여창은 1450년에 태어나 고난 속에서도 효행을 중시하며 성리학을 발전시킨 인물입니다. 그의 학문의 핵심은 효와 성리학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후의 영남 유학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⑦ 조광조 — 도학 정치의 꿈

조광조는 1482년에 태어나 도학과 현실 정치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고전적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고 개혁을 통해 보다 도덕적인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적 접근은 시대의 제약에 부딪혀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⑧ 이언적 — 주리론의 길을 열다

이언적은 조선 유학에서 주리론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인간과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와 도덕의 법칙을 깊이 탐구하며, 그의 대표작인 <구인록>은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⑨ 이황 — 동방의 주자, 성학십도

이황은 1570년에 태어나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강조하며 성리학을 심화시킨 인물입니다. 그의 저서 <성학십도>는 어려운 철학을 쉽게 설명하며, 이황은 동방의 주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⑩ 이이 — 변화를 외친 경장가

이이는 1536년에 태어나 현실 개혁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의 학문은 당시 조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법과 제도를 어떻게 개선할지를 주제로 한 국가 개혁 매뉴얼을 제시했습니다.

⑪ 성혼 — 두 거장 사이의 다리

성혼은 1535년에 태어나 이황과 이이의 학문적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균형잡힌 시각으로 두 사류의 입장을 조화시키며 중용의 미덕을 강조했습니다.

⑫ 김장생 — 예학을 집대성하다

김장생은 1548년에 태어나 예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조선의 도덕적 기준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의 저서 <가래집남>은 한국 예학의 표준이 되며, 조선 후기의 예절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⑬ 김집 — 유일한 부자(父子) 배향

김집은 1574년에 태어나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국가의 의례와 도덕적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의 사상이 이후 조선 국가 체제의 기초가 되어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습니다.

⑭ 송시열 — 주자학의 절대화

송시열은 1607년에 태어나 주자학을 절대화하고, 정치적 행동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그는 연구의 진리를 강조하며, 그의 사상은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⑮ 송준길 — 온건한 예학의 표준

송준길은 1606년에 태어나 그의 학문은 온건한 예학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공식적인 학문 체계로 예학을 정립하여 조정의 이념으로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⑯ 김인후 — 호남 유학의 종장

김인후는 1510년에 태어나 호남 지역 유학의 대가로 불립니다. 그의 학문은 천명도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자연을 통해 도학을 설명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⑰ 조헌 — 의병으로 산화한 학자

조헌은 1544년에 태어나 임진왜란에서 의병으로 전사한 인물입니다. 그는 학문과 신념을 행동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존경받고 있으며, 그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⑱ 박세채 — 탕평의 철학을 열다

박세채는 1631년에 태어나 탕평론의 철학적 기초를 세운 인물입니다. 그는 서인과 남인의 장점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그의 사상은 후대 정조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엔딩 — 천 년 학맥의 마무리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18인의 학자들이 한국 유학사의 중요성을 어떻게 형성했는지를 돌아보며, 그들의 업적과 사상이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각각의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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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한반도 유학의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한 곳에 다다르게 됩니다. 바로 문묘. 공자를 모시는 사당입니다. 그런데이 문묘에는 공자와 그 제자들만 모셔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땅에서 태어나 학문을 이루고 그 학문으로 한 시대의 정신을 빚어낸 인물들도 함께 모셔졌죠. 이들을 가리켜 동방의어진 자들 동현이라 부릅니다. 한반도 천년의 유학사에서이 문묘에 배양된 인물은 몇 명일까요? 단 18명입니다. 신라 시대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학문의 정점에 오른 자만이이 명단의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0:46 오늘은 이른바 동방 18연 유학의 거인 18명의 학문과 유산을 만나보려 합니다. 그들이 평생을 갈고 닦은 학문이 무엇이었고 어떤 책을 남겼으며 그 사상이 어떤 흔적을 새겼는지를 짚어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가장 먼저 문묘에 배양된 학자는 고은 최치원입니다. 857년에 태어났고 말년에 가야산으로 들어간 뒤 행적이 묘해졌습니다. 죽은 곳도 죽은 날도 분명치 않은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학문적으로는 유교와 불교와 도교,

1:32 삼교를 아우른 사상가이자 동방 한문학의 시조로 평가됩니다. 최치원은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외국인을 위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한 천재였습니다. 그가 당나라 황소의 난 때에 지은 글 토경문은 그야말로 전설로 불리는데 반란군의 우두머리가이 글을 읽다가 평상에서 굴러떨어졌다고 전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의 진짜 무게는 사상의 깊이해 있었습니다. 성리학이 들어오기 훨씬 전 그는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두루 꿰뚫는 통합적 안목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문집 개원 필경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문집으로 꼽히죠. 한문학이라는 거대한 강물의 첫

2:18 발언지가 바로이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고려 현종 11년 1020년에 문묘에 배양되었습니다. 학문으로 한반도와 중원을 동시에 울린 사람 동방 한문학의 시조라는 이름이 결코 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로 등장할 인물은 신라의 설총입니다. 655년 무렵에 태어나 노한으로 생을 마감했죠. 원요 대사의 아들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설화 유학의 시초라 할 수 있습니다. 설총에 가장 빛나는 업적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 말을 적는 표기

3:04 책에 이둘을 정리한 것입니다. 당시 학문의 언어는 모두 한문이었지만 보통 사람은 경전 한 줄 읽기가 하늘의 별딱이었죠. 그런데 설총이 이둘을 정리하면서 유학의 가르침이 비로소 우리 인말과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가 신문왕에게 바친 글 화왕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꽃의 왕 모란에게 미인과 노인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빌려 임금이 어떤 신하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를 읽깨운 글이였죠. 도덕으로 다스리는 정치, 즉 왕도 정치의 첫 한국적 표현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던 셈입니다. 설총은 고려 현종 13년 102년에

3:49 문묘에 배양됩니다. 수천년 한국 유학사 가장 깊은 뿌리에 그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세 번째 인물은 회헌 안양입니다. 1243년에 태어나 1306년 노한으로 세상을 떠났죠. 안양을 따라다니는 가장 큰 수식어은 한반도 최초의 성리학 도입자라는 이름입니다. 안양이 살던 고려 후기는 학문의 황무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불교는 부패했고 유학은 형식만 남아 있었죠. 그때 안양이 원나라의 사신으로 갔다가 운명의 책을 만납니다. 바로 송나라 학자 주의가 정리한 새

4:36 학문 주자학의 책들이었습니다. 그는 주자 전설를 직접 손으로 베겼써서 돌아옵니다. 한반도 성리하게 씨앗이 이렇게 한 사람의 손으로 건너왔던 것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사는 사상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망해가던 국학을 살리기 위해 서막전이라는 장학 기금을 만들어 관리들의 돈을 모아 학생을 길러내는 일에 썼습니다.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제도를 설계한 행정가였던 셈입니다. 안양은 고려 충수광 6년 1319년에 문묘에 배양됩니다. 한반도의 주자학이라는 거대한 강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은 모두이 한 사람의 결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5:27 조선 유학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포 정몽주입니다. 1337년에 태어나 1392년 선주교에서 이방원 세력에게 피살되었죠. 그를 부르는 가장 무거운 칭호는 동방 이학의 조종.이 이 땅 성리학의 시조라는 이름입니다. 흔히 정몽주를 고려의 끝까지 충성한 충신으로만 기억하지만 그의 진짜 무게는 학문에 있습니다. 안양이 씨앗을 들여왔다면 정몽주는 그 씨앗을 뿌리내리게 한 사람이었죠. 그는 수도 개경에 오부학당을 지방에는 향교를 두는 교육 체제의 기트를 다집니다. 그가 닦아둔이 교육의 골격은 훗날 조선으로 그대로 이어져

6:12 완성되었습니다. 성리하기 단순한 학문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 이념으로 자리잡는 길이 바로 여기서부터 열렸던 것입니다. 그의 강의는 한 글자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그의 해석은 중국 학자들도 무릎을 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스승이었던 목은 이세이 그를 가리켜 동방 이학의 조종이라 부른 까닭기 여기에 있었죠. 500년 조선 유학이 흘러간 그 거대한 강의 발언지가 바로 정몽주였던 것입니다. 조선 중종 12년 1517년에 문묘에 배양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125년만이었죠. 조선이라는 나라가 자기 학문의 뿌리를

6:58 어디에 두었는지이 배향이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부터는 광해군 2년에 한 번의 문묘에 배향된 다섯 명의 학자 오현이 등장합니다. 그 첫 자리에 한당 김갱필이 있습니다. 1454년에 태어나 1504년 갑자사와 때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 인물입니다. 그의 학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실천하는 도학입니다. 김갱필은 화려한 이론 논쟁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어떻게 살 것인가였죠. 그래서 평생 손에서 놓지 않은 책이 바로 소학입니다.

7:44 소학은 어린 학생들을 위한 기초 도덕책으로 어른들은 이미 졸업했다고 여기는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김갱필은 달랐습니다. 그는 사람이 이른이 되어도이 책의 가르침을 다 실천하지 못한다고 보았기에 스스로를 소학 동자라 부릅니다. 학문이 입에만 머물지 않고 매일의 몸가짐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이 별명 안에 다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 광해군 2년 1610년에 문묘에 배양됩니다. 그가 뿌린 실천 도학의 정신은 훗날 영남 사림과 그의 집계 제자 조광조에게로 고스란이 흘러갑니다.

8:30 여섯 번째는 일두 정려창입니다. 1450년에 태어났고 1498년 무호사와의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죠. 그는 6년의 유배 생활 끝에 1504년 외롭게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은 뒤에도 화를 입습니다. 갑자 사와 때 부관참 시형을 받은 것입니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적 의리와 효행의 학문으로 요약됩니다. 정려창은 김갱필과 마찬가지로 실천을 중시했습니다. 다만 그가 평생을 바쳐 갈고 닦은 것은 효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효는 단순한 정성이 아닌 성리하게 우주적 질서와 연결됩니다.

9:17 부모를 섬기는 마음이 곧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일이라 본 것입니다. 가문의 질서, 사회의 도리, 우주의 이치가 하나로 꿰뚫어지는 깊은 학문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학풍은 영남 지역 선비들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고 광해군 2년 김갱필과 함께 문묘에 배양됩니다. 말이 아닌 삶으로 학문을 증명한 사람. 그것이 정려창이라는 이름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김갱필. 그가 무호사와로 귀양가 있던 유배지까지 찾아가 항맥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수제자가 있습니다. 바로 정암 조광조입니다.

10:04 1482년에 태어나 1519년 김묘사와 때 사약을 받은 인물로 당시 나이 38비였습니다. 그의 학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도학 정치의 완성입니다. 도학 정치란 성리학의 도덕적 이상을 그대로 현실 정치에 옮겨 놓겠다는 꿈이었습니다. 김갱필이 자기 몸을 닦는데 집중했다면 조광조는 그 도학으로 세상을 통째로 바꾸려 했습니다. 항맥은 이어졌으되 그 칼끝이 향한 곳은 훨씬 더 멀고 위험했죠. 그 개혁의 상징이 바로 현량과였습니다. 화려한 시험 답안지나 문장 암기 실력이 아니라 학문과 도덕성을 두루

10:51 갖춘 임무를 천거받아 등용하는 파격적인 제도입니다. 기존의 기득권이었던 훈구파를 밀어내고 도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림들로 조정을 채우려는 정면 승부였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너무도 완고했고 개혁의 속도는 너무 빨랐던 것일까요? 결국 그는 김요사화라는 덫에 휘말려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하지만 그가 온몸을 던져 꿈꾼 도학 정치는 죽지 않았습니다. 선조대의 영의정으로 추중된데 이어 광해군 2년 마침내 문묘에 배향되면서 그의 이상은 조선 살림의 영원한 등불이 되었습니다.

11:38 여덟 번째는 회제 이연적입니다. 1491년에 태어났고 1553년 유배지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한 그는 조선 유학사에서 주리론의 선구자입니다. 주리론이란 우주와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 원리를 이해해 둔다는 사상으로 여기서이란 변하지 않는 도덕의 법칙이죠.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따라야 할 큰 원리가 먼저 있고 만물은 그 원리를 따라 움직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현적은이 길을 조선에서 가장 먼저 깊이 있게 닦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저서 구인록 어물 구하는 기록이란 이름의이 책에는 평생에 걸친 그의 사색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12:26 그는이 책에서이가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차분히 풀어냅니다.이 책은 훗날 조선 유학사의 검목에게 들어가게 되는데요. 바로 퇴계 이황이었습니다. 이황은 이연적의 글을 깊이 읽고 자신의 철학을 세우는 결정적 나침반으로 삼습니다. 광해군 2년에 문묘에 배양되는데 영남학파라는 거대한 산맥의 첫 등성이가 바로 이연적이라는 봉우리였던 것이었습니다. 아홉 번째는 방금 말씀드린 퇴계 이황입니다. 태어나 1570년 노한으로 세상을 떠났죠.

13:12 더 설명이 필요할까 싶은 이름입니다만 그의 학문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짚어두어야겠습니다. 이황은 앞서 이연적이언 주리론의 길을 한 차원 더 깊이 파고든 학자였습니다. 그의 핵심 주장은 이발 즉 인간 안에 깃든 도덕적 본성이 스스로 발현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선하며 그 선함이 저절로 드러나도록 학문과 수양을 통해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사상이었습니다. 그의 평생의 결정체는 단연 성학식도로 성리하게 방대하고 어려운 핵심 철학을 단 열 개의 그림과 짧은 해설로 압축한 책입니다. 그리고이 책은 어린

13:58 나이로 즉위한 선조에게 받쳐집니다. 학문의 정수를 그림 열폭에 담아 어린 임금에게 건내려 한 노학자의 마음이 그 안에 다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영향은 바다를 건너 일본 유학계에까지 미쳤고 따라서 그를 동방의 주자라 부르죠. 광해군 2년에 문묘에 배양됩니다. 열 번째는 제가 세종 다음가는 천재로 다뤘던 인물 율곡 2입니다. 그는 1536년에 태어나 1584년 49의 나이에 괄로와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의 학문은 주기론 그리고 현실

14:43 경장론으로 정리됩니다. 경장이란 검고의 줄을 다심에듯 제도를 새로 고친다는 뜻으로 이황이 변하지 않는 이치를 강조했다면 이인은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의 기운기에 주목했습니다. 사람도 사회도 매순간 흐르는 강물 같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의 학문은 책상 위에 머물지 않고 곧장 정책으로 이어집니다. 그가 선조에게 바친 성학 지표는 단순한 도덕책이 아니었습니다. 법과 제도를 어떻게 고쳐야 백성이 살 만한 나라가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일종의 국가 개혁 매뉴얼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뿌린 개혁의 씨앗 중 하나가 훗날의 대동법으로 자라났죠.

15:30 천재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의 사상가였습니다. 조선 숙종 8년 1682년에 문묘에 배양됩니다. 11번째 인물은 우성원입니다. 1535년에 태어났고 1598년 노한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2위와 한 살 차이에 절친한 벗이었습니다. 그의 학문은 이기설의 조아와 절충에 있었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이황의 주리론과 이의 주기론이 격렬하게 부딪히던 때입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네 가지 단서 사단과 일곱 가지 감정 칠정이 이에서

16:15 나오느냐 기에서 나오느냐를 두고 학자들이 평생을 두고 다투었죠. 성우는이 한복판에서 독특한 길을 걸었습니다. 기호학파의 중심에 서서 율곡과 평생을 교류하면서도 퇴계 이황이 강조한 도덕적 원리 역시 깊이 포용하려 했습니다. 양쪽에 장점을 아우르는 절충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중간 자적 입장을 끝까지 견지했던 것입니다. 이런 균형잡힌 시선은 흔치 않은 미덕이었으며 격렬한 논쟁의 시대에 다리 역할을 자처한 학자. 그것이 성원이었습니다. 조선 숙종 8년에 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됩니다.

17:01 두 벗의 우정이 사후 100년이 지나서도 나란이 이어졌던 셈입니다. 조선의 현실 개혁을 외쳤던 율곡 2의 학문을 고스란이 물려받은 수제자가 바로 사계 김장생입니다. 1548년에 태어나 1631년 노한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를 따라다니는 칭호는 조선 예학의 대성자입니다. 예학이란 사람의 일생과 가문의 의뢰를 성리학의 원리에 따라 정밀하게 정리한 학문입니다. 김장생이 학문에 본격적으로 매진할 무렵 조선은 임진외란이라는 거대한 재난을 막 겪은 뒤로 사람도 마을도

17:46 가문도 모두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단순한 페어가 아닌 무너진 도덕과 질서였죠. 그는 결심합니다. 사람들이 다시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그 행동의 매뉴얼을 만들어야겠다고 말이죠. 그렇게 탄생한 책이 가래집남입니다. 집안에 예법을 모아 풀이한이 책은 이후 조선 4대부 가문의 표준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학문이 추상이 아니라 매일의 행동을 빚어내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그는 평생을 들여 증명했습니다. 조선 숙종 43년 1717년에 문묘에 배양됩니다.

18:32 김장생의 친하들이자 학문을 가장 완벽하게 이어받은 수제자가 바로 신독재 김집입니다. 1574년에 태어났고 1656년 노한으로 세상을 떠나는데 동방 18연 가운데 유일한 부자 배양이라는 점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그의 학문은 아버지의 예약을 이어받아 한 차원 끌어올린 데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가문의 예법을 정리했다면 김집은 그 예법을 사적인 가문의 일을 넘어 나라 전체의 의뢰와 도덕정치의 사상적 뼈대로 키워냈죠. 그가 활동한 때는 효종되었습니다. 병자 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꿈꾸던 시기로 효종이 새로운 국가

19:18 질서를 세우려 할 때 그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김집입니다. 또 하나의 유사는 그가 길러낸 제자들입니다. 송시얼, 송중기를 비롯해 훗날 조선 후기 사상를 좌우할 거물들이 모두 김집 문화에서 나왔습니다. 한 사람의 스승이 한 시대의 학풍을 빚져낸다는 말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렸습니다. 조선 영조 32년 1756년에 문묘에 배양됩니다. 김집의 문화에서 함께 수학하며 조선 후기 사상사를 호령하게 되는 두 거두가 바로 양송이라 불리는 송시열과

20:05 송준길입니다. 그 첫 번째 거두우 우암송시얼은 1607년에 태어났고 1689년 기사국대 사약을 받습니다. 그의 학문을 관통하는 두 축은 주자학의 절대화 그리고 춘추데의입니다. 송시얼은 송나라 학자 주의 학문을 거의 종교에 가까운 진리로 받들었습니다. 주자가 한 말은 곧 진리요. 그 한자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죠. 그를 움직인 또 하나의 사상이 춘추데이로 옳고 그름을 엄정히 가리는 큰 뜻이라는 의미죠. 그는이 사상을 바탕으로 효종과 함께 북벌을 꿈꾸었습니다. 청나라에 당한 치옥을 갚고 명나라의

20:52 정통성을 잊겠다는 거대한 기획이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간음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조선 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이름이 오은 신하가 바로 송시열입니다. 그를 따른 사람도 미워한 사람도 그를 피해서는 정치를 할 수 없었을 정도죠. 한 사람의 학자가 한 시대를 통째로 짊어진 셈이었습니다. 조선 정조 9년 1785년에 문묘에 배양됩니다. 양송의 또 다른 한축 동춘당 송중길입니다. 1606년에 태어났고 1672년 노한으로 생을 마감했죠.

21:38 송시얼과 한 살 차이의 동지이자 함께 김집문화에서 배운 동문이었습니다. 그의 학문은 치밀하고 온건한 예약에 정립해 있습니다. 송시얼과 송중길은 흔히 양송이라 함께 묶기지만 두 사람의 결은 사뭇 달랐죠. 송시얼이 단호하고 격렬했다면 송중길은 부드럽고 세밀했습니다. 같은 길을 걸으면서도 그 걸음거리가 달랐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공원은 이의 학문을 조정의 공식 학풍으로 자리잡게 한 것입니다. 율곡의 사상이 책장 속 이론이 아닌 나라를 움직이는 실제 원리가 되도록 정밀하게 다듬어낸 것이었습니다.

22:24 동시에 그는 예약에 있어서도 표준을 세웁니다. 김장생과 김집이 닦은 길을 더욱 정교하게 깎아내어 누구나 따를 수 있는 의뢰의 본보기로 만들었죠. 병렬한 시대일수록 온건한 사람이 그리워지는 법으로 송중길은 그 자리에 있었던 학자입니다. 정조 9년에 송시얼과 함께 문묘에 배양됩니다. 16번째는 하서 김민후입니다. 1510년에 태어났고 1560년 병으로 세상을 떠난 그는 호남 유학의 종장 즉 호남 항맥의 큰 어른으로 불립니다. 그의 학문에서 빛나는 부분은 천명도의

23:10 계정입니다. 천명도란 하늘의 이치가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내려와 자리잡는지를 한폭의 그림으로 풀어낸 도식으로 김민은이 천명도에 대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이황과 깊이 교류한 그였지만 이기론에 있어서는 결코 그의 그늘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또 다른 면모는 시문에 있습니다. 자연의 변화 속에 깃든 우주의 섭리를 노래한 그의 시들은 도학을 문학으로 풀어낸 복이 드문은 결실이었죠. 학문이 차가운 이론에 갇치지 않고 산수와 사계절의 흐름 속에 살아숨쉰다는 것을 그는 자기 삶으로

23:55 보여주었습니다. 인종이 세자 시절 그에게 글을 배웠고 깊은 신임을 보냈을 정도입니다. 조선 정조 20년 1796년에 문묘에 배향됩니다. 17번째는 중봉 조헌입니다. 1544년에 태어나 1592년 임진회란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김장생과 마찬가지로 이의 학통을 이어받은 제자였죠. 그의 학문은 실천적 주기론의 정점이라 평가됩니다. 그는 스승 이의 현실 개혁 사상을 머리로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이었습니다.

24:43 그를 떠올릴 때 빠지지 않는 일화가 도끼를 들고 올린 상소 지부상소입니다. 그는 임금에게 간원을 올리되 도끼를 곁에 두었는데 자신의 말이 틀렸으면이 도끼로 자신의 목을 베어 달라는 결현한 뜻이었습니다. 학자의 말은 곧 자기 목숨이라는 것을 그는 형식이 아니라 무기로 보여 주었습니다. 학풍이 그러했으니 행동도 그러했던 것일까요? 임진회란이 터지자 그는 곧장 의병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충청도 금산에서 700명의 의병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그곳에서 쓰러졌습니다. 그 자리에 세워진 700 의사 무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묻고 있죠.

25:29 학문이 무엇이고 신념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그는 고종 20년 1883년에 문묘에 배양됩니다. 마지막 18번째는 남계 박세체입니다. 1631년에 태어났고 1695년 노한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학문이 한 시대를 연지점은 탕평론의 철학적 기초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두루다는 정치 이념으로 박세체가 살던 때는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죽고 죽이는 붕당 정치의 한복판이었습니다. 학자가 다른 당파의 학문을 인정한다는

26:15 것 자체가 위험했던 시대였죠. 그런데 박세체는 그 위험을 무릎습니다. 그는 서인의 학문에 뿌리를 두면서도 남인의 학문이 지닌 장점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양쪽에 사상적 미덕을 조화시키는데 평생을 바친 것입니다. 그가 주장한 황극 당평설은 단순한 정치 구호가 아닌 임금이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큰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깊은 철학적 기초였습니다.이 이 사상은 훗날 영조와 정조로 이어지는 탕평 정치의 큰 문을 열어 주게 됩니다. 고종 20년 1883년에 중봉 조헌과 함께 문묘에 배양됩니다. 동방 18현의 마지막 자리에 오은

27:02 느음의 큰 학자였습니다. 지금까지 동방 18현을 차례로 만나 보았습니다. 신라의 설총에서 시작해 조선말에 박세체에 이르기까지 천년에 걸친 한반도의 지성사가이 18명의 이름 속에 압축되어 있죠. 하지만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숨겨진 역사가 있습니다.이 성스러운 명예의 전당이 사실은 처절한 정치적 전쟁터였다는 사실입니다. 후대 학계와 정개에서 이들의 자격을 두고 버린 논쟁은 치열했습니다. 우암송시은 한 시대를 통째로 뒤흔든 거인이었지만 반대파에게는 학문을 독점한 정쟁의 몸통이라는 극단적인

27:47 평가를 받으며 배양을 두고 수백년간 상소문이 올라갑니다. 우 성원은 임진회란 당시의 행적과 처신을 두고 훗날 거센 탄핵을 받아 이미 문묘에 모셔진 위패가 사당 밖으로 내쫓기는 출량의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정권이 바뀐 뒤에야 겨우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죠. 마지막을 장식한 박세체 역시 서인과 남인을 모두 아우르는 탕평을 주장했다가 당대 학계 양측 모두에게 변절자와 위선자라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했습니다. 왜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것일까요? 조선의 선비들에게 문묘 배양이란 단순한 개인의 명예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학문이 국가의

28:34 정통인가? 우리가 믿는 진리가 곧 국가의 정의인가를 증명하는 하나의 칼날이었기 때문이죠. 문묘의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그 당파가 조선의 정신을 지배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기에이 18명의 명단은 웅장한 학문의 결실인 동시에 자신들이 믿는 학문적 신념과 가치를 국가의 정신으로 세우기 위해 평생에 걸쳐새겨진 묵직한 흉터이기도 한 셈입니다. 시청자 여러분께서는 18명 가운데 가장 마음에 깊이 남는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시대를 고뇌하고 자신의 학문을 삶과 죽음으로 증명하려 했던 그 거인들의 치열함만큼은

29:20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영상이 의미 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응원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저에게는 가장 큰 힘이 됩니다. 긴 영상 함께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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