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 한국사 353회] 넘버2 홍국영은 어쩌다 몰락의 길을 걸었을까? feat 미스코리아 원빈 효의왕후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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خلاصه مختصر

این ویدیو به بررسی ظهور و سقوط هونگ گوکیونگ، یکی از چهره‌های قدرتمند در دوران سلطنت پادشاه جونگجو می‌پردازد. هونگ گوکیونگ با استفاده از نفوذ خود، خواهرش را به عنوان همسر پادشاه منصوب کرد و تلاش کرد تا با به فرزندی گرفتن یک شاهزاده، قدرت خود را تثبیت کند. با این حال، جاه‌طلبی‌های او باعث شد تا پادشاه جونگجو او را از قدرت برکنار کند و در نهایت به تبعید او منجر شود.

  • هونگ گوکیونگ از قدرت خود برای منصوب کردن خواهرش به عنوان همسر پادشاه استفاده کرد.
  • او تلاش کرد تا با به فرزندی گرفتن یک شاهزاده، قدرت خود را تثبیت کند.
  • جاه‌طلبی‌های او باعث شد تا پادشاه جونگجو او را از قدرت برکنار کند.

ظهور هونگ گوکیونگ

در دوران سلطنت پادشاه جونگجو، هونگ گوکیونگ به سرعت در حال افزایش قدرت بود. او مورد اعتمادترین فرد پادشاه بود و کنترل امور نظامی را در دست داشت. پادشاه جونگجو به هونگ گوکیونگ اعتماد کامل داشت و به او اجازه می‌داد هر کاری که می‌خواهد انجام دهد. با این حال، تاریخ نشان می‌دهد که وقتی افراد بیش از حد به قدرت معتاد می‌شوند، قضاوتشان مختل می‌شود و نمی‌توانند جلوی خود را بگیرند.

انتصاب خواهر هونگ گوکیونگ به عنوان همسر پادشاه

هونگ گوکیونگ که از قدرت خود راضی نبود، تلاش کرد تا خواهرش را به عنوان همسر پادشاه منصوب کند. خواهر او، بانو وونبین، اولین همسری بود که از طریق فرآیند سه مرحله‌ای انتخاب همسر (Samgantaek) به این مقام رسید. این فرآیند شامل انتخاب نامزدها از بین دختران خانواده‌های اشرافی بر اساس سن، خانواده و ظاهر بود. هونگ گوکیونگ با استفاده از نفوذ خود، خواهرش را بدون در نظر گرفتن شایستگی‌های او، به این مقام منصوب کرد.

نگرانی پادشاه جونگجو از قدرت گرفتن خاندان همسر

پادشاه جونگجو نگران افزایش قدرت خاندان همسر بود. او می‌دانست که این امر می‌تواند تهدیدی برای سلطنت او باشد. هونگ گوکیونگ با منصوب کردن خواهرش به عنوان همسر پادشاه، قدرت خود را به خانواده سلطنتی گسترش داد. اگر خواهرش پسری به دنیا می‌آورد و آن پسر پادشاه می‌شد، هونگ گوکیونگ به هدف نهایی خود رسیده بود.

مرگ مشکوک بانو وونبین

بانو وونبین، یک سال پس از انتصاب به عنوان همسر پادشاه، درگذشت. هونگ گوکیونگ به مرگ خواهرش مشکوک شد و فکر کرد که او مسموم شده است. او مظنون به ملکه هیووی بود. ملکه هیووی همسر اصلی پادشاه جونگجو بود و از ورود بانو وونبین به دربار نگران بود. هونگ گوکیونگ خدمتکاران ملکه را شکنجه کرد تا اعتراف کنند که ملکه دستور مسموم کردن خواهرش را داده است، اما هیچ‌کس اعتراف نکرد.

به فرزندی گرفتن شاهزاده سانگ گیون

پس از مرگ بانو وونبین، درباریان از پادشاه خواستند که همسر جدیدی انتخاب کند. با این حال، هونگ گوکیونگ اجازه این کار را نداد. او به جای این کار، شاهزاده سانگ گیون، پسر شاهزاده اونئون را به عنوان پسرخوانده بانو وونبین انتخاب کرد. در آن زمان، پادشاه جونگجو فرزندی نداشت و وضعیت جانشینی تاج و تخت نامشخص بود. هونگ گوکیونگ با به فرزندی گرفتن شاهزاده سانگ گیون، تلاش کرد تا قدرت خود را حفظ کند و ارتباط خود را با خانواده سلطنتی حفظ کند.

برکناری هونگ گوکیونگ از قدرت

پادشاه جونگجو به طور مداوم رفتارهای نامناسب هونگ گوکیونگ را نادیده می‌گرفت. هونگ گوکیونگ به طور مداوم در حال افزایش قدرت خود بود. او از طریق سازمانی به نام سوگیسو، کنترل امور نظامی را در دست داشت. او همچنین در انتصابات دولتی، سیاست‌ها و مسائل مربوط به جانشینی دخالت می‌کرد. در واقع، او از قدرت پادشاه سوء استفاده می‌کرد.

استعفای ناگهانی هونگ گوکیونگ

در یک روز، هونگ گوکیونگ به طور ناگهانی استعفای خود را تقدیم کرد. پادشاه جونگجو بلافاصله با استعفای او موافقت کرد و به او عنوان افتخاری بونگجوها را داد. بونگجوها یک مقام ارشد بازنشسته بود که به طور منظم به دربار می‌آمد، اما در امور اجرایی دخالت نمی‌کرد. در واقع، این یک عنوان افتخاری بود که به عنوان احترام به مقامات بازنشسته داده می‌شد.

دلایل استعفا و برکناری هونگ گوکیونگ

دلایل دقیق استعفا و برکناری هونگ گوکیونگ مشخص نیست، اما به نظر می‌رسد که پادشاه جونگجو نگران افزایش قدرت او بود. هونگ گوکیونگ حتی پس از مرگ خواهرش، با به فرزندی گرفتن یک شاهزاده، به گسترش نفوذ خود در خانواده سلطنتی ادامه داد. پادشاه جونگجو می‌دانست که این امر می‌تواند تهدیدی برای سلطنت او باشد.

تبعید و مرگ هونگ گوکیونگ

پس از برکناری هونگ گوکیونگ از قدرت، حامیان او تلاش کردند تا او را به قدرت بازگردانند، اما این تلاش‌ها با شکست مواجه شد. در سال 1780، عموی هونگ گوکیونگ، هونگ سون، از مقام خود برکنار شد و کل خاندان هونگ شروع به متزلزل شدن کرد. در ادامه، کیم جونگ سو دادخواستی برای استیضاح هونگ گوکیونگ به دربار ارائه کرد. پادشاه جونگجو بلافاصله این دادخواست را پذیرفت و هونگ گوکیونگ از تمام قدرت خود محروم شد. او به هئونگسونگ، استان گانگ وون تبعید شد و در سال 1781 در سن 34 سالگی درگذش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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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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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정조의 장용형은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무사들은 하나같이 일당백이었다. 자연히 왕건도 굳건하였다. 가장 믿는 오른팔 홍구경도 잘 나갔다. 도승지를 한결같이 맡았고 병권도 그의 손에 지어졌다. 정조는 홍구경이라면 무조건 믿었다. 시종일간 우리 구경이 하고 싶은 것 다 해였다. 하지만 역사는 말해준다. 사람이 권력에 너무 취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브레이크를 잡지 못한다고. 낭떨르지를 향해 달리고 있어도 권력에 취한 그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조광조가 그랬고 히말로가 그랬다. 과연 홍구경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홍구경은지고 있는 권력도 모자라 자신의 누이를 빈으로 간택되도록 손을

0:47 썼다. 누이는 을마면 돼.을 얼마면 되겠니? 원빈이었다. 조선 역사상 삼간택과 가래의 절차를 거쳐 처음부터 빈으로 입궁한 최초의 후궁이었다. 상관이란 왕실에서 왕비나 높은 쥐의 후궁을 뽑을 때 후보자 중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세 차례에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택하는 절차이다. 첫 번째가 초관으로 전국의 양반과 처녀들 중에서 나이, 가문, 외모 등 기본 조건을 갖춘 후보들을 처음 선발한다. 두 번째는 재간택으로 초관에서 선발된 처녀들을 더 자세하게 평가하여 왕실 예법, 품성, 건강 등을 심사하여 몇 명으로 압축한다. 마지막이 삼간테으로 왕과 왕실 어른들이 직접 참여하여 최종 한

1:34 명을 선정한다. 미스코리아 진 뽑는 것보다 더 빡센 과정인 것 같다. 자기 마누라를 뽑는 일이니 심사를 왕 혼자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실 사람도 대신들도 여러 참리한다. 보는 눈이 다 다를 것이다. 왕은 가끔 이런 탄식도 했을 것이다. 아, 내 스타일이 아닌데. 원빈은이 상관에서 최종 우승자가 될 정도로 빼어난 여인이었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홍구경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한마디로 낙하산으로 꽂아넣은 것이다. 그럼에도 신하들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찍혀서 무슨 보복을 당할지 몰랐다. 홍구경의 파워가 얼마나 막강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정조 입장은

2:21 달랐다. 왕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외척 세력이다. 그래서 태종 이방우는 외척 세력 민시 가문을 그토록 가혹하게 다루었었다.었다. 킬방원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군궐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홍구경이 자신의 누이도 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정조는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저시키가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선을 넘네. 이러지 않았을까? 홍구경의 힘은 이제 왕실까지 뻗칠 수 있게 되었다. 왕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지. 누인는 왕의 마누라지. 이제 아들 만났는다면 그 아들이 왕이 된다면 홍구경이 최종 모표는 이쯤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원빈이 책봉된지 1년도 되지

3:06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나의 겨우 12살에 홍구경의 상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멀쩡한 원빈이 왜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까?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사유를 알 수 없지만 해경구 홍시의 회고록인 한중록에 의한다면 홍구경은 누이의 죽음을 독살로 의심했다고 한다. 배후로는 효왕우를 지목하였다. 효의 왕우는 정조의 왕비였다. 왕비와 원빈 사이에는 왕의 총회와 왕실의 위상을 둘러싼 미묘한 긴장 관계가 존재했었다. 교의 왕우는 왕의 정비로서 왕실내에서 가장 높은 내명부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홍구경의 누이가 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배경을 생각한다면 가만히

3:53 있다가는 언젠가는 자신의 자리도 위태로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장이빈의 역사가 겨우 얼마 전 일이었다. 효의 왕우는 원빈의 출연에 노심 초사했을 것이다. 홍구경은 왕비를 의심했다. 왕비의 나인들을 잡아다 혹독하게 고문하며 배후를 캐내려 했다. 말해라. 니년이 내 누이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이지. 아니옵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었싸옵니다. 누가 시켜서 그런 짓을 했느냐? 일계 신하가 감히 왕비의 나인을 건드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직 홍구경만이 그런 일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하지만 아무리 고문하여도 나인들의 입에서 효왕우를 지목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원빈이 죽었으니 신하들은

4:40 새로운 빈을 간택할 것을 청하려 했다. 그런데 그건 안 되지요. 후사에 관련한 일을 어찌 다시 한단 말입니까? 그게 무슨 말이요? 다시 하지 않으면 어찌 한단 말이요? 홍구경에게 원빈 홍시에 다른 누이가 있었다며 큰 누이를 꽂아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누이는 없었다. 대신 은원군 2인의 아들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 왜 하필 상계이었을까? 당시 정조는 즉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실의 후계 구도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홍구경은 자신의 누이 원빈을 통해 종조의 후사를 얻어 권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원빈이 갑자기 죽어 버리자이를 대체할 수단이 필요했다. 홍구경은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왕실 혈통

5:27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후사를 확보하며 왕실과의 연결고리와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계산하였다. 일각의 홍구경은 조선 최초의 세도 정책가로 평가받는다. 세도 정치는 임금의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고 관직과 국정 운영을 사적으로 전행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원빈이 죽었고 상계군을 양자로 들인 것이니 엄밀히 말해 홍구경은 세도 정치가 아니라 세도 정치를 할 뻔했다 정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정조는 홍구경의 선넘는 행위들을 계속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처식해 옛정만 아니면 자르는 건데 이랬을 것이다. 어쨌든 홍구경은 명신상부 조정의 넘버 2였다.

6:13 홍국경은 계속 잘 나갔다. 수기소라는 조직을 통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조종 인사, 정책 위반, 후계 문제까지 사실상 총리 이상의 위치에서 종의 권력을 대행하였다. 본인뿐 아니라 그의 일과 친척 대부분이 조종내 핵심 요직을 창악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홍구경은 아무도 예사지 못한 상소를 올렸다. 신은 감히 성상의 깊은 은혜를 져버리지 않으려 하나 신체가 세약하고 사례가 부족하여 국사를 맡기에 부적절함을 스스로 깨달았싸옵니다. 이에 모든 직을 사임하고자 하옵니다. 그 잘 나갔던 홍구경이 갑자기 사표를 제출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정조가 그 사표를 즉시 수락한 것이다. 정조는 홍구경에게

7:00 봉조아라는 직함을 내리고 조종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때 홍구경의 나이 불가 32살이었다. 봉조아는 정기적으로 군궐에 출입해 조회하지만 실무 행정은 맞지 않는 원로급 고위직이다. 사실상 은퇴한 신하에게 예우 차원에서 주는 명예직이었다. 백발의 봉조안은 있어도 흑발의 봉조안은 없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32살 홍구경이 이직함을 받았으니 사람들은 그를 흑두 봉조하라 불렀다. 약간 농구는듯한 느낌이 있다. 겉보기에는 명예로운 은퇴를 허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조가 홍구경을 실각시킨 조체였다. 즉 물러나라 그러면 체면은 살려주겠다라는 뜻이 단기 처사였다. 그런데 그 잘 나갔던

7:46 홍구경이 왜 갑자기 사직을 청한 것이며 왕은 왜 이것을 즉시 수락했을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진 바가 없지만 대충 느낌은 온다. 홍구경의 힘이 너무 커지고 있었다. 그의 누이 원빈이 죽었음에도 양자를 들이면서까지 왕실의 줄을 닫게 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나중에 그 세력이 왕실에 얼마나 위협이 될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태종 이방운이었다면 싸그리 모가지 댕강했을 것이다. 민시 가문이 어떤 고추를 겪었었나? 원경우가 얼마나 통곡했었나. 하지만 정조는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 되지 못했다. 죽이자니 예정이 아쉽고 살리자니 후안의 부시를 키우는 것 같고 정조의 선택은

8:33 겉보기에는 은혜, 현실로는 숙청이었다. 이런 대화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 구경이 많이 컸네. 원래 키는 내가 더 컸다. 짧게 말할게. 자진 사퇴하거라. 그럼 봉조하로 살려는 드릴게. 하지만 홍구경의 당녀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홍국경의 귀한을 꿈꾸며 정치적인 움직임을 가졌다. 그러나 오히려 여풍을 막고 조종에서 축출되었다. 정도는 생각하였다. 살려줬으면 조용히 지낼 것이지 더 이상은 안 되겠네. 홍구경 1780년 홍구경의 백부 홍순이 파직되고 홍시가문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이어 김종수의 탄핵 상소가 초종에 올라왔다. 홍국경은 국쟁을 사사로의

9:19 하였고 왕실의 후계까지 손대려 하였습니다.이는 묶이 옵니다. 홍구경을 벌하시옵소서. 정조는 상소가 올라오자마자 채택했고 마침내 홍구경은 방출 처분을 받아 모든 권력을 잃었다. 한중록은 이상소 역시 정조의 뜻이었다고 생각했다. 탄핵을 시작으로 홍구경의 몰락은 겉잡을 수 없이 빠르게 진행됐다. 그는 강원도 횡성으로 유배되었다. 조선에서 제일 잘 나갔던 홍구경이 하루 아침에 허름한 초과집에 유배되어 살아야 했다. 간간히 전령이 소식을 전해 왔지만 별 내용은 없었다. 홍구경은 하염없이 들판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렸다. 이런 상황을 꿈꿨을 것이다. 있을 때 몰랐는데 없으니까

10:05 자네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비로소 깨달았네. 내가 잘못했네. 자네 자리는 만들어 놓았으니 제발 궁으로 돌아와 주게. 하지만 정조의 콜은 없었다. 관리 하나가 와서 임금의 차가운명을 전화했다. 어명이요. 홍구경은 유배지를 강릉으로 옮기시오. 마치 한 번 더 세상과 거리를 두라는 명령 같았다. 강릉의 바다소리가 홍구경에 있는 정적과 같았다. 눈을 감고 들으며 예전 조정의 장면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상소를 잃던 손끝, 정조의 담한 눈서 그리고 누이 홍씨의 웃음 소리까지도 유배지에서 홍구경은 오만했던 지난 날을 자문하며 살았다. 그가 선택한 길이 옳았는지는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가끔 찾아주던

10:53 측근들조차도 이제는 발길이 뚝 끊어졌다. 권세는 사라졌고 남은 것은 외로운 뿐이었다. 1781년 4월 28일 홍구경은 그곳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34세였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조종의 반응은 냉담했다. 국문 하나 조사한 없이 그 이름은 조용히 사라졌다. 종조는 다시는 홍구경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오직 정사를 돌보는 일에 매진하였다. 금란 정권을 폐제한다. 그리고 수원 화성에 성을 지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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